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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시/이현서/꽃잎지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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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현서
꽃잎지문
일몰이다 붉은 저녁
쿵쿵 시간의 발굽소리 들려온다
먼 지평선 너머에서 해를 구워 발라먹고
뿌옇게 모래먼지를 뒤집어 쓴 채 달려오고 있다
성긴 별자리들 빠르게 이동한다
내밀한 비밀을 간직한 채 불과 얼음을 건너 온 구름은
물안개 피어오르던 강을 기억하며 천개의 귀를 열고
모호한 바람의 행로를 살피는 중이다
흘러내리는 빛의 주검들이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묵화를 그리던 회화나무 아래서 구원처럼 속죄의 말을 생각했다
한 점 화폭 속으로 돌아가지 못한 길들이 통증으로 박히고
파란 힘줄이 돋아나던 가지마다 허공이 덜컹거린다
수 억 광년을 날아와
사라지는 예언처럼 슬픈 구름의 종족으로 흐르다
가파른 층계마다 낮게 엎드린 숨결들
난기류의 길을 몸속으로 구겨 넣고 먼 행성으로 슬픔을 전송하면, 어느새
눈雪 위로 가지런히 찍히는 꽃잎 지문
아픔·1
무반주 첼로 모음곡 속으로 걸어갔다 가을은
첼로의 낮은 선율 속으로 흐르던 바람
휘- 심연을 휘저으면 가슴지느러미에
어스름이 내리는 산 빛 길 하나 돋아나지
사막의 와디처럼 내안의 어디쯤에도 물길이 있었을까
뚜벅뚜벅 낯선 발자국들이
당신의 부재를 헤아리는 동안
뚝 끊어진 모퉁이에서
야윈 햇살 한 자락 끌어당긴다
푸른 이끼의 시간을 품어도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에서 더 이상
달빛의 지느러미도, 구름꽃도 피지 않았다
비바람의 울음을 저장한 나이테처럼
마음의 갈피마다 박힌 얼룩 천천히 짚어 가면
몇 번의 다짐에도 다시 고개를 드는 비애
겹겹의 파문을 잠재운 채
천천히 서로에게 시린 바람 한 자락 덮어주며
해독되지 않는 슬픔을
운명처럼 천천히 다시 읽는다
*이현서 : 경북 청도 출생.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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