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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특집1/김구용시문학상/김정남/지옥에서 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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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시쓰기
―김성규 시인의 시론시(詩論詩) 혹은 ‘우는 심장’
김정남(소설가·문학평론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포즈나 위악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절망의 묵시록이다. 이것은 시인이 제시하는 복합적인 이미저리와 그것에 의해서 구성되는 미장센이 가져다주는 상황의 구체성에 기인한다. 그의 시는 회화적이고, 어두운 색조가 두드러지는 그로테스크 화풍의 유화다. 이러한 그의 시풍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기질적이고 생래적이며, 오래도록 고통의 편에 서 왔던 그의 마음자리를 대변한다.
저 60년대 짐 모리슨의 음울한 목소리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기억되는 The doors의 음악 「The end」의 한 구절, “The end of laughter and soft lies. The end of nights we tries to die. This is the end”(웃음과 사소한 거짓말의 마지막. 우리가 죽고자 했던 밤의 마지막. 이게 마지막이다.)처럼 절망의 단애에 서 있는, 우리 시대의 고통이 신음처럼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묵시록적이다. 그 종말의 풍경을 그는 그의 첫 시집 『나는 잘못 날아왔다』에서 이미 우울한 시스케이프(seascape)로 그려낸 바 있다.
눈이 내리고 나는 부두에 서 있었다
육지 쪽으로 불어온 바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넘어지고 있었다
바닷가 파도 위를 날아온 검은 눈송이 하나,
춤을 추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은 몸을 웅크리고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었다
눈송이는 점점 커지고, 검은 새
젖은 나뭇잎처럼 처진 날개를 흔들며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있었다
해송 몇 그루가
무너지는 하늘 쪽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였다
그때마다 놀란 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나는 잘못 날아왔다
나는 잘못 날아왔다
「불길한 새」전문
이 시의 음산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은 눈이 내리는 겨울바다의 풍경을 후경으로, 검은 새 한 마리가 점점 화자를 향해 전경화되는 동적인 기법에 의거한다. 화자는 눈이 내리는 부두에 서 있다. 이때 ‘바닷가 파도 위를 날아온 검은 눈송이 하나’가 화자의 눈에 포착된다. 주변의 건물들도 몸을 웅크리고, 바람은 화자의 머리카락을 흩어놓는다. 검은 눈송이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급기야 그 실체가 검은 새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불길한 검은 새는 화면의 한쪽 귀퉁이를 일그러뜨리고, 해송은 무너지는 하늘 쪽을 향해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이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우성치는 존재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나는 잘못 날아왔다.” 이러한 “놀란 새의 울음소리”처럼 고통에 신음하며 우리는 모두 잘못 날아왔다고, 지구별이라는 이 패망한 왕국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쓰나미로, 태풍으로, 전쟁으로, 질병으로, 기아로, 자본의 전횡으로. 이 검은 재앙들을 어찌할 것인가.
흰 눈 내리는 숲으로 걸어가네
나무들은 머리를 흔들어 눈을 털고
검은 뿌리의 발톱을 잎사귀로 감추네
가지 사이로 가지를 뻗으며
나무들은 언 손가락을 구부려
손바닥만한 하늘에 길을 물을 뿐
피에 젖은 발자국 찍으며
숲으로 달아나는 밤
지나온 발자국에 이유를 묻지 않듯
누군가 나에게 걸어온 길을 돌아가라 말하면
부어오른 살갗에 찬 눈을 뿌릴 뿐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
그래서 갈 수 밖에 없는 길을 걸으면,
흰 눈 덮인 나무들만
부러진 팔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네
나무 사이에 줄지어 선 나무의 이름을 모르듯
인간을 헤치고 다니면 인간을 알 수 없네
아무리 세차게 고개를 저어도
나무는 눈 속에 스민
자신의 핏자국을 지우며 울지 않네
「눈 위에 찍한 붉은 발자국」전문
자, 겨울숲이다. 재앙의 증인이 되기를 자처한 시인은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그래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고통의 화신이 되어 걸어가는 길을 시인은 “피에 젖은 발자국을 찍으며”라는 시구로 은유한다. 그러나 그 숲의 겨울나무를 보라. “머리를 흔들어 눈을 털고” “검은 뿌리의 발톱을 잎사귀로 감추”며 서 있다. “언 손가락을 구부려/손바닥만한 하늘에 길을 물을 뿐”이다. “부러진 팔을 붙잡고 숨을 몰아”쉴지언정, 나무는 결코 울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핏자국을 지우며” 서 있다. 고통을 과장하거나 엄살을 부리지 않고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그런 의미에서 눈 위에 찍힌 붉은 발자국이란, 그 선혈 붉은 이미지가 환기하는 바와 같이 분명한 고통의 증거이지만, 스스로의 핏자국을 지우며 영하의 시간을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 겨울나무의 묵연함에 비할 수가 없다. 이런 시. 낙루의 시간조차 얼려버리는, 지워버리는 겨울나무의 강고함으로, 더 굳세게, 밀고 나가는 시, 그런 시인이 되고자 함이겠다. 그리하여 재앙의 나날들을 버티고, “폐정”(「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의 순간을, 그 병의 진원지를 증언하는 시인이 되리라고.
점자를 읽듯 장님이 칼을 만진다
칼날에 피가 흐른다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는다
칼은 따듯하다!
자신이 새긴 글씨가 상처인 줄 모르고
기뻐하는 장님을 보라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핥으며
자신도 모르는 글씨를
칼날에 새기고 있다
몸에서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더 빨리
더 빨리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
온몸으로 받아 적고 있다
「방언(方言)」전문
시라는 이름의 이질음성, 돌연변이, 이방의 언어. 이를 시인은 방언(方言)이라 했다. “점자를 읽듯 장님이 칼을 만진다”는 것. 피를 흘리며, 자신이 새기는 글씨가 상처인줄도 모르고, 쏟아지는 피를 핥으며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온몸으로 받아 적”는 것. 이것이 곧 시작(詩作) 행위의 알레고리. 시적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라고 파스(Paz, 『활과 리라』)는 말한다. 저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가 곧 초월성이라면,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의 주문을 받아 적어야만 한다. 파스에 따르면 말이란 본질적으로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이다. 따라서 시적 목소리는 ‘타자의 목소리’이고 동시에 ‘나의 목소리’다. 이렇게 태어나는 방언은 감각의 위계와 질서를 흔들며, 새로운 위상학을 만들어내고, 이 방언의 창조는 곧 영구혁명의 과정인 것이다.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
두루미
목을 부르르 떤다
부리에서 삐져나온
푸른 낚싯줄
흘러내리는 핏물
목구멍에 걸린
바늘을 토해내려
날개를
터는 소리
한번 삼킨 것을
토해내기 위해
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
걸어가는 길
살을 파고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두리미가 운다
「시인」전문
그리하여 김성규 시인은 시인을 이렇게 알레고리화한다.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 두루미가 목을 부르르 떨고 있다. 그러나 그 물고기 부리에서 삐져나온 “푸른 낚싯줄” 때문에 두루미는 피를 흘린다. “목구멍에 걸린/바늘을 토해내려” 날개를 털고 있다. 이때 치명적인 고통의 몸부림을 뜻하는 “날개를/터는 소리”는 곧 시를 의미하며, 운명적으로 “삼킨 것”을 토해내기 위해 “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걸어가는 길”이란 곧 시인의 천형적 숙명을 뜻한다. 붉디붉은 석양과 같은 피 흘림의 길, 그 길을 가는 두루미의 울음은 오늘도 이렇게 계속된다. 이처럼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나타낼 수 있는 비합리적인 인식의 지평이 곧 시(예술)의 운명이다. 이 고통의 언어는 재앙의 증언이며 그것이 곧 진정한 시가 내포하는 불화의 계기성이다.
부러진 칼날처럼 우박이 쏟아졌어 익은 사과에 꽂히고 자동차 유리창이 깨졌어 농부들은 쓸모없는 과일을 내다 버리지
우박은 아스팔트 바닥에서 반짝였어 우산을 버리고 집으로 걸어가는 행인들, 버스 유리창의 성에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바라보지
젖은 신문을 들고 빌딩 아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연기가 공중에서 부서지지 이어붙일 수 없는 거추장스런 물건을 보듯
화상을 입은 여자가 거울 앞에 서 있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형태도 없이 내 마음이 망가지는 날
버스에서 내려 쏟아지는 칼날에 얼굴을 대고 울고 있어 소리내지 않고, 우박 소리가 내 소리를 대신해서 울어주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내 마음이 망가지는 날, 버릴 수도 없는 그것들을 조각조각 더러운 풀로 붙여 시를 쓰지
덕지덕지 기워진 내 얼굴을 보고 너는 나를 기억할까 더러워진 내 마음을 보고 너는 나를 이해할까
「형태도 없이 내 마음이」전문
또 이처럼 재앙이 변주된다. “부러진 칼날처럼/우박이 쏟아”지고, 그 날카로운 조각들은 “익은 사과에 꽂히고 자동차 유리창이 깨”진다. 사람들은 우산을 버리고 집으로 걸어가고, 화자는 버스 안에서 이를 바라본다. 젖은 신문을 들고 빌딩 아래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운다. 사람들은 칼날 같은 우박이라는 재앙 앞에서 아우성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재앙에 익숙한 듯, 쓸모없어진 과일을 내다 버리고, 그저 우산 없이 걸어가고, 젖은 신문을 들고 담배를 피울 뿐이다.
거울 앞에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상 입은 여자가 서 있다. 이미 재앙에 순화(馴化)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좌절도 희망도 없다. 화자는 버스에서 내려 “칼날에 얼굴을 대고” “소리내지 않고” 울고 있다. 이처럼 자해에 가까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깊은 속울음을 씹을 뿐인 것이다. 화자는 “형태도 없이 내 마음이 망가지는 날” 버릴 수도 없는 마음 조각들을 모아 “더러운 풀로 붙여” 시를 쓴다고 말한다. “덕지덕지 기워진 내 얼굴을 보고”, “더러워진 내 마음을 보고” 너는 나를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묻는다. 이처럼 형태도 없이 마음이 뭉그러진다는 것. 재앙을 전존재적으로 체현하고 이로 인해 누더기가 된 마음을 기워 시를 쓴다는 것. 구제역, 핵 재앙, 쓰나미, 금융 위기 등 일상화된 재앙의 시대(the Era of Catastrophe)를 살면서, 이에 길항하는 예술은 단순한 개량적 발상으로 얻어질 수 없다. 재앙은 지속되고 현실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위기의식보다는 이에 무감각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우리는 재앙에 대해 각성하기는커녕, 벌써 망각했거나 적어도 우리는 아니겠지 하는 안심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재앙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푸른 지구에서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찬연하고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무책임한 믿음 속에 재앙이 살고 있는 것이다. 김성규 시인의 재앙의 상상력은 이를 거부하며 종말의 묵시록을 숭엄하게 수놓는다.
나를 죽이고 김이 나는 심장을 꺼내가
나를 죽이고 김이 나는 심장을 꺼내가
취해, 자면서도 우는 소리가 들리네
「우는 심장」부분
나를 죽이고 우는 심장을 꺼내는 것. 이것이야 말로 김성규 시인이 추구해왔던 시론(詩論)이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내 몸을 짜서 오늘, 한편의 시를 쓰는 밤”[혈국(血國)]이라 했겠는가. 그의 시에 내재한 부정의 에너지가 재앙의 날들과 만나 더욱 강고해지고 매섭게 날이 서길 기대한다.
*김정남 : 1970년 서울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현재 관동대 교수. 2002년 <현대문학>에 평론이, 200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 펴낸 책으로 문학평론집 ⌜폐허, 이후⌟∙⌜꿈꾸는 토르소⌟∙⌜그대라는 이름⌟, 소설집 ⌜숨결⌟(제 1 회 김용익 소설문학상 수상작)∙⌜잘 가라, 미소⌟(2012년 4분기 우수문학도서),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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