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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책 크리틱/이도연/풍경의 깊이와 리듬의 진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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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이도연
풍경의 깊이와 리듬의 진폭
존재의 그늘과 풍경의 깊이- 김완하, 절정
김완하의 시적 여정이 오롯이 녹아 있는, 절정(작가세계, 2013)에는 내면의 수직적 깊이로서, 다채로운 풍경의 그늘들이 돋을새김 돼 있다. 대개의 서정시가 자기 동일성의 완결된 구조를 선호하곤 하지만, 김완하의 서정은 느슨한 동일성 속에 신비로운 차이들을 갱신해내며 부단한 내면적 자기 환기의 순례巡禮에 나선다. 그것은 존재의 피상적 아름다움에 도취되지 않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의 연면한 내성耐性과 지구력에 주목한 결과이다. 가령 “저 잉걸 속에도 겨울이 있다/여름 있고, 봄 있고/또 가을이 있다”(「가을 동백」)는 진술은 동백꽃에 함축된 서늘한 시간적 깊이와 계절의 풍화작용, 그 부침의 두께를 상징한다. 표제작인 「절정」은 히말라야의 “더 높은 벼랑으로 차 오”르는, “쇠재두루미”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히말라야 고봉高峯의 높이와 함께 시의 높이를 결정하는 것은 산맥의 고도高度나 새의 눈부신 비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의, “천길 바닥으로 떨어지”며 “쌓여”가는, 쇠재두루미떼의 몰락의 “그림자”이다. 수직의 상승은 하강의 깊이로 인해 “점점 높아”가는 것이다. 화자가 빛나는 정상의 고도와 화려한 새의 날갯짓만을 탐했을 때, 이와 같은 시적 진경眞境은 도저히 펼쳐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상상적 구상력構想力의 높이와 화자의 인식의 깊이를 동시에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외부적 현상물의 가시적 고도가 아니라 내부의 절정, 달리 말해 내면의 깊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례로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건/뿌리의 깊이를 그리워하는 까닭이다”(「시간의 각角」), “넘치는 햇살을 쟁여 안고/너울너울 내 안으로 키워내는 그늘”(「모국어」)과 같은 구절들이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감각표상에 해당할 것이다. 이상의 시적 주제들을 가장 선명한 이미지로 감싸 안고 있는 작품은, 「그늘 속의 집」으로 보인다.
그림자 따라 걷다가
빈집 앞을 지난다
제 그림자 볼 수 없어 매미는
땡볕 속에 소리를 쏟아낸다
소리에는 그림자가 없다
마당엔 풀들이 가득 에워싸고
집에는 그림자 풍년이 들었다
제 그늘 속에 집은
턱 하니, 또 한 채의 집을 짓고
마당 가득 풀을 키웠다
우거진 그늘 안고 누웠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밖의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집은 비로소 집에서 벗어나
그늘 속으로 내려 앉았다
집을 세운 사람들 품고,
낑낑대는 강아지 한 마리의 밤도
아늑하게 품어 키웠다
이제 새벽 별빛만 뜰팡 위로 구른다
사람들이 떠나자 집은
비로소 허물을 벗어버리고
한 채의 그늘로 돌아가
집 속에 집을 완성하였다
-「그늘 속의 집」 전문
이 작품은 존재자로서 “집”의 존재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집은 “빈집”이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퇴락하고 몰락하여 존재하고 있다. 존재가 깃들었었던 텅 빈 집 속에는 지금, “그림자 풍년”이 들었다. 존재자들은 그늘 속에 제 자신의 “그림자”를 각각 드리운다. “집” 역시 “제 그늘 속에”, “턱하니, 또 한 채의 집”을 지었다. 이 시의 의미의 중핵은 “집은 비로소 집에서 벗어나”라는 역설적 어구와 함께 “집 속에 집을 완성하였다”는 마지막 구절이다. 집은 ‘손안에 있음’의 존재성격으로 사용사태를 갖으며, 만물이 거居하는 존재의 안식처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깃들다’가 표현하고 있는 집의 수용성과 포용력에는 이와 같은, 집의 도구적 성격이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이라는 존재자 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존재의 비본래성이다. 그것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점은 “비로소 허물을 벗어버리고”라는 축자적 표현으로 암시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인공적 사물인 ‘집’에게도 존재성이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듯하다. 여기서 존재Sein를 매개하는 것은 “그림자”이다. 통상 그림자는 사물의 비본질적 흔적물로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 구성물로서의 성격이 보다 부각되고 있다. 3행의 “제 그림자 볼 수 없어 매미는”,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처럼 “그림자”는 존재 구성물로서 존재의 본래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행의 시적 완결은 “집”의 본래성의 회복과 함께 존재자에 있어 존재의 ‘열어밝힘’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존재자의 실체이자 본질 구성물로서 사물의 빛과 그림자, 즉 “그늘”을 존재 해명의 단서로 제시함으로써 풍경의 깊이를 심화한다. 이런 맥락과 잇닿고 있는 작품, 「옹이 속의 집」은 “딱따구리”가 “허공”에 지은 “둥지”, 곧 존재의 집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인간인 “나”는 그 허공의 심연, 다시 말해 그 풍경의 깊이에는 이르지 못한다. “나는 그 안 들여다 볼 수 없어”, “이 구멍은 끝내 닿을 수 없다”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허나 「꽃과 상징」에서 화자는 시인의 유일한 무기인 언어가 사물의 핵심, 존재에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꽃은 이름을 낳고 그 이름이/꽃에 완벽히 육화될 때”란 언어가 사물의 실체에 도달하는 과정과 순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한 꿈에 가까운 것이지만, 김완하는 언어를 통해 존재에 직접 가닿고 싶어 한다. 그것은 존재에 드리워진 그늘에 한참을 가라앉아서 시가 비로소 풍경의 깊이를 획득할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완하의 시는 그 험난한 도정 속에서 언어의 불가능한 꿈을 실험하고 있다.
존재의 함성과 리듬의 진폭- 문효치, 별박이자나방
문효치의 서정 시편들을 정갈하게 갈무리한, 별박이자나방(서정시학, 2013)은 시로 쓴 우리 동 · 식물 백과사전으로서, 한때 유행했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시리즈의 2013년 최신판이다. 시인이란 무릇, 우주의 모든 물상과 존재에 깃든 언어와 나지막한 숨결에 귀 기울여 고요히 분주하는 자이다. 이는 서문격인 「시인의 말」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데, 총 4부로 이루어진 시집에서 시인은, 눈길이 잘 가지 않았던, 주로 벌레들과, 식물들과, 꽃들과, 새들과, 온갖 미물들(‘겨우’ 존재하는 이것들의 사소성은 ‘간신히’를 뜻하는 사투리, “뽀도시”라는 말의 눈에 띄는 반복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에로 자신의 시야視野/詩野를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시집의 전언은 확고하고 일관되다. 자연의 모든 물상이 생태계의 각각의 구성원으로서 단독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촘촘히 맺고 있는 존재의 거멀못, 영롱한 인다라망因陀羅網을 적극 옹호하고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그 방식은 우선, 자연계의 물상들을 직접 일일이 시로서(써) 호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명無名의 존재들에 대한 사사로운 이름붙이기, 고유한 명명命名이다. 명명이라는 관계의 동사적 사건은, 무상한 자연물에 지나지 않는 한낱 사물들 하나하나에 존재론적 개별성을 부여한다. 가령 “저 먼 별의 별별 것”(「도토리노린재」)에서의 중의적 반복은 그러한 시적 인식과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제 시집의 내부로 존재의 함성이 어우러진 대자연의 교향곡交響曲이 시나브로 울려 퍼진다(제 딴에 토해내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자체만으로도 대자연이 연주하는 황홀한 음악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그것은 “미지의 별을 향해 발신發信하는/버튼button”(「황철나무잎벌레」)으로서, 협소한 인간중심주의와 지상의 경계마저 단숨에 넘어서면서 범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한다. 존재의 원환圓環으로 약동하는 생명의 율여律呂에서 탄생하는 우주적 군무群舞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형적은 “풀들의 유령 속에 나도 한다리 끼어/고시랑거리고 있었다”(「닭의장풀」)와 같이 드문드문 간신히 발견되거나 아예 그 희미한 종적마저 자취를 감추고 없다. 시집은 이와 같이 자연의 풍요로운 조화와 행복한 평형감각을 기반으로 완만히 지탱되고 있지만, 간간이 그 유기적 그물망에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균열의 양상들이 노출되기도 한다. 그 위기감은 인간과 자연의 원환적 총체성의 붕괴, 직접적으로는 환경파괴에 기인하는 생태계 전반의 위기로부터 서서히 도래하는 것이다. 화자는 그 불안감을 감추지 않아서 텍스트의 표면에 직접적으로 현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미묘한 긴장감이 시집의 전체적인 주제를 형성할 만큼 위력적이진 않다. 그보다는 존재들의 개성적 발화發話와 산발적 개화開花 속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공명共鳴의 감각이 리듬의 진폭을 따라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상의 입장들과 태도가 범신론적 성격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대표적으로 “벌레는 어느덧 부처가 된다”(「모시나비」)나, “딱지날개 밑으로/붉은 철리哲理가 스며든다// (중 략) //부처나 벌레나······”(「모자무늬주홍하늘소」)라는 소박한 진술에는 한결같이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의 불교적 세계관과 형이상학적 진리가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의 견고한 전제이자 이러한 시적 인식의 최종적 결과물로 간주할 수 있는 시편은, 「내 살 속에」라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내 살 속에
고향의 대추나무 옮겨 심어놓은 지 오래다
해마다 대추꽃이 피고
대추가 열리는데
이놈이 빨갛게 익을 때 보면
해내뜰 하늘 위에 뜨던 별이다
그 옛날 밤길을 가다 보면
그 별이 늘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몇십 년이 지난 여기 서울에까지 따라다닐 줄은 몰랐다
이어서
감나무나 은행나무도 모두
내 살 속에 여기저기 옮겨 놓았더니
아, 그놈들도 똑같이 해내뜰 하늘 위의
그 별들을 몽땅 가져와서 매달고 있는 것이다
가을만 되면
그래, 내 살이 얼얼하고 후끈후끈 하는 것이다
-「내 살 속에」 전문
“살”의 신체적 물질성이 환기하는 다양한 감각표상들로 직조된 위 시에서, 화자는 도시의 현재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고향-도시’의 공간적 거리와 ‘과거-현재’의 시간적 거리를 각각 호명하면서, 거기에서 빚어지는 이질성과 차이에 대한 실존적 감각을 재구성해놓는다. 마치 살붙이처럼 “내 살 속에” 접목해놓은, “대추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들은 화자의 상상적 구성물이다. 그것은 ‘과거-고향’의 기억 속에서만 아득히 존재하는 것이며, ‘현재-도시’의 물리적 실체로서 가까이 인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마음의 텃밭에 뿌리내린 것들로서, 빛깔과 소리와 냄새 등의 신체감각으로만 저장되며 지각된다. 1연에서 탐스럽고 붉은 가을 대추알의 이미지는 “별”로 치환된다. 여기에서 “해내뜰”이라는 사투리의 의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군산의 서해 바다를 떠올린다면 아마도,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라는 ‘해내海內’의 일반적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짐작된다. “대추”=“별”이라는 등식은 인접성이 다소 떨어지는 병치은유에 가깝다(물론 대추꽃의 개화한 형태는, 다섯 방향으로 돌출된 별 모양과 흡사하다). 그러나 하나의 대추알이 아니라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알의 무더기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의 또렷한 배열만큼이나 선명하고 인상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겠다. 2연의 도입부는 대추알의 빛나는 열매가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맑은 별빛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어지는 “감나무”나 “은행나무”의 열매 역시 동일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화자의 내면에 각인됐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그 나무들 열매가 치렁치렁 달리는 가을날이면, “내 살이 얼얼하고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것이다. “후끈후끈”이 상징하는 마음의 열기와 함께 “살이 얼얼하”다는 불편한 신체반응은, 이상의 감각적 기호들이 ‘나’의 현재를 구성하는 실존의 감각으로서 현존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를 <부재하는 현존>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재하며 현존하며, 현존하며 부재하는, 부재하는 것의 현존이다. 앞서 우리는 문효치의 이번 시집이 존재의 원환적 총체성을 적극 옹호하고 표현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약간의 균열이 그 현재적 양상들로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헐거워진 현재의 위기감을 묵시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생태계의 근원적 인다라망이 결코 훼손되거나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궁극의 가치임을 다시금 재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 너머 울려 퍼지는 존재의 연쇄적 반향反響으로서, 우주의 모든 물상을 제 품에서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의 화자, <나>는, 결국, <나무>로 될 것이다. 하늘로 향해 뻗은 내 몸의 가지 위로, 그 살틈으로, 이제, 후드득, 열매가 맺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함께 검토한 두 권의 시집 속에서 다시금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서정의 진화는 자기동일성의 안온한 구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않는 데서 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시적 긴장을 거부하는 내면적 동일성의 완고한 자기반복이나 경험적 현실로서 역사적 균열상을 외면할 때, 서정은 기만적 자기만족의 깊은 수렁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김완하와 문효치는 오랜 시작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에 내재된 풍경의 깊이와 리듬의 진폭을 긴장적 언어 속에서 새롭게 실험함으로써, 서정의 자기갱신을 직접 구현해내고 있다.
*이도연 : 약력: 2007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 저서로 현대 문학비평의 계보와 서사의 지형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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