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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집중조명/김주대/풍장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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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김주대
풍장
바람이 허공에 새겨놓은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리라
살이었던 욕심을 남김없이 내려놓고
신의 발을 무사히 만질 수 있도록
영혼에서 살이 빠져나가는 시간
바람의 지문을 영혼에 새기는 일이다
넘치던 말들과 형상을 보내고
허공에 섬세하게 깃들게 되리라
몸 전체가 꽃잎처럼 얇은 고막이 되어
지평선에 누우면
별들의 발소리가 들리겠지
살을 버린 이성은 비로소 세계를 흐느낄 것이고
혀가 된 푸른 바람이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때에도 우리는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안(內)
가속팽창 하는 우주의 끝에 가장 먼저 이를 수 있는 것도
우주가 아직 이르지 못한, 시공이 없는 곳에 갈 수 있는 것도
그리움이다
그러니까 세계는 꼼짝없이 그리움의 안이다
중력파
불덩어리 심장이 소용돌이를 그릴 무렵
당신과 나의 밖으로 계절이 퍼져나간다
그리움을 더하여 차원마다 다른 세계가 열리고
사랑한다는 아득한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시간이 목숨 쪽에 떼 지어 번져온다
어디 있든 측량되지 않는 기호로 서로를 부르며
치자꽃 향기처럼 운명을 관통한다
떨리는 피부에 서로를 새기던 생이 물결친다
해식동굴
사방 파도소리만 보이는 깜깜한 밤 바다
소리에 갇힌다
온몸이 소리에 조각당하는 기분
뼛속으로 파도가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
어두웠던 마음 한쪽이 무너지며
소리의 동굴이 생긴다
시작
세찬 빗줄기 위로 깃발을 올립니다, 전하. 소신은 말갈의 피를 받아 검은 지평선을 홀로 걸어온 사람, 전하의 목을 칠 역적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번개가 궁궐을 때리고 피뢰침 속으로 사라질 때 소신은 올 것이옵니다. 곧이어 새와 구름이 지나간 곳, 나비가 얇은 날개로 허공을 저며 낸 화사한 길을 끊는 번개가 칠 것입니다. 전하, 소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빗줄기 속에서 망나니처럼 펄럭이고 차가운 비명소리가 들리거든 귀를 여시고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전하, 역적의 시간이 전하의 은총으로 왔지만 익숙히 멈출 수 없어 지독한 고독 이후에 혼란한 역적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옵니다. 눈부신 어둠의 기둥 위로 쏟아지는 빗발을 따라 오는 새벽, 젖은 깃발이 마르기도 전에, 세계를 받치던 전하의 무릎은 부서지고 역적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 때 피 묻은 칼을 들고 날선 지평선을 마저 넘겠습니다. 전하, 소신은 말갈의 후예, 완성된 역적의 나라에서도 지평선 너머 지평선으로 가는 행려자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시작이오니 전하, 그럼 하해 같은 은혜 소신의 어미에게 그랬듯이 전하의 목을 치겠습니다.
*김주대 : 89년《민중시》, 91년《창작과 비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도화동 사십계단』,『꽃이 너를 지운다』,『그리움의 넓이』등 ,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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