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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시/임윤/시간의 벽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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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임윤
시간의 벽
직각으로 밀려오는 고딕체의 바람에
갈대는 더욱 휘청거렸다
경계는 아우성으로 이루어져
등산로엔 나무계단이 말뚝을 박았고
건물들은 협곡처럼 솟아올랐다
물렁해진 땅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지하철을 오가는 사람들은 말을 잃어버렸다
사각의 세계가 손바닥 안에 있으므로
다들 손가락으로 대화를 했다
누구도 그 수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화의 음계는 점차 낮아져 계절은 수시로 바뀌었다
가방엔 사계절 옷가지가 쌓이고
고딕의 양식은 천천히 곡선을 삼키기 시작했다
시간은 수직으로 꺾여 더 이상 원을 긋지 않았다
벽은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남아
모든 날개들은 부딪히고 꺾였다
절벽을 기어올라
정상에 쌓아놓은 성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바람을 방목해야만했다
별들의 눈에서 윤슬이 일렁거릴 때
허공에 집을 지었던 노동자들이 둥지에서 내려왔다
철탑에 걸린 까치집의 앙상한 뼈대가 드러났다
나뭇가지 사이로 녹슨 달이 흘러내렸다
거울에 갇힌 도시
믿지 않기로 했다 속내를 감추고 위선을 일삼았다 하늘을 가두고 들판을 가두고선 열쇠를 숨겨버렸다 거울이 본보기라고 가르쳐주신 초등학교 선생님 생각에 눈물이 났다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그녀 앞에 벽면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거울 위로 쏟아졌다 거울 속에는 늙어버린 그녀가 서성댔다
동공에 비친 모습은 반대였다 오른손을 찍으면 왼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반평생 손거울 보며 면도를 했고 딸아이도 꿈을 키웠다 배반의 계절은 거울의 권리라는 걸 모르고 겉모습만 믿었다 거울 밖에는 바보들만 살았다 한 발짝 물러서면 두 발짝의 거리가 생겼다
먹구름으로 감싼 거대한 음모였다 도무지 뒷모습을 알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도시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리로 지은 마천루의 소유권에 목청을 높였다 진실은 베일과 늘 사촌지간이었다
인터넷 거울이 사방을 둘러싸고 으르렁거렸다 도망칠 공간도 없는 골방에서 나의 하루는 스캔되었다 거울이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최면에 걸린 듯 유리벽에 갇히고 말았다 거울이 지배하는 세상은 쉽게 잠들지 않을 존재였다 아무도 몰래 도시를 꿀꺽 삼키곤 했다
*임윤 : 경북 의성 출생. 2007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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