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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신작특선/최향란/그 여자의 섬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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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최향란
그 여자의 섬
그 여자 분주하다
일곱 딸들 홀로 거둬 먹인 젖가슴 흔들어대며
-요고요고 인자 나온 햇것을 나가 똑, 똑, 따서 조물조물, 아침에 그랬당게.
머위 새잎 쓰디 쓴 내음
이게 바로 개도의 봄
자연산 회를 시켰더니
커다란 파전, 통통한 홍합무침, 묵은지, 양푼 째 맡긴 머위 어린 잎
덤으로 술술 나오는 그 여자 인생 한 접시
낯선 섬에서의 낮술
생 날것이 이렇게 혀끝 달게 하다니
바닥이란 말은 애초에 술잔에만 있었던가
빈 술병 즐겁게 늘어나고
-자연산은 역시 맑은 지리 탕이지. 한 번 잡서 봐
양은 냄비 안 뜨거운 섬 한 쪽
떠날 때서야 고개 들어보니
간판 꼬라지 보소
손으로 쓴 두 글자 ‘식당’
온 몸으로 견뎌온 짜디 짠 생도
그 여자 손끝에서라면 달달하다
눈 덮힌 겨울 산에 합장
마이산 숨이 헉, 황홀하다
내가 서둘러 달려온 이유는 망각의 흰 눈에 빠졌다
수직이 아니어도 기어서 당당한 줄사철나무 만나
내 차가운 수직 본능과
신열에 부어올라 들리지 않았던 시간은 헛된 모래시계냐
아직 물음 던지지 못한 아침인데,
온 세상에 눈이 내리고 또 내리는데* 의사지만 시인이고 싶은 지바고
용납 못할 개인의 자유와
얻을 수 없는 그녀 껴안았던 시인의 얼음 별장
하얀 눈은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휩쓰나니*
우리 다시 흰 빛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은수사 마당에 깊게 홀린 겨울 꿈 헤치고 보니
안과 밖에
온 길과 갈 길에
환히 보이는 그 곳에
유치찬란이라 누락 시켰던 야윈 사랑 치욕으로 잊었던 자유
온힘 다해 마이산 기어서 오르는데
거짓말처럼 다 순하다
줄기에서 뿌리 내려 또 시작하는 줄사철나무처럼
완성은 아픈 상처쯤에서 늘 발아했다 말하려 하는가
오늘 가장 밝은 귀 열어 생 하나 상량한다
* 러시아소설 ‘닥터 지바고’ 중에서.
복수초
뜨거워야 사는 황금 꽃 찬 얼음 아래 숨었던
너의 집과 나 사이에 뜬 저 달만 깊은 밤
긴 겨울이 된 네게도 사연이 있겠지
오목 안테나 꽃술로 뼈 속 깊이 견디다가
눈은 내리는데
정말 스스로 뜨거워야 깨어날 수 있나요
다른 길 쉽지 않은 내게도 사연이 있기에
심장 밖으로 툭 툭 불거져 나온 꽃이네
꽃집의 아저씨
큰바람꽃, 깅기아나, 후레지아, 제라늄, 팬지, 꽃기린, 베고니아는
내가 좋아하는 어느 시인의
아파트 베란다에 피어난 봄꽃들
봄, 봄, 봄, 봄, 봄날
유혹 물리치고 원고 쓰는데
잠이 발가락 사이로 솔솔 기어들어서
민들레꽃, 산앵두꽃, 진달레를 쫒아
영취산 산길로 접어들었다며
카톡으로 보내준 꽃다지
시인의 봄바람에 덩달아 내 코끝도 간지러워
담장 밖 가지에만 먼저 꽃핀
앞 집 모과나무와 사랑에 빠져볼까나
모차르트 머리 스러넘기는 시인의 손바닥
달콤한 봄비와 따사로운 햇살 마구처럼 뿜어나오는지
손끝만 톡, 스쳐도 수선화 환한 게
그래서 나는 시인을 꽃집의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한다
찬엽이
찬바람 불던 날
떨어진 낙엽처럼 굴러들어 왔다는
찬엽이는 꽃을 좋아했어
동산에 산벚꽃 환하던 봄 밤
정희 할머니 집 아궁이 옆에서 딸을 낳았다는 찬엽이는
진달레꽃, 유채꽃, 명자꽃을 업고 다녔어
어린 우리의 장난감 되어준 어리버리 벙어리 찬엽이
머리에 꽃 꽂고 착한 찬엽이 뒤 따라다니면
불같이 화를 내던 정희 엄마
정희가 가슴에 산벚꽃 가지 품고 다닌 비밀
나는 누구에게도 끝내 말하지 않았어
울 엄마 보다 훨씬 늙어보이던 찬엽이
나는, 정희는, 우리는 그냥 찬엽이라고 불렀어
시작메모
숭얼숭얼 홍매화 가득
밤새 비 내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비는 새벽까지 내렸고, 내가 잠깐 잠든 사이 아직도 새벽인데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거짓말처럼 순간에 사라지는 것들……
4월 순천 선암사 절 마당에는 숭얼숭얼 홍매화가 가득했다.
절정인 것들, 너무 고와서 한 잎 떨어지는 것도 안타까워 바람을 탓하였는데.
벌써 홍매가 열렸을 텐데 간밤의 빗소리에 꽃 질까 걱정이다니.
부질없이 걱정을 사서하는 그리움만 깊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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