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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특집/김영범/지금 - 여기의 비극과 리얼리즘: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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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영범
지금-여기의 비극과 리얼리즘 :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리얼’
1. 리얼리즘 시 vs 시의 리얼리즘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리얼(real)’이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해야 할 첫 작업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전사(前史)로서의 리얼리즘 논쟁에 대한 검토일 것이다. 한국시사에서 리얼리즘과 관련해서 제출된 최초의 논의는 일반적으로 김팔봉의 「단편 서사시의 길로」(조선문예, 1929. 5.)가 뽑힌다. 그는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조선지광, 1929. 2.) 등을 근거로 삼아 이야기 혹은 사건적 요소를 시에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의 주장은 흔히 ‘단편 서사시 논쟁’으로 불리는 논전을 거쳐, 이후 1930년대 프로문학에서 리얼리즘 시론을 정립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프로문학 측의 성과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쪽에서는 수용이 불가능해진다.
남한에서 활성화된 것은 민족민중시 계열의 문학운동이었다. 그런데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은 역설(逆說)적이지만 그것에 새로운 국면을 제공했다. 군사정권에 대항했던 이 계열의 시운동은 “심각한 한계에 직면”했고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자기 반성적 노력”이 요구되었다. 이런 까닭에 1990년대를 전후로 촉발된 것이 바로 ‘시와 리얼리즘 논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세부적 진실성’과 ‘상황 및 인물의 전형’ 등 이른바 ‘엥겔스의 규율’에 대한 비판적 거리조정이 이루어진다. 우리 시사에서 리얼리즘의 성취를 보여준 많은 작품들이 ‘서사성’을 지닌다는 데 주목한 최두석의 접근법 역시 전대의 김팔봉을 잇는 것이었지만, 소설의 전형 개념을 시에 유연하게 적용해야 함을 인정하였다.
“범주로서의 리얼리즘 시”를 거론한 최두석에 대해, 황정산은 최두석의 ‘이야기 시’가 “특정 기법을 지칭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처럼 이 논쟁에서 대다수의 논자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오히려 소설과는 다른 ‘시의 리얼리즘’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수렴된다. 판에 박힌 기계론적 반영론·전형론으로는 시에서의 리얼리즘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들은 엥겔스주의적 반영론과는 구별되는 “열려 있는 리얼리즘”을 요청하게 된다. 백낙청과 염무웅이 ‘리얼리즘 시’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은봉의 지적은 이런 사정을 대변한다. 당시의 논쟁은 “역사 발전의 정합성 또는 합법칙성에 부합하는 세계관의 정당한 표현”으로 리얼리즘이 가능해진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게 된다. 시에 있어서 리얼리즘의 성취를 위한 당대의 논의는 창작방법에 주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계관의 측면에서 봉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내포적 총체성으로서의 시
회화사를 살펴보면, 사진의 등장이 회화를 변모시켰음을 알 수 있다. 화가들은 더 이상 ‘사실에 대한 경쟁’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들은 사진보다 더 사실적일 수 있는 수단을 발명하기 위해 골몰했다. 덜 사실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이후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점에서 회화사가 말해주는 것이 시의 리얼리즘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진이 자연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에 동의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리얼리즘은 자연주의에 대립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참고해야 할 것은 ‘시와 리얼리즘 논쟁’에서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거나 비판받은 루카치의 견해이다.
현실의 외연적 총체성은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한 예술적 형상화의 한계를 넘어선다. …… 예술작품의 총체성은 오히려 내포적인 것이다. 그것은 형상화된 삶의 단편에 대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전체적 삶의 과정 속에서의 그것의 존재와 운동, 그것의 특질과 위치 등을 결정하는 여러 규정들의 그 자체 내적으로 완결되고 마무리된 연관관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짧은 노래도 웅대한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내포적 총체성이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서술자가 보여준 우려를 떠올려 보자. 현실의 순간을 모두 기록하거나 기억하는 일에 결핍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고(思考)’였다. 그것은 차이점을 지우고 일반화와 개념화를 거쳐 세계를 이해하게 한다. 모든 것이 즉자적으로 인지되는 세부들로 구성된 세계의 푸네스와 달리 우리는 사고로써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인용한 루카치의 첫 문장을 적용하면 소설은 결코 “현실의 외연적 총체성”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내포적 총체성”을 담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은 여러 틀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엥겔스식의 틀을 선택했을 때 창출될 수 있는 것은 엥겔스적인 리얼리즘일 것이다. “예술적 형상화의 한계” 앞에서 시는 더욱 열악한 상황에 있다. 그러나 인용의 마지막 문장은 내포적 총체성이 “형상화된 삶의 단편”에 충분히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루카치는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에 처한 삶의 전체적인 연관관계가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오늘의 시는 ‘사고’를 토대로 차이를 지우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반대로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이리하여 시는 일반화와 개념화를 거부한다. 미래파 이후 시가 가고 있는 길의 하나가 소외를 끌어들이는 일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중권이 이 시대의 예술과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소외에 적응함으로써 그 소외에 항의한다.”는 페터 뷔르거(Peter Bürger)의 명제를 적극 빌려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일반화와 개념화를 부정하는 시는 파편으로서의 “삶의 단편”을 독자 앞으로 내민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사고가 아니라 우선은 ‘이미지’이다. 그것은 소외를 양산하는 세계의 부정적 총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치 엥겔스의 틀을 사용하지 않은 카프카 소설의 리얼리티처럼, 오늘날의 시는 더 이상 일반화와 개념화를 작품 안에서 구성하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자주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는데, 이 경우 시가 준비한 소외를 몸소 관통한 이들에게만 시의 내포적 총체성은 드러나게 된다.
그보다 더 숭고한 사명을 띠고 있다. 즉, 그것은 정신을 느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아니라 느낌 속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 해방된 내면은 만족된 자의식 속에서 자유로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머문다. 그러나 거꾸로 이처럼 처음에 객관화시키는 일은 지나치게 나아가 주관적인 심정과 열정으로 하여금 주체가 실제 현실 속에서 행위를 하지 않고 자기에게 되돌아가도록 표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면성 자체는 여전히 내면에 가장 가까운 실재성이어서 자신으로부터 벗어 나온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둔탁하며 표상하지 않는 집중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언표하고자 열기 때문에 전에는 느끼기만 했던 것을 자의식적인 직관과 표상의 형태로 포착하여 표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헤겔의 글이다. 그는 “직관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시문학의 목적을 “말로 이미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용한 부분에서는 시가 부여받은 “숭고한 사명”을 거론하고 있다. ‘정신을 느낌 속에서 해방시키기’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느낌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헤겔은 정신과 느낌을 배타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정신은 차라리 느낌을 경유해야만 해방이 가능하다. “전에는 느끼기만 했던 것”은 시라는 언표행위를 통해 “자의식적인 직관과 표상의 형태”로 포착되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느낌은 시라는 매개를 지나 내면의 정신성이 발현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시의 사명은 느낌을 정신성으로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헤겔은 ‘느낌 속에서 해방시키기’가 실제적 현실에서의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헤겔의 글에서 말하는 정신은 당연하게도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알려진 대로 그에게 예술은 종교와 철학의 아래에 존재한다. 스텀프는 전자가 주는 미적 경험은 ‘감정의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후자만이 ‘사유 행위’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게 헤겔의 생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헤겔이 추구한 절대정신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예술의 정신성과 그것이 견인하는 행위의 가능성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점에서 종교와 철학이 절대자의 자리를 상실한 이 시대에 예술만이 그러한 경지 가까이라도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하여 예술이 생산하는 ‘감정의 행위’는 “실제 현실”에서의 행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여기, 종교나 철학과는 거리가 먼 속세에서는 실제적 가치를 가지지나 않을까. 나아가 오늘의 시들이 실천하는 소외에의 적응들은 독자에게 우리가 사는 이곳에 대한 철학적 ‘사유 행위’를 촉진하고 있지는 않는가.
3. 지금-여기의 현실
다시 회화로 잠시 돌아가자. 고흐의 「구두」에 대한 상반된 해석은 잘 알려져 있다. 구두의 주인을 농촌 아낙네로 본 하이데거와 고흐 자신으로 본 샤피로의 대립. 이들의 견해차와는 별도로 이 논란에는 이미지에 서사가 담길 수 있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시 역시 이미지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동일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시가 사용하는 모든 이미지에는 그 자체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고 하겠다. 오늘의 시가 현상해내는 파편적 이미지들이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삶의 다기한 양상들과 더불어 소통이 불가능해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접혀진 서사의 주름을 펴는 실마리는 언제나 이미지 자체에 있다. 헤겔이 말한 바를 참조하자면, 우리의 직관만이 내포적 총체성을 품은 이미지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열쇠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래에서 우리는 응축된 이미지 이외에도 세계의 허위를 드러내는 시의 오래된 전략들을 만나게 된다. ‘시와 리얼리즘 논쟁’의 당사자들이 기대했던 리얼리즘을 위한 창작방법들은 대부분 이미 도착해 있었다. 시의 리얼리즘을 위해 새로운 방식을 계발하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기존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였다. 형식의 활용을 한정하는 순간 정신의 자유는 구속된다. 형식과 내용은 우연히 만날 뿐이다. 그 결합이 합목적적인가에 대한 가치 평가는 작품을 읽은 다음에 내려질 사안이다.
그는 도둑고양이와 그림자를 사랑하고 그가 누운 관에선 흰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나는 드넓은 상치밭을 가꾸고 푸르고 여린 잎들 사이로 불쑥 솟은 거대한 굴뚝에 사네 낡은 성당의 저녁종이 들판에 울려 퍼지고 그의 목소리 가까이 들린다 계단도 없고 문도 없으니 아가씨, 좁은 창문으로 너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 좀 내려줘
아주 오래 연주되기 위해서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
벌써 여덟 번째야 그가 머리채를 잡고 올라와 내 목을 친 것이, 그가 머리통을 창문 밖으로 던진다 나는 바람 빠진 공처럼 튀어오르며…… 소리지른다 여보세요 야옹, 야옹 저도 고양이의 일종이에요 나는 오늘로 아홉 번째 태어났다 그러니까 달팽이는 백 마리 아무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도화지 속을 나 혼자 뛰어가기
찢어진 상치잎들, 바람에 날아오르며 얼굴을 후려친다
-진은영, 「라, 라, 라푼젤」 전문, 우리는 매일매일(2008)
미래파 담론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시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시인은 진은영이다. 위의 시는 라푼젤과 드라큘라 이야기를 패러디하여 지금-여기에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노래한다. 스스로를 드라큘라가 사랑하는 고양이라 생각하는 라푼젤은 하지만 “벌써 여덟 번째야”라며 그간의 실패들을 고백한다. 드라큘라 역시 “계단도 없고 문도 없”는 여자의 거처에 닿기 위해 그녀가 가진 “긴 머리”의 도움을 받아야할 만큼 무력하다. 이들 앞에 가로놓인 것은 이처럼 사랑의 불가능성이다. 왜일까. 질문의 답은 드라큘라와 라푼젤이라는 인물이 품은 이미지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지하와 탑에서 사는 이들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짐작하겠지만 지금-여기의 지하와 탑은 반지하와 옥탑방이다. 현대의 드라큘라와 라푼젤은 그런 곳에 홀로 유폐된 자들이다. 도시의 주민이 거처하는 곳의 말단에서나 겨우 머무를 수 있는 이들에게 사랑은 가능한가. 아니 그들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나 있을까. 그들은 탑에 갇힌 라푼젤이자 관에 누운 드라큘라가 아니던가. 이 도시의 주체들은 “검은 도화지 속”을 홀로 달려간다. 그들은 아름다운 그림 하나 될 수 없다. 진은영은 희망으로 고문하지 않는다. 냉정한 그의 시선은 이 도시의 잔혹한 동화를 고발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상호텍스트성과 자기반영성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으로써 이 나라의 현실을 겨냥한다.
7. 용역(龍屴)
용산에서 발흥했으며 우면산의 검경(劍京), 발치산의 공산(恐汕)과 함께 3대 조폭이었으나 동이와 오환의 대살육 때에-이를 육이오(戮吏烏)라 부른다-검경과 연합, 공산을 궤멸하여 장안을 장악했다 정직한 자를 잡아가고 가난한 자를 태워 죽이며 속이는 자에게 쌀을 주고 부유한 자의 곳간을 지켜, 그 악명이 자자하다 최루탄지공, 개발이익조, 아수라권, 물대포신장, 소요진압진 등의 연합 무공을 쓴다
-권혁웅, 「소문들-유파」 부분, 소문들(2010)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펀(pun)’이 지배적인 시이다. 유의할 점은 권혁웅의 언어유희에서 현실 세계의 언어를 대체하는 것이 조어(造語)라는 사실이다. 이로써 그는 일반적인 펀보다 강도 높은 비판이 들어설 여지를 마련한다. 그야말로 용산참사는 무림에서와 같은 유파들의 난투극이 빚어낸 비극으로 조망된다. 첫째 ‘용역(用役)’을 대신하는 ‘용역(龍屴)’의 ‘역’은 ‘높이 솟다’와 ‘산이 잇달아 솟아 있는 모양’을 뜻하므로, 노무를 제공하는 일을 지칭하는 용역의 본래 의미는 용처럼 높이 솟은 건물을 위한 재개발 자체와 같아진다. 용역은 자본에 충성하는 모든 계급과 그들의 하수인을 지칭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참사는 경찰과 용역업체가 감행한 무리수 진압에 그 원인이 있었다. 경찰은 용역업체와 협력했다. 경찰은 용역업체와 다르지 않았다. 이리하여 의미는 다시금 미끄러진다.
이 시가 최종적으로 전하는 바는 경찰이 바로 용역이라는 우리네 세상의 현실이다. 최루탄과 물대포 그리고 소요진압 등 그들의 무공이 인정을 두지 않는 자들은 모두 정직하고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은 이들의 반대편, 즉 속이고 부유한 자들을 위해 복무한다. 그러므로 개발에서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자본과 그들은 한통속이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그들이 “연합”한 이들은 “검경”이 아닌가. 검경에 이미 경찰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것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한 배를 탔으니 그들이 닮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는 검찰 역시 용역과 한패라는 인식이 중요해 보인다. 권혁웅은 이렇게 언어유희를 통해 지금-여기의 현실을 짚어낸다. 유파들의 각축이 끝난 이곳에서 정직하기에 가난한 자들에게 용산참사는 비극의 알레고리로 던져져 있다.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은 냄새를 풍기는 자이며,
이웃은 소리를 내는 자이고
그냥 이웃하고 사는 자일 뿐인데,
좋은 이웃을 만나는 일은
나쁜 이웃을 만나는 일처럼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누가 이웃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좋은 이웃으로 남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이웃에게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또 감정이 있다.
일요일의 이웃은 냄새를 피우고
월요일은 소리를,
일주일은 감정들로 가득해
두드리고 두드려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틈이 갈라지는 벽을 이웃하고 있다.
냄새와 감정을 나누는 이웃이 있다.
못과 망치를 빌리러 갈 이웃이 있다.
이웃에게 못과 망치를 빌리러 가자.
-이현승, 「좋은 사람들」 부분, 친애하는 사물들(2012)
꾸미지 않은 언술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진은영이나 권혁웅의 사례와는 구분되는 시이다. 이현승 시의 주체는 층간소음을 포함한 아파트 생활의 문제를 기교 없는 평이한 문체로 서술한다. 먼저 그는 ‘이웃’에 대해서 자문자답한다. 이웃은 냄새를 풍기고 소음을 내고 ‘나’와 이웃하여 사는 이들이다. 그런 이웃함은 지극히 우연에 기대므로 “나쁜 이웃”을 만나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웃이 내는 냄새와 소리는 그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지고 보면 주체 역시 그런 냄새와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래서 이웃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주체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삶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웃의 감정까지 인정할 때, 냄새는 “풍기는”에 스몄던 부정적인 뉘앙스와 멀어진다. 그것은 이제 “나누는” 것이 된다. 가령은 이웃의 식탁에 오른 저녁과 아침에 대해 주체의 가족은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가족이 함께할 다음 식사의 메뉴가 정해질 수도 있을 터이다. 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간다는 깨달음. 그것으로 밀폐된 아파트의 문들은 “틈이 갈라지는 벽”으로 열릴 수도 있으리라. 마지막 행에서 주체가 제안하는 것은 단순히 “못과 망치”를 빌리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각성은 사소해 보이지만 심각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첫걸음이 된다고 이현승 시의 주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기교의 기교로써 이현승은 지금-여기에 만연한 사람 사이의 질곡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은 노숙자의 발끝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붉은 장미꽃 그늘 아래 발끝을 모으고 앉아 있는 고양이는
공기의 도축을 이미 알아차렸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토막 난 장미의 거친 숨결
첫 번째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이다
육체와 그림자를 분리하기 위하여 바람은 한동안 끙끙거렸다
냄새와 울음이 동시에 바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생략)
노숙자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태어나고 있다
발뒤꿈치엔 둥근 파문이 화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그는 담벼락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 시체
나는 공기의 도축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 풍경을 빠져나왔다
시체의 마음속으로 장미 꽃잎 하나가 침몰하고 있다
담벼락 위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아챈 눈빛
여름 저녁의 입구에 조등처럼 별 몇 개가 반짝반짝
나는 아직 당신을 외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박서영,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부분, 좋은 구름(2014)
어느 여름의 저녁 박서영 시의 주체는 노숙자를 마주친다. 그가 기대앉은 담벼락의 위는 장미꽃이 흐드러졌고 그 아래는 “햇볕을 쬐는 시체”와 같이 꽃들이 떨어져 있다. 잔반과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서 살아가는 도시의 고양이는 동무인양 그의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장미와 고양이와 노숙자가 병치된 이 풍경은 이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낸다. 장미의 아름다움과 낙화는 노숙자의 과거와 현재로 연결되고, 우아한 외견과 동떨어진 고양이의 생존 방식은 삶의 곳곳에 매복한 위태로움을 환기시킨다. 셋의 처지는 그다지 변별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공기의 도축”이란 표현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이들 셋은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세계가 준비한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일까.
시의 주체는 “냄새와 울음”이 배어든 그 풍경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도망치듯 벗어나온다. 그런데 수월하게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숙자의 발끝에서 새로이 돋아나는 것은 “그림자”이다. 그는 열기가 식은 여름 저녁 살기 위해 도시의 어딘가로 걸어갈 것이다. 그는 아직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말하자면 그는 살아서 이곳을 끈질기게 부유하는 존재이다. “공기의 도축”은 그렇다면 떠도는 그들을 외면하는 우리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분위기를 지칭하는 게 아닐까. 박서영 시의 주체가 보여주는 황급한 도망은 우리들 자신이 외면하고 있는 그들, 곧 지금-여기의 치부를 감추려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진배없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을 다시 보자. 이들을 방치하는 일을 부끄러워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만이 이 비극을 그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서영의 시는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방식을 통해 그런 일이 증폭될 수 있는 지금-여기의 위기를 포착해낸다.
4. 현실의 비극과 문학의 책임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습니다.
인용한 책에서 고진은 근대문학이 끝나버렸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근대문학은 소설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선언을 수용하기란 불가하다. 사실 그의 주장은 “‘문학’이 윤리적·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가 종결되었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문학)사를 돌아보면 고진이 말하는 과업을 문학이 떠맡았던 시기는 잘해야 식민지 시대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도 한국(문학)사를 식민지 한반도에 한정해서 볼 때에나 적용될 수 있다. 많이 양보하더라도 그가 사용한 “일반적으로”와 “보통”은 ‘보편타당성’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한국(문학)사에서 문학과 학생운동은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의 대리보충이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의 두 혁명은 학생운동과 결합된 시민운동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시사(詩史)만을 거론하더라도 4·19 이후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운동과 김수영·신동엽 등에 의해 확산된 참여시가 70년대에 맞물려서 이뤄낸 리얼리즘의 성취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흔히 ‘시의 시대’로 불리는 1980년대는 한편으로는 ‘정치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진의 주장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받아 이렇게 되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문학이 그러한 책임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현실에 있어서의 비극을 반증하지 않을까.
1990년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시의 시대’였다. 정치적 중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는 생태·일상·여성·신서정·정신주의 등을 추구했고, 그런 만큼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모색할 수 있었다. 2000년대를 열었던 미래파 담론은 그런 실험들 이후에 가능해진 시의 극단에 대한 환영과 우려가 교차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내 등장한 것은 ‘시와 정치’라는 테제였다. 다른 말로 그것은 ‘시와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살폈지만 1990년대 벽두에 무성했던 ‘시와 리얼리즘 논쟁’은 창작방법을 구하였으나 세계관의 문제로 귀착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개별 시인의 창작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구체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자는 세계의 변동에 주파수를 맞출 때 개인의 내면에서 얼마든지 변모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앞서 읽어본 시인들을 상기해보자. 진은영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권혁웅의 레토릭은 자본 그리고 그것과 결탁한 권력을 비판하고, 이현승의 담담한 어조와 박서영의 중첩된 이미지는 그런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연대의식을 요구한다. 모두가 다른 기법으로 시를 쓰지만,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겹쳐진다. 우리를 포위한 세계는 지금-여기의 현실을 바로 볼 때에만 바뀔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역사가 가야할 길을 밝히는 우리 자신들의 세계인식에서 시작된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언 29장 7절). 진짜 악인은 곤궁한 자의 처지 자체를 모르는 자이다. 적어도 오늘의 시는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더불어 지금-여기의 시들이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우리들의 비극이다. 문학이 육박해오는 ‘리얼’한 세계를 방관할 수 없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김영범 : 1975년 경남 밀양生. 2013년 <실천문학 신인상> 평론 당선. 대표 평론 「증상의 시학」, 「정체성의 형식, 길의 주인 되기」 등. 가천대·연성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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