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4호/신작특선/박서영/해설/'빨간'과 '파란'의 메타포 - 김보숙 시
페이지 정보

본문
집중조명 해설
박서영
‘빨간’과 ‘파란’의 메타포
낙하의 힘이란 무엇일까. 분명 낙하는 떨어지는 것이고, 상승의 기운이 아니라 하강의 기운이다. 그러나 김보숙 시인에게 ‘낙하’는 그저 어두운 절망이나 우울한 정조가 아니다. 이번에 내놓은 신작시들에서 보이는 것은 무거운 낙하의 힘, 절망의 힘이 도리어 삶의 생기를 얻게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시를 이끌고 가는 어조가 무겁기보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치고받는 힘이 느껴진다. 절망과의 친화력마저 느껴진다.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곤궁한 일상의 한 페이지를 들춰 우리가 보게 되는 건 희망이다. 돌아보면 무겁고 우울한 일상을 스치듯 가볍게 하는 어떤 힘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안다.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은 가벼운 낙하의 힘을 빌려 표현하고 싶어 할 것이다. 공중에 무겁게 매달려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견딜 수 없고, 또한 바닥에 너무 오래 달라붙어있어도 견딜 수 없는 삶. 농담과 진담 사이에. 희망과 절망 사이에 기교가 있고 메타포가 있다. 김보숙 시인 역시 ‘메타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은 무모하게 발가벗겨져 감당하지 못할 처지가 되기도 한다. 발가벗겨진 채로 달려가는 언어의 힘을 믿는 자는 더욱 더 용감한 자다. 자신을 뜨거운 종이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전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람에 대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익숙한 사람은 감추고 숨기고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런 방법론이 시적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김보숙 시인은 훔치고 날쳐 시의 생생한 현장을 드러내놓는다. 그러면서 삶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김보숙 시인의 시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듯 보이지만 세상을 향한 긍정적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생의 매듭을 묶고 풀면서 터득한 지혜일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매듭’을 풀거나, 꽉 죄는 나사를 한 개 풀어놓는 행위 속에서 절망의 기교를 찾아낸다.
나사를 한 개 풀어 놓은 거야. 갈고리 한 쪽에 나사를 풀어서 아무것도 낚을 수 없게 만들었지. 저것 좀 보라고, 하나라도 뽑는 사람이 있나 보라고, 아저씨, 메타포는 무엇인가요. 내가 말야, 새벽에 몰래 나사를 뽑고 있는 사내를 봤단 말이지. 그때부터 뽑을 수 있는 뽑기 기계가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로 변했단 말이야. 말 없는 여행자*의 침대 시트 같은 건가요. 낙엽은 폴란드 정부의 지폐* 같은 건가요. 은은하게 걷는 동반자 같은 건가요. 네가 만약 나사를 풀고 있는 사내의 눈을 보았다면 오래된 동전 같은 녹슨 눈빛을 볼 수 있었을 거란다. 다시 돌아가 너의 새벽을 수정할 수 있었을 거야. 아저씨,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메타포는 무엇인가요.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 안을 들여다보렴. 종일 낙하를 경험한 귀여운 인형들의 웃는 모습이 참으로 환하지 않니.
* 네루다의 우편배달 중
―「메타포는 힘이 세다」전문
시 속의 물음처럼, 메타포는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시창작론에서 나올 법한 질문을 시의 화자는 하고 있다. 시인은 메타포에 대해 “나사를 한 개 풀어놓는 것”, “아무도 낚을 수 없는 것”, “말 없는 여행자의 침대시트”, “낙엽은 폴란드 정부의 지폐”, “은은하게 걷는 동반자”,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 안에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메타포의 세계’에서 “종일 낙하를 경험한 귀여운 인형들”처럼 웃어야 한다. 그 세계는 규정되는 순간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리는 이상한 세계이니까. ‘낙엽은 폴란드 정부의 지폐다’라고 하는 순간 낙엽은 폴란드정부의 지폐가 되고, 낙엽이 폴란드 정부의 지폐가 된 그 순간, 누군가에게 이미 낙엽은 폴란드 정부의 지폐가 아닌 것이 돼 버리는 것. 그것이 ‘메타포’다. 그래서 메타포는 힘이 세다. 한 사람이 말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찾아 헤매야 한다. 절대로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 안의 메타포로부터 달아나야 한다. 되도록 멀리멀리. “네가 만약 나사를 풀고 있는 사내의 눈을 보았다면 오래된 동전 같은 녹슨 눈빛을 볼 수 있었을 거란다. 다시 돌아가 너의 새벽을 수정할 수 있었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아저씨의 전언처럼 슬쩍 나사를 풀어놓는 기교.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는 절망을 낳는 이상하고 기묘한 메타포의 세계. 김보숙 시인에게 메타포는 “낙하를 경험”하게 하는 시적기교이며 절망인 것이다. “아저씨,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메타포는 무엇인가요.”라고 묻지만 아저씨는 자꾸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 안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즉 메타포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잡을 수 없는 그 무엇.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있지만 가둬둘 수는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러니 메타포는 잡히지 않는 뽑기 기계안의 인형이며, 시계며, 야구공이며, 때로 살아 꿈틀대는 미국 자라거나 중국 거북이다. 잡히지 않는 것은 언제나 힘이 세다. 잡히지 않는 시간, 잡히지 않는 사랑도 그렇다.
시 「파래지다」에는 잡히지 않는 궁극의 무엇들이 표현돼 있다. 재래시장 리어카에 수북 쌓인 꽃무늬 팬티들을 보며 시인은 사유를 끌고나간다. 시 속에서 빨간 꽃무늬 팬티는 ‘빨간색’의 창피를 모르는 누추함으로 표상되어있고, 그 반대에 ‘파란’이라는 창피를 아는 이성적인 표상이 있다. 시인은 ‘파란’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시 속의 전언에서 특이하게 읽혀지는 것은 ‘파란’보다 우세한 힘을 가진 ‘빨간’의 위치이다. 빨간, 그건 감성의 영역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의 파란을 보고 할머니는 아저씨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이라며 빨간 꽃무늬 팬티를 아버지 손에 쥐어주었지. 손에 쥐어진 빨간 꽃무늬 팬티를 입에 막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고 나는 점점 파래져갔지.”라는 표현에서 시인은 ‘파란’을 찾아 다녔지만 결국 시인을 마지막에 장악하고 자신을 파래지게 한 에너지가 ‘빨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머니의 빨간 꽃무늬 팬티는 리어카에 수북이 쌓여있었어. 골라도 골라도 빨간 꽃무늬 팬티뿐이었지. 빨간 꽃무늬 팬티는 창피를 모르는 듯 했지. 때로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내복 위에 입혀서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지. 할머니의 오줌에 젖어도 빨간 꽃무늬 팬티는 파래지는 법이 없었지. 창피를 몰라서 파래질 수 없었지. 나는 창피를 모르는 빨간 꽃무늬 팬티를 물려받지 않기 위해서 파란 것을 찾아다녔지. 우울을 유지하는데 요긴하게 쓰인 것은 언제나 파란 것들뿐이었지. 폐쇄성 폐질환에 걸린 아버지의 파래진 입술을 찾았지. 아버지의 파란을 보고 할머니는 아저씨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이라며 빨간 꽃무늬 팬티를 아버지 손에 쥐어주었지. 손에 쥐어진 빨간 꽃무늬 팬티를 입에 막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고 나는 점점 파래져갔지.
―「파래지다」전문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파란’에게 내미는 건‘빨간’이다. 파란 현실의 영역을 빨간 감성의 영역이 장악하는 순간이다. 그 장면을 본 시인은 다시 ‘파란’의 영역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감성과 이성, 현실과 비현실이 몸을 바꾸며 시를 끌고나간 좋은 예다. 우리는 점점 천진성이나 감성을 잃고 현실화되어간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꽃무늬팬티로 표현돼 있는 순정. 창피를 모르는 감성의 영역.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 잃어버린 순수나 감성의 영역은 그의 시 「초코파이 사용 설명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울다가도 웃게 하는 대상, 혹은 물질이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에게 ‘초코파이’는 그런 것이다. 철이 없을 때 시인을 몰아지경(沒我之境)에 빠지게 했던 초코파이는 빚쟁이에게 아버지가 숨은 곳을 알려주게끔 하게도 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슬픔을 위로해주기도 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 문득 생각해보니 그것은 더러운 ‘식욕’이었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깨달아버린 자의 슬픔 같은 게 남아있다. 그래서 시인은 울면서도 웃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미소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 보면 슬픔이 웅크리고 있다. 웃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듯 말이다. “얘야, 지금 나는 나의 더러움에 대하여/이야기 하고 있는데 너는 왜 큭큭 웃고만 있는 거니.”라는 표현에 드러난 ‘나’와 ‘너’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한 명은 어릴 때의 천진성을 간직한 자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어른이 돼 버린 자아인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수정하면서 ‘아이 되기’에서 ‘어른 되기’로의 순서를 밟게 된다. 그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어른 되기’에서 다시 ‘아이 되기’로의 순서를 밟고 싶어 하는 이중적 자아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시를 쓰는 자의 천형은 절대로 철들기를 원하지 않으며 나쁜 아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시인을 괴롭히고 반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나흘 만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버지의 숟가락이 꽂힌 호박죽이 굳어있다.
돌아가시던 아침 날 호박죽을 앞에 두고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하시자
내일 먹겠다면서 냉장고에 그대로 넣어 두라
하셨던 호박죽.
그 저녁 우리 형제들이 먹을 것이라곤
아버지의 숟가락이 꽂힌 호박죽이 전부였는데
그것은 이미 너무 굳어 있었다.
그러다 본 것이다.
식구들이 없는 저녁이면
혼자서 자장면을 시켜 드시고 받은 쿠폰 오십 장
탕수육 대자와 바꿀 수 있는 쿠폰을 다 모은
아버지는 식구들이 모이는 날을 기다리셨을까.
―「즐거운 식사」부분
「즐거운 식사」라고 제목이 붙여진 위 시는 사실 전혀 즐겁지 않은 식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 모인 가족들의 우울하고 쓸쓸한 식사. 시를 쓰는 자의 천형은 절대로 철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혈연의 문제 앞에서는 철들고 반성하게 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온 균열은 바로 ‘이미 너무 굳어버린 호박죽’을 통해 드러나 있다. 가족들이 무심하게 넘겼던 아버지의 외로움이나 소외는 “식구들이 없는 저녁이면/혼자서 자장면을 시켜 드시고 받은 쿠폰 오십 장”을 통해 미세하나마 위안을 얻는다.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긴 쿠폰 오십 장을 통해 탕수육 대자를 시켜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처럼 쓸쓸하지만, 이미 굳어버려 못 먹게 된 호박죽과는 달리 아직 시켜먹을 수 있는 식사인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식사」였을까. 분명 반어적 의미가 담긴 이 시의 제목은 이청준의 소설「축제」를 떠오르게 한다. 한국에서 장례의 절차는 죽은 이가 좋은 곳으로 가라는 의미로 축제의 형식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김보숙 시인의 「즐거운 식사」에서 “우리는 탕수육 앞에서 저마다의 기도를 했다./호박죽에 꽂힌 아버지의 숟가락을 빼서/뜨거운 탕수육 옆에 놓아두고,”라는 표현은 당위성을 획득하게 된다. 아버지가 가족들이 모일 날을 기다리며 모은 쿠폰으로 탕수육을 시켜먹으며 하는 ‘기도’는 안도의 한숨 같은 걸까. 아무튼 ‘쿠폰’이라는 소통의 도구를 통해 남은 가족들은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택배기사는 바쁜 듯 재촉 했겠지.
콩 타작 하면서도 대문을 연신 바라보던
어머니는 얼른 뛰어나갔겠지.
새봄 알리는 보리순, 벌금 자리 나물,
짜놓은 참기름이 그득한 보따리를 그제 서야
상자에 넣기 시작했겠지.
서두르는 택배기사 맘도 모르고 어머니는
끈을 찾아서 묶고, 또 묶어 매듭을 지었겠지.
‘아이고, 무슨 보물 들었는교, 마, 그만 하이소’
택배기사 핀잔도 모르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매듭한번 더 지었겠지.
아파트 수위 아저씨에게 건네받은 택배 풀어보니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손길 같이 베어나는
것 같아 쉽사리 가위도 못 들겠다.
이리저리 설긴 매듭을 풀고 나면 어머니가 나올 것 만
같은 저녁, 쉰 내 나기 직전의 저녁.
매듭을 풀고 있다.
―「매듭」 전문
다른 시에 비해 활달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시다. 매듭을 짓는 일은 무언가를 완성하려는 욕망이다. 택배기사가 기다리든 말든 끈을 찾아서 묶고 또 묶어 매듭을 짓는 어머니를 상상해보라. 즐거움에 웃음 지며 어머니라는 완성된 이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실제로 어머니라는 이름이 완성되어 당도했기에 쉽사리 가위를 들어 끈을 잘라버리지 못하는 마음. 그래서 시인은 여전히 ‘매듭’을 풀고 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어머니라는 존재의 ‘매듭’을 풀고 있다. 어머니와 딸은 풀리지 않는 ‘영혼의 짝’과도 같다. 이 시의 종결어조를 보자. “~재촉 했겠지.”,“~뛰어나갔겠지.”, “~시작했겠지.”,“~매듭을 지었겠지.”,“~매듭한번 더 지었겠지.”는 시인이 상상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택배상자를 앞에 두고 어머니가 택배를 보내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이 시의 어조는 다정하고 상냥하다. 앞에 인용한 시들이 어떤 열렬한 감정들, 열정들을 표현하고 있는 반면 「즐거운 식사」, 「매듭」은 가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쓸쓸함이나, 숙명적인 관계 등이 드러나 있다. 김보숙 시인은 낯설음이나 충격적인 전언 보다는 일상에 대한 사유로 시를 끌고 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 점은 시인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욕망,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조금 더 다가가려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파괴와 해체를 즐기기보다는 언어의 완성,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의 완성을 꿈꾸는 시적 태도이다. 그러다보니 시 속에도 언제나 ‘소통할 대상’이 등장하는데, 「파래지다」에는 ‘어머니/치매에 걸린 할머니/폐질환에 걸린 아버지’가 등장하고, 「즐거운 식사」에는‘아버지/형제들’이 등장하고, 「초코파이 사용 설명서」에는‘나/너’가 등장하고,「매듭」에는‘어머니/나’가 등장하고, 「메타포는 힘이 세다」에는 ‘나/아저씨’가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시 속에 사물이나 물질적 존재가 아닌 사람이 등장하는 걸 보면, 시인이 자폐, 독백 등의 진술들을 즐기지 않고, 소통해야할 그리운 대상들을 호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이 “뽑을 수 없는 뽑기 기계 안을 들여다보렴. 종일 낙하를 경험한 귀여운 인형들의 웃는 모습이 참으로 환하지 않니.(「메타포는 힘이 세다」)”라며 이미 절망적인 상황과 외로움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통해 희망을 보고 일상의 따스함을 엿보게 되는 힘. 생활이 회전문처럼 빙글빙글 반복되어 돌아가고, 우리의 일상이 “종일 낙하를 경험”하며 끌어올려지지 않더라도 시인은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누군가를 아직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김보숙 시인이 어둠을 어둠으로만, 절망을 절망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이다. ‘파란’현실의 영역에서 ‘빨간’감성의 영역을 꿈꾸는 이유이다. 손수레에 가득 쌓여있는 꽃무늬 팬티들처럼 현실과 감성은 우리의 일상에 뒤섞여 있다. 누가 몰래 슬쩍 이 세계의 나사를 풀어놓았는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환히 웃으며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박서영 : 경남 고성 출생. 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좋은 구름.
추천0
- 이전글54호/신작특선/최향란/그 여자의 섬 외 4편 15.07.07
- 다음글54호/집중조명/김보숙/파래지다 외 4편 15.07.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