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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시/윤석정/출근, 구부정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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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윤석정
출근, 구부정한
어깨 부딪히고 어깨 치이고
어깨 피하려고 옆으로 걷는다
어깨 끼어 시간 끼어
앞으로 걷는다
천변 걷는 여자처럼
뒤로 걷는 어깨들 없다
출근하는 어깨들 다 구부정하다
어깨 숙이고 어깨 내밀고
바삐 더 바삐 걷는다
뛸 때 더 숙여야
뛰어오를 때 더 숙여야
구부정한 어깨 더 빠르다 더 높다
어깨들 잔뜩 채워 넣고 지하철이 달린다
터널의 어깨를 통과한다
지상의 어깨를 관통한다
구부정한 어깨들
자꾸 손바닥 화면 속으로 달린다
당신은 지금 늦은 저녁
나는 지금 이른 아침
우리는 서로 다른 시차의 어깨를 가졌다
지하도를 빠져나온 어깨가 턱을 내밀고
구부정한 한숨 몰아쉰다
이 길을 전진하는 어깨들 수차례 죽다 산다
잃어버린 도장
도장이 사라졌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아무리 길을 더듬거려도 어디로 갔는지
누가 가져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껏 나는 몇 번이나 도장을 찍었던가
이사 때 혼인신고 때 보험계약 때 꺼내고
한결같이 제자리에 넣어둔
초승달과 샛별과 바람과 물고기가 새겨진 나무도장
한 때 나의 증거였던 내가 사라졌다
사라진 길을 한참 더듬거렸더니
사라진 날인들이 살아났다
초승달과 샛별이 떠올랐고
바람과 물고기가 유영했다
그래, 내가 잃어버린 게 도장만이 아니었구나
집이 사라졌다 내가 나고 자랐던 옛집
한때 기와지붕 아래에서
곤히 잠잤던 식구의 이름과 장판에 남은 상흔들
벽을 도배했던 어린 글자들이 사라졌다
출가한 누나 방에 세워둔 빨간 자개장롱이 사라졌다
어머니가 시집오면서 데려왔던
꽃사슴과 산새와 나무와 시냇물과
유행 지난 옷들이 사라졌다
장롱 속 손궤짝이 사라졌다
집과 논과 밭과 사주팔자와 이름 풀이가
수십 년간 동거했던 밀실이 통째로 사라졌다
한때 나의 증거였던 내가 사라졌다
*윤석정 :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페라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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