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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책 크리틱/허희/편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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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131회 작성일 15-07-06 14:20

본문

책 크리틱
허희


편지할게요
―장이지의 라플란드 우체국


교환이 사랑의 형식일 수 있을까.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동일한 값어치를 지닌 A와 B를 각각 나와 당신이 갖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A와 B를 맞바꾸자고 제안한다.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A와 B가 등가이므로 번거롭게 바꿀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면, 당신은 명실상부한 경제적 주체이다. 반면 A와 B의 등가 여부에 관계없이 둘을 바꾸어도 괜찮다고 답한다면, 당신을 마땅히 사랑의 주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전자가 A와 B를 주고받는 행위를 무용한 것으로 인식하는 데 비해, 후자는 그것을 통해 잉여가치가 창출되고 A와 B의 총량이 증가함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부등가교환에 기반을 둔 노동 착취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론을 쓰기 이전, 청년 마르크스는 화폐 속성을 분석한 장의 마지막 문단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였다.  
    
인간에 대한 ― 그리고 자연에 대한 ―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그대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논쟁적인 저작의 문제적인 구절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사랑의 주체가 되지 않는 한, 가치가 점증되는 교환은 결코 일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주체에게 있어서 교환은 단순한 소유권의 이전이 아니라 상호 관계망 안에서 의미를 증폭시키는 일과 같다. 새삼 교환과 사랑의 메커니즘을 상론한 연유는 장이지의 세 번째 시집 라플란드 우체국을 읽기 위해서이다. 연꽃의 입술 이후 2년 만에 신작을 출간하며 시인은 이러한 전언을 덧붙여두었다. “이 편지는 또 몇 만 시간을 지각하여 당신에게 닿을까요?/닿아서는 몇 만 밤의 퇴색을 거쳐 물빛이 되어/당신 마음에 스밀까요?”(시인의 말) 
우체국과 편지라는 시어가 방증하듯이, 이 시집은 시인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한 권의 서신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연서라고 규정할 수도 있으리라. 의문문의 형태로 유보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이 편지가 늦게라도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닿아서는”으로 시작하는 두 번째 문장을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물론 데리다를 독해하는 아즈마 히로키의 말마따나 ‘우편 공간’에서 편지가 반드시 수신자에게 배달된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 우편은 아예 배달이 되지 않거나 다른 수신자에게 배달될 지도 모르는 오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나는 위에 언급한 시인의 말을 근거로 하여 장이지가 상정하는 수신자 “당신”이 시인 자신도 포함된, 이 시집을 접한 바로 우리라고 믿고 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실패의 불안을 전제하나 그가 쓴 편지는 언젠가 우리에게 “닿아” “마음에 스밀” 것이다. 비록 편지가 “퇴색을 거쳐 물빛이 되어” 배달된다고 하더라도 그 빛의 다채로운 스펙트럼과 우리가 감응한 결과물이야말로 실은 그가 보낸 진짜 편지―연서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드넓은 사랑은 이 시집에 짙게 깔린 우울의 정조까지 품는다. 우리는 “사랑으로서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해야 한다는 청년 마르크스의 언명을 떠올리면서 라플란드 우체국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명시적인 가치 외에 교환 과정에서 새롭게 파생하는 가치들. 이를 적시하려면 많은 시의 일부분을 조합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한 편일지언정 전문이어야 한다. 

멀고 먼 라플란드 소읍까지 와
우체국을 찾는다. 찾아 헤맨다.
2차선 도로 위에
자전거만 몇 대 오가고
바람에 먼지 하나 실려 오지 않는다.

수석壽石집 꼽추 아저씨가
햇볕을 쬐고 앉아 있는 거리가 적요하다.
꼽추 아저씨의 박래품 우표들은 여전한가.
내 우표 수집책을 들고 가버린
국민학교 때 동창생은 잘 있는가.
성가成家하여 아이들도 잘 크는가.

편지 봉투에 쓰인 주소를 손으로 더듬는다.
단층집들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데
거리에는 그림자 하나 없다.
이 거리에는 간밤 세상의 멸시를 
몰래 누는 맥주색 소변으로나 푸는
술집 작부들이 드나드는 목욕탕이 있다.
목욕탕에서 몰래 누는 오줌을 들키며
그네들은 버리고 온 집 생각도 할 것이다.
목욕탕 건너편 미용실에는
파마약 냄새와 치정의 소문들이 항상 배어 있고
모퉁이 의상실의 이혼녀는
친구 남편을 사랑하여 슬프다. 못생겼으나 슬프다.
못생겼으나 그녀에게는 아들이 있다.

이 거리에는
심부름값을 자주 잃어버리는 사촌형들이 산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그림자도 없는 라플란드의 빛 속에서
적막하게 늙어간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으로 늙어간다.
몰래 씨를 뿌리며 익살맞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바둑이도 익살맞게 늙어간다. 본전이라 우기며 늙어간다.

멀고 먼 라플란드 소읍의 교육청 앞 이발소에서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오는
말쑥한 소년을 만난다.
겉봉에 쓰인 주소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편지를
이제는 그만,
그 소년에게 주어야 하는데…….

우체국을 찾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고.

―「우편 6」 전문
라플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이곳에는 산타클로스 우체국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산타클로스에게 보낸 각국의 편지가 라플란드로 모이면 산타클로스 우체국에서는 답장을 써서 발송한다. 합리성에 기초한 객관적 시각에서 보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짓이다. 산타클로스는 실재하지 않고 편지 회신은 우체국 직원이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사실의 층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해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순진한 어린이뿐만 영악한 어른도!―이 라플란드로 편지를 보내고 우체국에서도 답신을 하며 교환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라플란드로 편지를 쓴 사람들의 대부분은 산타클로스에게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적었을 것이다. 선물은 현재 자기가 간절하게 원하는 소망을 표상한다. 실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욕망을 알고 있으며, 누군가를 향하여 기원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진실의 층위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시의 화자는 “멀고 먼 라플란드 소읍까지 와/우체국을 찾는다. 찾아 헤맨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라플란드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다. 그가 헤매는 거리는 이국의 정취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다가 “적요”하고 “그림자 하나 없다.” 오히려 라플란드는 화자의 유년기가 담긴 과거의 시간을 장소화한 곳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국민학교 때 동창생”을 상기하고 “꼽추 아저씨의 박래품 우표들은 여전한가.”라고 어린 시절 자신이 알고 있던 인물들의 안부를 묻는다.
화자의 목적은 단지 자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편지 봉투에 쓰인 주소”로 편지를 부치기 위해서 라플란드 우체국을 찾고 있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오는/말쑥한 소년”이나, 화자는 “그 소년”을 “교육청 앞 이발소” 부근에서 만남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전하지 못한다. 우체국을 경유해서만 배달될 수 있는 편지인 까닭이다. 하지만 화자는 “우체국을 찾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고.” 결국 화자는 “겉봉에 쓰인 주소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편지”를 부치지 못한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김영희가 파악한대로 “소년은 아마도 다른 시간 속의 자신일”(「우울한 편지―J씨의 알려지지 않은 생활」) 것이다. 다만 뒤이어지는 문장―“이는 ‘나’와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일까.”―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전술하였듯이 아즈마의 ‘우편적 불안’은 이 시집의 기조와 결부되나 전부를 통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는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한 라캉의 테제를 상술하는 지젝의 견해를 참조하고자 한다.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 (중략) 그것의 진정한 주소는 말하자면, 그것을 받거나 받지 않는 경험적인 타자가 아니라 편지가 순환 속에 집어넣어지는 그 순간, 즉 송신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외화’하는, 그것을 큰 타자에게 배달하는 그 순간, 큰 타자가 편지를 인지하고 그리하여 송신자에게서 그것에 대한 책임을 덜어 주는 그 순간 그것을 받는 큰 타자(the big Other), 즉 상징적 질서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화자가 소년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행동과 관계없이 편지(=시)가 쓰였다는 자체로, 편지는 상징계를 유지하는 큰 타자에게 배달된다. 이 편지는 화자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순환하면서 주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앞서 나는 시인이 보내는 편지의 수신자 “당신”이 시인 자신을 원소 중 하나로 삼는 독자인 우리의 집합이라고 밝혔다. 조금 더 부연하자. 문학장에서 텍스트는 독립적인 산물이기는커녕 독자와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의미를 구성해가는 불확정적인 요소이다. 주지하다시피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한들 그것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기에 텍스트라는 명칭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염두에 두는 내적인 수신자가 누구이든 간에 텍스트의 궁극적인 수신자는 독자인 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착한 편지에 대하여 라플란드 우체국이 답장을 하듯이, 우리는 시인 혹은 화자의 편지에 끊임없이 응답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교환은 일방적인 관계로는 성립할 수 없다. 이 시를 비롯한 이 시집은 독자에게 읽히고, 독자는 정동하며 텍스트에 표출된 슬픔과 고독 이상의 풍부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를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를 보아도 그러하다.

소설이나 만화 취미는 진작 잃어버렸다.
사랑 노래도 어느덧 졸업해버리고
홍대 어느 뒷골목이나 대학로 어둑한 술집을 돌며
공술을 얻어먹고 주정을 늘어놓는 일도 이제는 없다.
친구를 배반하고 여자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끙끙대던 평화로운 시절은 끝났다.

길을 잃을 때마다 찾곤 하던 별이거나
이정표 같은 여자도 일언반구 없이 떠나고
오늘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졸업생 코스프레다.

모든 것이 등 뒤로 빠르게 멀어져서는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나만 남는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졸업을 하더라도
이제 누가 있어
하루하루의 고해성사를 들어줄까.
나는 매일매일을
세상을 속이며 살고 있는데.

―「덩그러니」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덩그러니,/나만 남는다.”라고 쓸쓸하게 읊조리고, “이제 누가 있어/하루하루의 고해성사를 들어줄까.”하고 침울해한다. 그러나 그가 시를 썼고, 독자인 우리가 읽었고, 함께 감응하였다. 화자의 “고해성사”는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진다. 별 것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보다 대단한 사건을 나는 알지 못한다. 텍스트 안에서 외로운 그는 우리와 조우하여 문학장에서 “덩그러니” 혼자 놓이지 않게 된다. 시인은 조심스럽게 염려했으나 그의 편지는 우리에게 닿고 스민다. 우리가 보낸 답장도 그에게 닿고 스밀 것이다.


*허희 : 1984년 서울 출생. 2012년《세계의문학》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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