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4호/신작특선/서강석/다리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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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서강석
다리
흑갈색 강물 위에 푸른색 철골
멋진 다리위로 만원버스가 달린다.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새털구름이 가볍게 떠있는 도시의 아침
거꾸로 돌린 필름처럼 철골 트러스가 분해되고
상판은 케이크처럼 잘려서 물 위로 떨어진다
만원버스 한 대와 다섯 대의 승용차가 허공을 날고
서른 두 명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수학여행이나 같이 가야 할 세일러복 여고생
티 하나 없는 순결한 영혼들
돌아오지 못할 하늘 여행을 같이 떠난다
보고픔에 눈이 빠지고 슬픔에 눈물까지 말라버린
아버지도 스스로 딸을 따라간다.
예쁘게만 빨리만 만들어진 다리는
관심도 보살핌도 받지 못했다
자기 몸을 부셔서 시위하여
삼 년 만에
푸른 강물 위에 주황색 철골트러스로 미끈하게 다시 서지만
까르르 웃던 여고생들,
곳 결혼할 젊은 회사원
목숨을 바친 서른 두 명은 잊혀졌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차들만 다리 밑 위령비를 무심히 스쳐간다
명품
오백 두 명이 죽고
구백 서른일곱 명이 다쳤다
여섯 명은 완전 분해되어
실종 처리
명품만 진열 하고
최고의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빌딩
이십 초 만에
무너져 버린다
누구나 소설 하나는 쓸 수 있는 사연이 있고
누군가에게 우주의 무게 같은 사랑을 받는 사람들
잔인한 탐욕의 무량판에 압착되어
슬픔만 남겨 놓고 사라진다
구년 만에 그 자리에
죽은 사람 수보다 훨씬 많은 아파트가 섰다
최고의(아크로) 전망을(비스타) 자랑하는
도시의 명품으로 쫙 진열되었다
누구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있는 모녀를 봤다고도 하지만
오천 미터 멀리 떨어진 숲속에 세워진 작은 위령탑에 배회하고
밝게 빛나는 산자들의 공간에 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탐욕과 비극의 장소를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초고층 최고급 아파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르는 척 시침 뚝 떼고 서 있다.
아빠
프란츠 카프카는 백 년 전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착한 영업사원 그레고리를
딱정벌레로 만들어 버렸지만
너희들은 오늘 우리를
물고기로 만들어 버렸다
더 이상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이런 곳이 있는지
이런 날씨에 이런 일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
이도시의 누구도 알지 못해도
우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그레고리들
오 일 동안 쉬지 않고 내리는 장맛비 속에
한강변 지하 25미터
깊은 땅속으로 내려간다.
창호지 같은 차수 판이 찢어지고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보면서
우리는 양쪽 턱 밑으로 붉은 아가미가 나오고
팔과 다리는 지느러미로 바뀌더니
커다란 멋진 물고기로 변하였다
지금은 한강을 나와 서해바다를 거쳐
이름다운 태평양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욕망과 업에서 해방되어
신이 된 듯 행복하게
그러나 그날
한강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아빠♥ 서울엔 비가 많이 온다는데 괜찮은 가융?”
걱정의 문자를 보낸 사랑하는 어린 딸과
남은 가족들의 생계는 너희가 책임져라
우리는 변신된 그레고리들
더 이상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니까
보고 싶어도 이제는 볼 수도 없으니까
무정
무슨 이름이
세월이더냐.
가면은 너 혼자 가지
그 많은 꽃 봉우리
다 떨구고 가더냐.
무엇 때문에
땅에 필 예쁜 꽃들이
차가운 바다로
다 져 버린단 말이냐.
하늘에 비바람 내리고
사람들 가슴에 피눈물 흐르니
시인도 더 이상
시를 쓸 수가 없다.
퀭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본다.
생얼
가면은
너무 무서워
아무리 예쁜 가면이라도
선한 얼굴
부드러운 목소리
달콤한 약속
세월이 가면
벗을 수 없게
얼굴에 붙어 버리고
자신마저도
가면이 자기의 생얼이라고
착각하지만
타고난 탐욕의 얼굴은
예쁜 가면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자전적 시론
도시와 눈물과 시
나이 들어가면서 더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알지 못합니다. 가슴 속으로 깊이 울고, 눈물은 남 보기 전에 얼른 훔치거든요.
오랫동안 도시행정을 해왔습니다.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늦게나마 시인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시의 주제는 도시와 인간입니다.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소외와 고독. 도시의 아름다움과 추함. 인간의 사랑과 성장이 제 시에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20년 전 1994년 10월 어느 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습니다. 아침에 가방 들고 학교 가던 여고생 9명과 모두 32명이 같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제 시 ‘다리’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수학여행이나 같이 가야 할 세일러복 여고생
티 하나 없는 순결한 영혼들
돌아오지 못할 하늘 여행을 같이 떠난다.
함께 하늘여행을 떠나는 어린 아이들, 수학여행이나 같이 가야할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며 저는 울었습니다.
1995년 6월 강남의 삼품백화점이 붕괴하였습니다. 508명이 죽고 937명이 다쳤습니다. 인간 탐욕의 무서움과 도시의 잔인함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 자리에 초고층 최고급 아파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르는 척 시침 뚝 떼고 서 있다.
누군가에는 우주의 무게 같은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오백 명 넘게 한번에 떠나보내 버리고 모르는척하는 인간의 탐욕과 도시의 잔인함을 제 시 ‘명품’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20년 만에 시간의 수레바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가요? 2013년 7월 여름 장마가 한창일 때 노량진 배수지 공사장에서 7명의 인부가 산채로 수장되었습니다. 그 들은 죽었지만 제 시에서는 죽지 않았습니다.
창호지 같은 차수 판이 찢어지고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보면서
우리는 양쪽 턱 밑으로 붉은 아가미가 나오고
팔과 다리는 지느러미로 바뀌더니
커다란 멋진 물고기로 변하였다
지금은 한강을 나와 서해바다를 거쳐
아름다운 태평양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욕망과 업에서 해방되어
신이 된 듯 행복하게
제 시 「아빠」 에서는 고단한 일용노동자의 삶을 살아 왔던 그들이 모든 업에서 해방되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물속에 있을 때 멀리서 보내준 딸의 메시지 “아빠♥ 서울엔 비가 많이 온다는데 괜찮은 가융?”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렸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2014년 4월 21일! 64명이 희생되고 아직도 238명이 차가운 진도 앞바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다 고등학생들 아무런 죄 없는 순결한 영혼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 하루 종일 눈물이 납니다. 탐욕과 비열함, 무능과 위선에 분노가 치밉니다. 수학여행을 같아가던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할 하늘여행을 가게 되다니요.
시인도 더 이상
시를 쓸 수가 없다.
퀭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본다.
저의 시 ‘무정’ 에서는 바다에 진 수 많은 어린 영혼들 생각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눈물까지 다 빠져 퀭한 눈으로 망연자실하는 시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그로 인한 도시의 재난, 거기에 희생되는 죄 없이 순결한 영혼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시인은 가면을 쓰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위선자들에게 가면을 벗고 민낯을 드러내라고 시 ‘생얼’에서 말합니다.
자신마저도
가면이 자기의 생얼이라고
착각하지만
타고난 탐욕의 얼굴은
예쁜 가면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주목받는 시인 편에 낸 시 5편이 모두 재난시가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세월호 사건이 전에 써놓은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노량진배수지공사장 재난시 들을 불러내왔군요.
제 시 「도시사람」 에서 저는 도시인들을 수많은 원두 알갱이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커피냄새가 난다
한 집 건너
무슨 벅스 무슨 베네 무슨 쿠치
뚜껑 달린 종이컵에
커피 한 잔 받아들고서
볶인 심신을 달래는
원두 알갱이 같은 도시사람들
도시인들 모두 비슷하고 숫자도 많지만 도시의 재난에 원두처럼 갈아져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이니까요. 이제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울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시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시를 쓰게 된다면 저는 교만하지 않게 독자 편에서 의미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저는 읽고 나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도 못할 시, 단순히 자연에 대한 미추나 느낌만을 풀은 시, 전달도 되지 않는(의미도 없는 또는 남들은 알지도 못 할) 자신만의 내면의 상념을 나열한 시들은 시와 시를 읽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시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서강석 :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저서 서강석 주재관의 뉴욕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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