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4호/집중조명/김보숙/파래지다 외 4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032회 작성일 15-07-07 10:29

본문

집중조명
김보숙


파래지다


어머니의 빨간 꽃무늬 팬티는 리어카에 수북이 쌓여있었어. 골라도 골라도 빨간 꽃무늬 팬티뿐이었지. 빨간 꽃무늬 팬티는 창피를 모르는 듯 했지. 때로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내복 위에 입혀서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지. 할머니의 오줌에 젖어도 빨간 꽃무늬 팬티는 파래지는 법이 없었지. 창피를 몰라서 파래질 수 없었지. 나는 창피를 모르는 빨간 꽃무늬 팬티를 물려받지 않기 위해서 파란 것을 찾아다녔지. 우울을 유지하는데 요긴하게 쓰인 것은 언제나 파란 것들뿐이었지. 폐쇄성 폐질환에 걸린 아버지의 파래진 입술을 찾았지. 아버지의 파란을 보고 할머니는 아저씨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이라며 빨간 꽃무늬 팬티를 아버지 손에 쥐어주었지. 손에 쥐어진 빨간 꽃무늬 팬티를 입에 막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고 나는 점점 파래져갔지.





즐거운 식사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나흘 만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버지의 숟가락이 꽂힌 호박죽이 굳어있다.
돌아가시던 아침 날 호박죽을 앞에 두고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하시자 
내일 먹겠다면서 냉장고에 그대로 넣어 두라 
하셨던 호박죽. 
그 저녁 우리 형제들이 먹을 것이라곤 
아버지의 숟가락이 꽂힌 호박죽이 전부였는데 
그것은 이미 너무 굳 어 있 었 다.
그러다 본 것이다.
식구들이 없는 저녁이면 
혼자서 자장면을 시켜 드시고 받은 쿠폰 오십 장
탕수육 대자와 바꿀 수 있는 쿠폰을 다 모은
아버지는 식구들이 모이는 날을 기다리셨을까. 
우리는 탕수육 앞에서 저마다의 기도를 했다. 
호박죽에 꽂힌 아버지의 숟가락을 빼서
뜨거운 탕수육 옆에 놓아두고,





초코파이 사용설명서 


초코파이만 주면 울다가도 웃던 나는
초코파이만 주면 빚쟁이 아주머니에게도 
아버지가 숨어 있던 작은 이모네 집을 
알려주었고 아버지가 숨어 있던 곳을 알려주어 
밤새 어머니에게 혼이 나다가도 나는 아버지가 
몰래 사다준 초코파이를 먹으며 다시 웃었으니 
참 식욕이란 게 더럽지 머니,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초코파이를 찾던 나는
이에 낀 마시멜로우를 혓바닥으로 핥아 먹다가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이었으니 초코파이만 주면 
안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단다. 
얘야, 지금 나는 나의 더러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너는 왜 큭큭 웃고만 있는 거니.





매듭


택배기사는 바쁜 듯 재촉 했겠지.
콩 타작 하면서도 대문을 연신 바라보던
어머니는 얼른 뛰어나갔겠지.
새봄 알리는 보리순, 벌금 자리 나물,
짜놓은 참기름이 그득한 보따리를 그제 서야
상자에 넣기 시작했겠지.
서두르는 택배기사 맘도 모르고 어머니는
끈을 찾아서 묶고, 또 묶어 매듭을 지었겠지.
‘아이고, 무슨 보물 들었는교, 마, 그만 하이소’
택배기사 핀잔도 모르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매듭한번 더 지었겠지.

아파트 수위 아저씨에게 건네받은 택배 풀려보니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손길 같이 베어나는 
것 같아 쉽사리 가위도 못 들겠다. 
이리저리 설긴 매듭을 풀고 나면 어머니가 나올 것 만 
같은 저녁, 쉰 내 나기 직전의 저녁.

매듭을 풀고 있다.





메타포는 힘이 세다


나사를 한 개 풀어 놓은 거야. 갈고리 한 쪽에 나사를 풀어서 아무것도 낚을 수 없게 만들었지. 저것 좀 보라고, 하나라도 뽑는 사람이 있나 보라고, 아저씨, 메타포는 무엇인가요. 내가 말야, 새벽에 몰래 나사를 뽑고 있는 사내를 봤단 말이지. 그때부터 뽑을 수 있는 뽑기 기계가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로 변했단 말이야. 말 없는 여행자*의 침대 시트 같은 건가요. 낙엽은 폴란드 정부의 지폐* 같은 건가요. 은은하게 걷는 동반자 같은 건가요. 네가 만약 나사를 풀고 있는 사내의 눈을 보았다면 오래된 동전 같은 녹슨 눈빛을 볼 수 있었을 거란다. 다시 돌아가 너의 새벽을 수정할 수 있었을 거야. 아저씨,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메타포는 무엇인가요.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 안을 들여다보렴. 종일 낙하를 경험한 귀여운 인형들의 웃는 모습이 참으로 환하지 않니.

* 네루다의 우편배달 중 




시작메모
욕조가 있으십니까?


욕조가 있으십니까? 댁에 욕조가 없으시다면 대중목욕탕도 좋습니다. 물을 가득 받으십시오. 넘칠 정도로 물을 가득 받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머리 까지 완전히 담그시고 이 분정도 숨을 참고 나오시면 됩니다. 폐쇄성 폐질환에 걸린 아버지가 얼마나 아픈 거냐고 묻는 내게 의사는 말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숨이 차고 아픈지 알고 싶다면 욕조 속에 들어가 이분정도 숨을 참아보라고, 아버지는 늘 이렇게 숨이 차있는 상태라고, 내가 물속에 들어있던 것은 단 이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물속에 잠겨있던 고통스러운 이분을 잊지 못한다. 침몰 24일째다. 풍림상회 아저씨는 그래도 시를 써야한다며 동사무소 시 창작 교실을 열심히 나가시지만 나는 그날 이후 한 편의 시도 쓰질 못하고 있다. ‘있음’이란 것이 이토록 아픈 일이었던가, 시를 쓰는 동안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단어를 나는 오늘 쓴다. 슬프다.   


*김보숙 : 2011 리토피아로 등단.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전공심화과정 재학중.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