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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특집/김경인/무엇이 시적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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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511회 작성일 15-07-0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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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경인

 무엇이 시적 현실인가?


1. 몽상의 공화국  

  나는 한 때 휴일의 대부분을 이웃 도시인 과천의 정보과학도서관에서 보냈다.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대부분 도서관에서 썼다. 도서관 창문이 보여주는 풍경들과 나는 지난 10년간을 함께 했고 그 중에 몇몇 장면은 시가 되었다. 인간 외의 것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사물도 아니고 정령도 아닌 그렇다고 자연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세계들이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그것이 나를 위로하고 나를 쓰게 한다. 

숲을 흰 빛으로 차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라진 후에 온전하게 돌아오는 목소리는 무엇인가 
숲을 노란 빛으로 뒷걸음질 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나무가 그림자를 잊으려 악착스레 저물 때  
잎사귀를 칼날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의 목덜미에 떨어져 
나를 빨강으로 밀어 넣는 숲은 무엇인가- 「서랍을 닫으며」 중에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내 시를 인용한 것은, 내 시의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제 현실과 무관하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보시다시피 내 시에서 드러나는 세계는 어떤 외부와 분리되어 생성되는 심리적인 세계이다. 나는 한동안 얼굴 없는 주체, 익명적 주체에 주목해왔다. 그것은 탈현대 사회에 대한 시적 성찰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사에서 촉발된 관심에 가깝다. 가령 포장박스 안에서 눈을 뜨면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수백의 ‘나’에 둘러싸인 인형처럼, 나의 얼굴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이 세계에서 작동되도록 고안된 것만 같다. 반 고무덩어리-반 인간인 채로 나는 영원히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덮고 있는 이 구체적인 얼굴이 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말이다. 
이것은 분명 내가 속한, 콘크리트와도 같이 딱딱하고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현실’과는 다르다. 시적 현실은 시인과 시적 대상, 그리고 언술 방식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인의 눈으로 발견한 사물들이 있다. 이 대상들과 주체의 관계 맺음의 형식을 통해 시적 현실은 하나의 세계로 현현한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구조물이라는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미적 세계를 동반하게 된다. 
우리는 고등학교까지의 국어교육을 통해 이러한 시의 세계에 적용되는 몇 가지 룰이 있다고 배워왔다. 이 애매모호한, 좋게 보자면 신비스런 세계를 지배하는 기율이 있다고 배우면서 우리 중 대부분은 시의 세계로부터 멀어진다. 한 편의 시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발굴해야 한다. 시에 현실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그것이 어떤 언어적 기법으로 드러나 있는지, 그 언어에 담긴 비의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찾아내다보면 오! 내가 살고 있는 현실도 난해한데, 시는 열 배나 더 난해해진다. 아, 징글징글하다. 그럼에도 나는 거기에 남았다. 그 세계에 남은 몇몇들은 서로 독려하며 새로운 기율을 만들어내느라 애를 쓴다.
누군가 내가 ‘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이악스럽고 무뚝뚝하며 때론 뻔뻔하기 그지없는 내가 어떻게 그 고상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타인의 시선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는 점이다. 시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다음에는 ‘그럼 왜 이렇게 난해해?’라는 질문이 따라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해 현재까지 변변한 대답을 궁리해내지는 못했다. 
시적 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나의 시 공화국은 몽상가들로 채워진 듯 싶다. 도서관 거주인답게 나는 한 편의 책을 읽듯이 세계를 대해 왔다. 일상인과 시인의 중간쯤에 걸쳐 서서 현실과 몽상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말들이 찾아왔다. 때때로 누군가를 책처럼 읽다보면, 그의 인생이 책장 넘기듯 궁금해질 때가 있다. 
시를 쓸 때 나는 일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게 현실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도 그런 한편 시를 여전히 고상한 어떤 영역으로 두려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반대한다. 
어쩌면 나는 시를 도피처삼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사색도 하지 않으며, 불면의 밤도 없다. 대신 나는 시로 꿈을 꾸고 사색하며 불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이지 시에서 나의 냄새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일상인으로서 나는 시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며, 시인으로서 나는 일상인으로서의 나와 대부분 불화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싫어하는 나이다. 그러나 너무 싫어하다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렇듯 나는 나의 시를 싫어하면서도 내심 좋아해왔다. 만일 내가 나를 더 좋아했다면, 나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2. 내가 사랑한 반동들

 나에게 시적 현실이라는 말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동어반복처럼 여겨지며, 영원히 나는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단 내가 아닌 다른 몇몇의 훌륭한 시인들을 빌어 대답할 수는 있겠다. 
내가 처음 본 시인의 얼굴은 김수영의 초상이었다. 그는 약간 삐딱한 포즈를 취하고, 저 먼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사진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마치 그곳에는 죽음과도 같은 영원한 어둠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그 심연을 관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삐딱함은 오로지 시인에게만 허용된 자세처럼 보인다. 
선생은 선생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그리고 시인은 시인답게 언어를 사용하라는, 언어에 대한 고전주의적인 법칙을 삐딱하게 보기. 그는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서시」)” 라고 말한다. 이 때 첨단은 미적인 것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즉, 시를 빌자면, ‘정지의 미에 등한’한 ‘현실’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가 바라본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연도인 1966년에 발표된 시 「금성라디오」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성라디오 A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500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금성라디오」중). 금성라디오 A504는 세속과 부딪치면서 마모되는 시인의 절망과 자괴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금성라디오는 맑게 개인 가을날, 즉 서정이 한껏 드높아진 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날에, 그것도 500원을 깎아가며 일수로 사들여온 것이다. 그리고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오자 나의 육체와 시는 타락한다. 「금성라디오」의 창작배경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시인의 산문집에 같은 제목 아래 실려 있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스피어즈 식으로 말하자면 ‘심미적 단절’ 즉, 예술과 현실의 단절과 그 안에서 겪게 되는 예술가의 절망과 자조를 읽게 된다. 이렇듯 예술과 인생, 시와 현실 사이의 가로놓인 극복하기 어려운 심연은 김수영으로 하여금 절망을 낳게 한다. ‘절망’은 그의 모더니티를 주도하는 정서적 키워드로, 현대사회에 대한 그의 비애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는 그가 타락한 현실을 발화하는 방식이다. 그는 타락한 근대에 타락한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역으로 가장 전위적인 시를 쓴다. 타락한 현실을 타락한 언어로 발화하기. 예술의 정치성은 새로운 감각의 분배 형식에 참여함으로써 기존의 낡은 분배 형식과 투쟁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정치적일 수 있다는 랑시에르의 주장이 타당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가령, 「거대한 뿌리」의 이러한 대목은 그의 시가 가 닿은 실천적 현장이 바로 ‘좆대강’의 언어, 즉 주변부로 밀려난 말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 그의 언어는 현실에 거대한 뿌리를 내린다. 더러운 전통을 더러운 대로 받아들이자, 새로운 시적 현실이 펼쳐진다. 요강,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의 이 무수한 반동들의 세계에서 출발하는 언어 말이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거대한 뿌리」중

3. 내가 혁명을 노래하려 하였을 때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기형도, 「대학시절」

 그가 죽은 다음 해 나는 조그만 수도권 여대의 새내기가 되었다. 원하던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희망도 없이 심드렁하게 입학식을 마쳤고 90학번답게 마르크스와 주체사상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면서 대학 4년을 보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국문과를 지원했지만, 이상하게도 대학 시절 내내 시는커녕 한 줄의 문학적 경구조차 쓸 수가 없었다. 시집도 잘 안 읽혔다. 시적 현실은 시적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 맺음의 방식에서 축조된 지극히 가상적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 나에게 시적 현실이란 ‘하부구조/상부구조’라는 경제적 토대로 구성된 사회과학적 세계와 아날로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새로 알게 된 문학은 현실을 근간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고 그 언어는 현실을 향한 무기처럼 날선 것이었다. 그 세계는 『나의 칼 나의 피』의 시인 김남주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나는 혁명 속에서 더욱 강인해지는 문학을 상상하였다. 그 때마다 소심하고 용기 없는 나의 삶이 부끄러워졌다. “조국은 하나다”를 힘주어 낭송할 때 나는 그것을 진심으로 같이 외칠 수 없어서 좌절했다. 노동자도, 혁명가도 아닌 내가 혁명의 언어를 가질 수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아름다운 시를 쓸 수는 더욱 없었다. 현실은 추악한데 시가 아름다운 것은 죄악이자 시에 대한 모독이었으므로. 
그려야 할 세계가 명확해질수록 오히려 나는 문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러한 세계는 시라는 형식을 벗어날 때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삶과 문학이 하나가 되는 세계, 강철 언어의 세계에서 나는 이방인으로 남았다. 
실패자로서 글쓰기가 가능할 것인가? ‘이민자처럼 살지’ 하는 생각을 들자 나는 조금 편안해졌다. 시로써 계몽해야 할 대상과 계몽되어야 할 대상은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비로소 시 비슷한 것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4. 이방인으로 바라보기 

내가 등단할 무렵에는 비시(非詩) 적이라 간주되던 어떤 낯설고 신선한 것들이 이제는 당연한 시적 세계가 되었다. 크게 그것은 환상과 언어라는 두 세계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시들은 ‘보다, 사실적인 세계’가 현실 이면에 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현실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목소리”가 시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다. 

바람은 머리칼을 건드리며 지나가고
지금은 드넓은 초원의 양들을 생각해 그려볼까
아름다운 이국의 그림에는 양떼와 초원이 있었지 흰 언덕과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산봉우리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건 그리지 말자 아는게 얼마나 된다고
보다 사실적으로 오, 그 지겨운 사실
하수구를 지나는 물소리와
짖어대는 개들과 공장의 붉은 철문을 비추는 초라한 햇살
그러니까 어떤 내밀함, 처음 그려보고 싶어지는 수채 구멍 속의달걀조각 사과 껍질 공장의 매캐한 연기가 폐 속을 자극해
우리 이어폰을 꽂고 판다 베어panda bear나 들을까 
아름다운 이국의 그림 속에는 말이야
너를 닮은 창백한 얼굴의 소녀, 
소녀가 들고 있는 데이지 꽃과 
오래된 성 주위를 맴도는 금발의 어린 양치기도 좋겠지
하지만 만져보지 못한 건, 가져보지 못한 건 금세 사라져버리니까
사라지지 않는 게 얼마나 된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오, 그 망할 놈의 구체!
알고 있는 것만 그리자.
(중략)
-황병승,「저녁의 양(羊)과 올 더 세임(all the same)」 중 

그에게 ‘사실’의 범주는 가장 내밀하고도 직접적인 감각인 촉각을 통해서 체험된 것이다. 문제는 이 체험이 우리가 배운 감각과는 다르다는 데 있다. 가령, 지극히 사실적으로 ‘머리칼을 건드리며 지나가는 바람’은 바람의 실재가 아니다. ‘바람은 나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어놓고’(3연)로 변주된다. 나를 둘러싼 ‘보다 사실적’인 현실은 여기에 가깝다. 
이 시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하나는 아름다운 세계-이를테면 드넓은 초원의 양들,양떼와 초원, 흰 언덕과 너를 닮은 창백한 얼굴의 소녀-를 생각하라는 목소리이다. 이 이국주의exoticism는 자동화된 상상, 강요된 상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정직한’ 목소리가 있다. 그는 다짐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건 그리지 말자. 그가 대신 제시한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목록은 다음과 같다. 하수구를 지나는 물소리, 짖어대는 개들. 공장의 붉은 철문을 비추는 초라한 햇살 수채 구멍 속의 달걀조각 따위. 
내가 생각할 때 그의 시가 지닌 미덕 중의 하나는 때때로 환상이 현실보다 더 리얼하다는 것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직성은 윤리적인 것과 간간 충돌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여기서 환상을 추악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이거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한정하는 것은 어딘지 석연치 않다. 오히려 그것을 빼고 남은 그 무엇이라고 보는 것은 어떠한가? 불타는 소년에 대한 아버지의 꿈을 분석하면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꿈의 기능이 잠을 연장하는 것이라면, 꿈이 그 원인이 되는 현실에 아주 가깝게 다가간다면 우리는 이것을 잠에서 깨지 않은 채 그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까? 꿈구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꿈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 아닌가? (중략) 이 메시지에는 아버지가 옆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낯선 현실을 알게 한 소음보다 훨씬 현실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그 말은 아이의 죽음을 야기한, 잊어버린 현실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라깡의 독법을 따르면 꿈속의 아버지를 깨운 것은 꿈속에서 대면하게 된, 현실보다 훨씬 더 강한 외상이며 그래서 그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해 현실 속으로 깨어난 것이 된다. 만일 현실을 방패막이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구조물을 차용한다면, 즉 환상이 우리가 날 것의 실재(Real)에 직접적으로 압도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면, 그때 현실은 실재와의 대면으로부터 도피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꿈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꿈속에서 드러나는 실재를)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꿈의 존재 이유는 추악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이다. 나는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현실로 깨어나는 것이 아닐까?

갈치의 새끼는 풀치다. 숲은 수풀의 준말이다. 그날 너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성엣장은 유빙이다. 자운영은 토끼풀을 닮았다. 네가 그 때 입고 있었던 풀치처럼 고운 빛을 가지고 있다. 紫雲英이다. 너는 내게 가문을 수놓은 실내화를 달라고 했었다. 자운영처럼 웃던 너. 나는 사전을 덮고 부엌으로 간다. - 이준규, 「부엌」 

황병승에게 환상이 현실 위로 범람하는 더 리얼한 세계라면 어떤 시인들의 경우 언어가 현실을 대체한다. 말하자면, 문헌학으로서의 세계에서 시쓰기를 수행하는 시인들이 있다.(그것은 수행遂行일 뿐 아니라 수행修行이기도 하다) 
가령, 이준규의 시 「부엌」에서 부엌은 시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부엌은 언어로부터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통로인 셈이다. 그것이 부엌이든, 화장실이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갈치와 숲과 성엣장의 언어이며, 그 언어들의 연쇄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이다. 너에 대한 추억담이 전부인 위 시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주체’의 자리를 대신하는 언어이다. 고진에 따르면 풍경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풍경이 외부에 눈이 밝은 자가 아니라, 주위에 무관심한 <내적 인간inner man>에 의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준규의 시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내적 인간’의 자리에 언어가 놓인다는 점이다. 언어가 인간과 사물을 조망한다. 마치 언어와 사물의 관계가 자의적이듯이 인간은 사물과 관련 없고 세계와도 무관하다. 이 시는 사전의 인덱스 기능을 닮아 있다. 갈치는 풀치를 참조하여야 하며, 숲은 수풀을 참조하여야 한다. 성엣장-유빙-자운영은 자음의 순서를 따르는 진행이다. 이는 언어체계 속에 놓인 주체를 함의한다. 주체 역시 세계라는 거대한 사전에 들어 있는 하나의 낱말에 불과한 것이다. 언어와 사물대상 사이의 공백이 있듯이 세계와 주체 사이에는, 나와 타자 사이에는 공백이 있다. 이준규 시는 무심해서 슬프다. 그 슬픔은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는 것을 아는 데서 생성되는 슬픔이다. 문장은 완성되는 순간 끝이 날 것이며, 모든 사물은 소멸을 향해 운동하는 것이다. 이준규 특유의 무심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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