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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책 크리틱/이성혁/소진되는 삶과 '환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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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이성혁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
소진되는 삶과 ‘환상의 빛’
강성은의 두 번째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은 기대를 갖고 읽은 시집이다. 그의 첫 번째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를 인상 깊게 읽은 바 있었고, 그 후 잡지에 실린 그의 시 역시 주목했던 바 있기 때문이다. 첫 시집의 성격에 대해서는, 시인 자신이 서시 격인 「세헤라자데」에서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라는 구절을 통해 어느 정도 말해주고 있다. 그 시집은 악몽과 같은 이야기를 몽롱한 초현실적인 몽환으로 풀어낸다.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환상의 빛」)와 같은 구절은 악령들이 등장하는 악몽을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같은 몽환과 결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몽환이나 악몽은 200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여성시의 일부가 줄곧 보여주고 있는 시법(詩法)인데, 강성은 시는 우화적인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리고 소외나 무(無)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몽환적이지만 정돈된 말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 역시 그의 첫 시집이 가진 특유한 면이다.
단지 조금 이상한의 시편들은 전보다 더욱 차분한 어조와 단정한 구성으로 시인의 몽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두 번째 시집의 특성도 첫 번째 시집의 연장선상에 있다. 첫 번째 시집에 실린 「환상의 빛」과 같은 제목의 시가 두 번째 시집에 세 편이나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이는 강성은 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첫 번째 시집의 「환상의 빛」은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이 겨울밤의 자막은/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라는 구절로 끝나고 있는데, 두 번째 시집은 속지 맨 앞장에 적힌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이 문장은 이 시집의 세 번째 「환상의 빛」 맨 마지막 연의 것이다.)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는 점도 두 시집의 연속성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시집을 시작하는 첫 문장은 한 문장으로만 적혀 있는 뒤표지의 표사 “쏟아지는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와 호응하고 있다. 이 세 문장, 즉 “끝내 읽지 못한다”와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로의 이행은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연속성과 차이성을 드러낸다.
“끝내 읽지 못한다”라는 문장은 시인이 그래도 빛의 세계를 알기 위해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는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지를 버리지 않았지만 ‘끝내’ 읽지 못했다는 의미로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빛이 가득해서/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는 어떤 상황이 두드러져서 진술되고 있는데, 시인이 가득한 빛 속에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라는 문장은 시인이 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고 “쏟아지는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것과 같은 자세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단지 조금 이상한에는 이렇듯 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자세가 전환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가득한 빛 속에서 보이는 무엇을 기록하다가 눈을 감음으로써 끝나는 시집. 시집의 첫 페이지와 뒤표지 문장의 대응은 시집의 완결성을 고려한 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일 텐데, 이러한 입구와 출구로 인해 독자는 이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어떤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시집을 깊이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간명하게 뒤표지에 박아 넣은 그 한 문장과 얇은 시집 두께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두꺼운 시집이 너무 많다. 시가 길어지고 있거나 한 권의 시집에 많은 시편을 담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시인이 너무 욕심을 낸다고나 할까. 이러한 추세에 거스르는 간명한 느낌의 뒤표지나 얇은 시집 두께가 나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이 시의 서두에 실린 「기일(忌日)」과 끝에 실린 「구빈원」이 ‘버림’과 ‘버려짐’을 토픽(topic)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시인의 의도적인 배치에 따른 것을 텐데, 이러한 배치는 이 시집이 버리면서 쓰기 시작한 것이며, 결국 버려지면서 끝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버리기’ 또는 ‘버려짐’의 주제와 시집의 두께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많은 시편들을 시집에 담는 것은 이러한 주제와 구성과는 맞지 않는 일일 테니 말이다. 여하튼, ‘버림’과 ‘버려짐’ 사이에서 이 시집의 시편들은 전개된다고 하겠는데, 우선 「기일」의 전문을 인용해보면 이러하다.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는 ‘누군가’란 바로 시인 자신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강성은 시인에게 시인이란 세계는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 역시 “버려야 할 물건이 많”아서 무엇인가를 버리면서도 한편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쓰레기를 만드는 세계 밖에 있는 이가 아니다. 그 역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시인은 무엇을 버리고 있는가?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는 미묘한 문장을 보면, 그 무엇은 기억일 수도 있으며 마음의 상처, 또는 사랑일 수도 있겠다. 예의 문장이 죽은 사람을 마음에서 보내기 위해 그의 물건을 버린다고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뒤의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문장을 보면, ‘버리기’란 죽은 사람에 대한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애도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문장은 살아 있는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그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물건을 버린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버리고 있는 그 무엇은 사랑과 상처와 연관된 것이라고도 생각되며, 이때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는 그 다음 문장도 잘 이해된다. 누군가를 버리고 있는 시인 역시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던 것이다. 하여, 시인도 저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이이고,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죽은 사람과 같다. 시 쓰기가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죽이고 그의 물건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시 쓰는 날은 모두 ‘기일’이다. 허나 버리는 자인 ‘누군가’의 일족인 시인은 그 ‘누군가’보다 일을 하나 더 하는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일이 그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버린 것 속에서, 더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버려진 것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 내면에 시인이 버려서 쌓여 있는 것들과 세계에 쌓여 있는 버려진 것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추어내는 일이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가 단지 조금 이상한의 시편들일 터, 이 작업을 하면서 얻은 인식을 집약하여 정리한 것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인 「구빈원」일 것이다. 전문을 읽어본다.
아이들이 버려진다
노인들도 버려진다
청년들도 버려졌다
중년들도 버려졌다
개들도 새들도 물고기도
실은 모두가 버려지고 있다
너무 먼 곳에 버려져 잊었을 뿐이다
이 행성이 우주의 거대한 쓰레기장이라는 걸
우리는 모른다
기억하지 못한다
버린 자들이 가끔 떠올리는
악몽이라는 이름의 푸른 별을
이 시를 읽고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를 가져와 ‘역사의 천사’에 대해 말한 부분을 상기했다. 벤야민은 ‘역사의 천사’가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면서, 그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강성은 시인에게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시인이란 그 ‘역사의 천사’가 잔해를 뒤지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아닌 것 같다.
시인 역시 벤야민처럼 ‘지구’를 버린 자가 버린 버려진 자로 이루어진 쓰레기더미가 잔해처럼 쌓여있는 세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시인은 세계에 이미 파국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며, 그래서 그는 역사의 천사처럼 죽은 이를 불러일으키고자 하거나 잔해들을 결합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미 파국이 일어났기 때문에, 파국을 저지하고자 하는 그러한 작업은 이미 늦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가 하는 일은 “너무 먼 곳에 버려져” “기억하지 못하”는 진실, “이 행성이 우주의 거대한 쓰레기장이라는” 진실을 역시 “버린 자들”의 일원인 시인이 가끔 꾸는 악몽으로서 떠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빈원」에서 시인은 버려졌으며 지금도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우리에게 지구라는 푸른 별을 뒤덮고 있는 쓰레기더미에서 악몽이라는 진실을 찾아내어 떠올려 제시하는 일이 이 시집에서 행한 자신의 작업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쓰레기더미에서 악몽을 찾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그것은 사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연못 속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를”(「저 연못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보는 일. 그러나 그 그림자는 눈을 떠서 볼 수는 없는 무엇이다. 그래서 시인은 “눈먼 자가 되어 검은 연못을 바라”보면서 “깊어지는 어둠의 내부를 바라”보며, 이때 “검은 물이 피운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나는”(같은 시)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둠의 내부를 보기 위해 눈먼 자에게 세계는 어떠한 모습으로 현현하는가? 우선 알 수 없는 세계로 현현한다. 첫 번째 「환상의 빛」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 시의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나는 운전 중이었다. 한적한 산길이었고 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아카시아 숲이 불어오고 있었다. 해체된 밴드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문득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고 그러나 이 길은 너무나 익숙해서 생각 없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오후였고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집에서 멀어지고 있고 옆 좌석에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차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운전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면허증도 없는 내가 왜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곤하게 잠들어 있다 차는 우리를 싣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집으로 가고 있다 관목 숲에서 밤하늘로 푸른 박쥐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이 시의 제목인 ‘환상의 빛’은 눈먼 자의 눈에 비치는 빛 아니겠는가? 시를 읽어보자. 운전 중인 시인은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고” 더 나아가 운전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옆 좌석에 잠들어 있는 사람도 모르는 이다. 그는 이 모르는 사람과 함께 “집에서 멀어지고 있”는 길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는 이상한 현실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깨달음 직후에 이 집에서 멀어지는 어둠의 길이 도리어 “집으로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이 이상한 현실은 “푸른 박쥐들이 날아오르”는 환상적인 세계로 전화되기 시작한다. 저러한 환상의 세계 안에 시인의 진짜 집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어둠 속을 달려가면서 점차 눈먼 자가 되는 시인에게 현실은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한편으로 어둠의 현실에 환상의 빛이 비추어지기 시작한다.
이 환상 세계는 현실로부터 초월하는 세계라기보다는 현실의 이면, 현실의 검은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종종 느닷없이 깨닫게 되는 낯섦이, 평소 평온한 듯이 보이는 현실의 검은 내부-우리들이 진짜로 살고 있는 집이 있는, “밤하늘로 푸른 박쥐들이 날아오르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그 문은 일상생활에서 느닷없이 뭐가 뭔지 모르는 느낌을 받을 때 열리기 시작하는데, 가령 극장에서 서성이다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초연(初演)」) 모르게 될 때가 바로 그때다.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그때는 “일요일의 낮잠처럼/단지 조금 고요한/단지 조금 이상한”(「단지 조금 이상한」) 순간이다. 그 순간은 “정신을 차리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로 돌아가고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계절처럼/슬픔도 없이 사라”(같은 시)진다.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그 이상한 순간에서, 일상의 현실은 갑자기 비현실적이 되고 틈이 벌어지며 현실 속의 어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우리가 살고 있었던 진정한 집으로 향하는 길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에 그러한 문을 통해 그 집에 갔던 경험을 기억해낸다. “흰 연기를 뿜는 소독차를 따라” “달리다가 문득 멈추면 나는 또 이상한 거리에 서 있었”던 기억, 그때 “꺼질 듯 수그러들다가 다시 살아나는 저녁의 마술 한가운데 마치 나를 따라다니던 그림자가 나를 와락 끌어안은 느낌”을 받고는 “그 따뜻한 손에 이끌려 나는 이 길과 저 골목들 사이를 배회”하다가, 모든 길들이 출렁이는 파도가 되면서 그 “파도에 휩쓸려 나는 우리 집 지붕까지 밀려” “맨발로 지붕 위에 서 있었”(「미아(迷兒)」)던 기억 말이다. 시인은 「겨울방학」에서도 어릴 때 겪었던 이상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경험이 바로 그러한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임을 훗날 깨달았을 것이다. 그 경험은 시인이 어렸을 때 마주친 어떤 남자와 관련된다. 토끼를 잡으러 산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어린 시인 일행은 어떤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가 가리켜준 길을 따라 산을 내려올 수 있었지만 동생과 ‘나’는 그 남자가 귀신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후 동네에서 그 남자를 보게 되는데, 그 남자는 산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되어 지게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방학」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여 야릇한 느낌과 더불어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야릇하고 으스스한 모호성 역시 현실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그런데 「겨울방학」에서의 모호성은 귀신으로 생각되었던 자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났다는 데에 있다. 물론 급격한 노화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실 자신이 나이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너무 늙어버렸다는 느낌은 우리가 현실에서 자주 가지곤 하는 감각이다. 세 번째 「환상의 빛」에서 “옛날 영화를 보다가/옛날 음악을 듣다가/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시인의 느낌 역시, 어린 시인이 급격히 늙은 남자를 만났을 때처럼 현실의 어떤 비현실성에 맞닥뜨릴 때 받게 된 것일 테다.
그런데 늙어버려서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감각은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과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단지 조금 이상한의 또 다른 주요 테마는 바로 ‘소진(消盡)’이라고 할 만큼, 시인은 이 시집에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는 이미지를 많이 새겨놓고 있다. “새벽 눈보라의 입술이 잠든 마을을 무심히 갉아먹었다”(「눈 속에서의 하룻밤」)와 같은 이미지라든가 “나는 반쯤 뜬 눈으로 내 앞의 검은 조청과 아궁이 속의 불꽃이 희미해져가는 걸 본다”(「밤이 간다」)와 같은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진눈깨비」에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성을 띠기도 한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슬퍼서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사람들은 박물관의 공룡들처럼 텅 빈 몸을 가진다
영혼이 스친다는 건 무슨 말일까
며칠째 쌓였던 눈이 녹자 옆집 지붕이 검게 변한다
하얀 얼룩이 사라지자 검은 얼룩이
이 계절 내내 번져간다
어떤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자신을 본다
새들도 페루에 가서 죽는다는 말이 사실일까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겨울과 입 맞춘다
우리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가난과 입 맞춘다
딱딱한 물을 나눠 먹자며 수시로 겨울은 창문을 두들겼다
겨울에 태어난 자들은 겨울이 나눠주는 물을 먹고
부러진 이 사이로 휘파람을 불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한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겨울의 시신을 천천히 혀로 녹여먹었다
- 「진눈깨비」전문
이 시 역시 노화와 소진의 테마를 전개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자신을 본다”는 문장이 전자의 테마를 드러낸다면, ‘진눈깨비’라는 제목은 후자의 테마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시는 앞에서 읽은 시보다 짙은 서정성을 느끼게 한다. 그 서정성은 소진의 테마를 슬픔과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결하는 데서 나온다. 가령 “사람들은 슬퍼서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와 같은 구절이나 “우리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가난과 입 맞춘다”는 구절, “겨울의 시신을 천천히 혀로 녹여먹었다”와 같은 구절이 그렇다. 가난한 ‘우리’는 진눈깨비처럼 소진되는 삶 속에서일지라도 그 삶을 녹여먹을 줄 알며, 또한 그 삶에 입 맞출 줄 안다. 뭇 존재들이 “슬퍼서 점점 더 희미해져” 가면서도, 그들 사이에 어떤 사랑이 흘러 다니면서 시는 어떤 따스한 온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시에서 시인은 소진의 감각을 따스함이 아니라 도리어 악몽으로 밀고나가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자신이 사라지는 존재나 쓰레기로 버려지는 존재, 또는 유령으로 나타나는 악몽이다. 앞에서 읽어보았던 「기일」과 내용상 관련된 「불 꺼진 방」에서, 시인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어떤 사내에 의해 토막 내져서 검은 비닐 봉투에 담겨 집 앞에 버려지는 악몽을 꾼다. 비닐은 고통스럽게 터져 나오는 시인의 비명으로 터질 것만 같다. 이 악몽에서 깨어난 후 시인은 악몽은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불을 켜려고 하지만 불이 켜지지 않는다. 마치 악몽이 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 세계를 점령했다는 듯이. 그 악몽은 현실에 시인의 ‘진짜 집’으로 가는 통로의 문을 열어놓은 것, 시인은 불 꺼진 방에 서서 “창문을 열자 가로등은 내 꿈속에서처럼 여전히 환하게 골목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는 악몽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것을 감지하면서 이 현실 세계가 “얼굴을 모르는 당신의 꿈속 같으며 “나는 마치 수천 년 동안 불을 켜려고 했던 유령 같다”고 생각한다. 마치 어릴 때 산에서 만난 늙은 남자가 귀신으로 보였던 것처럼, 자신이 유령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만이 유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버려져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유령과 같은 존재다. 시인은 그들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세계에서 유령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인테리어」에서 시인은, 버려지고 사라지는 유령들과 함께 자신 역시 소멸되어가면서 쓸쓸하게 살아가는 유령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희구를 버리지는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는 이 시의 전문이다.
아름다운 북유럽 가구들처럼
겨울에 더 빛나는 흰 자작나무처럼
낡은 아파트에서 담요를 두른 맨발의
가난한 음악가처럼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겨 보는
겨울밤 복도에는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 다니고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서 나는
타일 위에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렸다
빛이 통과하는 물속처럼
겨울 공원 벤치처럼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지도 위로 매일 눈은 내리고
1연의 “북유럽 가구들”과 “흰 자작나무”와 같은 사물들은 시에 우아한 느낌을 불어넣는다. 2연은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국적인 이 이미지들에서 자연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상하고 낯설다. 저 장면은 몽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 이상”해져버린 현실, 그리고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 다니”는 악몽으로 통하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악몽은 꿈일 뿐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불 꺼진 방」에서 보았듯이, 알고 보니 현실 자체가 악몽이라는 말이다. 악몽의 현실은 “차갑게 식은 욕조 속”과 같이 서늘하고 쓸쓸하다. 그런데 이 욕조 속에서 시인은 “타일 위에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렸”던 것이다. 그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놓지 않고,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으로 “어디에도 없는/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아련한 나라의 지도를 그렸던 것이다.
“빛이 통과하는” 그 나라는 “물속처럼” 투명하며 “겨울공원 벤치”처럼 슬프다. 「진눈깨비」에서 “겨울과 입 맞춘다”고 말할 정도로, 강성은 시인에게 시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은 겨울인 듯하다. 몽환을 불러일으키는 빛 역시 눈부시게 투명하면서 쓸쓸하게 서늘한 겨울 빛인 것 같다. 겨울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가 가고 싶은 곳도, 언제나 겨울인 곳이다. 그가 가고 싶은 나라를 몽상하면서 그렸던 “지도 위로 매일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그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있었다고 해도 눈처럼 녹아버리는 나라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지구 밖에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이 「안녕 나의 외계인」에서 외계인을 잉태하고 지구 밖으로 “붕붕 날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안녕 지구 나는 이제 다른 별로 간다”면서 활달하게 지구와 작별을 고하고 있다. 이 활달한 어조는 강성은 시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건데, 시인이 이러한 상상을 통해 어떤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도 들 정도다.
그러나 공중으로 가볍게 부상(浮上)하는 감각은 강성은의 시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강성은 시에 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즉 ‘내리는 눈’이라든가 ‘쏟아지는 빛’과 같은 하강의 이미지다. 시인은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나라로 가고 싶어 하지만, 그 나라로 날아갈 수 있는 발랄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안녕 나의 외계인」에서 시인이 붕붕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은 외계인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계인 아기가 시인을 그렇게 공중으로 떠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를 떠나고 싶은 시인은 외계인 아기를 잉태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외계인을 품고 “풍선처럼 떠”오르다가 “내 아기의 별에 도착해 뻥 터질 것”(같은 시)을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시인을 떠올릴 수 있도록 외계인을 잉태시킬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시인이 눈을 감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환상의 빛’ 아니겠는가. 그 빛과 더불어 외계인과 같은 신이 지상에 내려온다고 할 때 말이다. 두 번째 실린 「환상의 빛」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내리는 눈에는 신성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눈을 통해 지상에 내려온 신성은 눈이 녹으면서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신성이 뿜어내는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 빛은 현실의 어느 대기에 환상의 빛으로 남아 있지 않겠는가?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으며 “그리워해본 적도 있”(같은 시)는 시인에게, 그 빛은 그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신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줄지도 모른다. 눈과 같이 육신이 사라지고 빛으로만 남은 신이기 때문에, 악수 한번 하지 못하는 그 신과의 만남은 쓸쓸할 것이다. 그러나 환상의 빛을 통해 신과 만나서 ‘외계인’을 잉태한다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나라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이 환상의 빛에 대해 시를 계속 쓰는 이유는 그러한 희망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시인이 눈을 감고 현실의 틈, 현실의 그 비현실성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악몽을 무릅쓰고 쏟아지는 환상의 빛과 마주하는 과정은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리는 일과 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친 “쏟아지는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면서, 시인은 모든 이가 쓰레기가 되고 있는 지구를 떠나 그 나라로 가기 위해 신성을 잉태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시인에게 잉태될 신성, 그 외계인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시에 현현하게 될지, 강성은 시인의 다음 작업이 궁금해진다.
* 이성혁 :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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