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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특집1/김구용론/장이지/일기를 통해 본 김구용 문학의 형성 과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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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4,313회 작성일 15-07-06 10:55

본문

김구용론
장이지

일기를 통해 본 김구용 문학의 형성 과정


1. 문제제기

 김구용은 평생에 걸쳐 문학적 아취가 있는 일기를 써온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전시기 부산에서부터 그는 일기를 지면에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 그의 전집이 정리되면서 1940년 2월 24일자부터 1984년 1월 1일자 일기까지를 구용일기: 김구용문학전집5한 권으로 묶어냈다. 이 일기는 김구용의 습작기부터 노년기까지의 문학관, 사상의 심화·발전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그의 정치·사회적 정체성은 물론, 한국 근대사의 한 질곡을 제한된 범위 하에서나마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 전집판이 구용일기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일반인들이 확인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일기는 그날그날의 일상적인 기록에 그칠 때도 있지만, 자기성찰이나 자기통제를 위해서 쓰기도 한다. 자기진술, 혹은 일기에 관한 연구 주제에 대해 한 논자는 다음과 같이 긴 목록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한―인용자]인간의 관점에서 역사의 다양성과 모순성을 생각하고 기술하도록 해준다. 이때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고 타인을 인지하는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아동기 및 청소년기의 사회화와 가족 안에서의 사회화 같은 일상생활의 주제들, 몸의 경험과 몸에 대한 인식, 종교와 주술, 독서행위, 시간 및 공간 인식, 가치 및 규범들, 귀속성, 권력관계와 폭력의 경험, 그리고 특히 기억과 기억의 생애사적, 역사서술적 의미부여 문제도 연관된다.” 김구용의 일기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그의 인간적 면모와 시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김구용의 일기는 또한 그 자체로도 독자적인 문학성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일기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그는 40년 이상 시와 일기를 병행하여 썼다. 시와 일기는 모두 그에게 포기할 수 없는 장르였거니와, 그가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고 긴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써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김구용 문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시뿐만 아니라 그의 일기를 검토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립 르죈은 ‘자서전의 공간’이 형성되는 데 필수적인 조건으로 자서전 이전에 다른 텍스트들이 이미 출간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바 있다. “서로 다른 텍스트 중 특별히 하나의 것으로만 귀결되지 않는 인물, 또한 다른 텍스트들을 더 만들어낼 수 있고, 결국 자기의 모든 텍스트들을 넘어서 존재하는 한 인물”로서의 작가는 적어도 두 번째 책을 발간하고 나서야 진짜 저자가 된다는 것이다. 필립 르죈의 논리에 기대면, 김구용의 시 텍스트들과 일기는 김구용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다. 
 그동안 김구용에 관한 연구는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난 사상에 대한 연구, 그의 시적 사조에 대한 연구, 주제론적 연구, 표상 연구, 비교문학적 연구 등이 이루어졌다. 
 그의 시에 나타난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는 주로 동양사상과 서양철학의 종합이라는 관점에서 김구용 시의 난해성, 독자성 등을 추출해내는 방식을 취해왔다. 특히 임우기의 연구는 김구용 시에 나타나는 불가적 주제의식을 그동안 논의되어 온 ‘불이(不二)’보다 상위개념인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찾아내고 있다. 김구용 시의 불가적 주제의식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의의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김구용의 동양사상을 지나치게 경전 해석의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한 점은 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일기에서 김구용은 경전의 해석보다 모든 사람이 부처고, 자기 안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자신불(自身佛)을 더 강조했으니 말이다. 
 그의 시적 사조는 광의의 모더니즘, 혹은 초현실주의로 정리되어왔다. 산문시 지향, 시와 소설의 장르 혼합 양상 등 그의 시적 스타일도 이 사조적 관심 하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박선영은 김구용 시의 ‘입체성’에 대해 주목했다. 그녀의 연구는 김구용 시에 대해 “영상의 다면을 각양각태”로 드러낸 것으로 평가한 서정주의 시각을 더 정교한 이론으로 가다듬은 것으로 여겨진다. 후술하겠지만 김구용 시의 입체성, 다면성, 혹은 다성성은 그의 일기 쓰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구용 시의 주제는 주로 한국전쟁과의 관련성 속에서 추출되어왔다. 분열증적 주체와 거기에서 촉발된 자아 탐구 등은 김구용 시의 주제로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특히 이수명은 김구용 시에 나타난 타자를 “헐벗고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면서 레비나스의 이론에 입각하여 타자를 수용하는 주체의 윤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외에도 물, 꽃, 거울, 어머니 등 김구용 시의 표상에 관한 관심, 이상(李箱) 시와의 관련 양상에 대한 관심 등이 있었다.
 김구용 시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몇 사람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여전히 전기적 고찰이 충분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김구용과 그의 시에 대한 전기적 점검, 일기와 시의 관계, 일기 자체의 문학적 의의 등 김구용 문학의 전체적인 형성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그의 일기에 대한 검토를 늦출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1950년대까지의 그의 일기를 중심으로 그의 문학적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기까지 그는 확실한 직장도 없이 문필을 주된 생계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자기 스타일을 찾기 위해 부단히 모색했다. 이 시기가 그의 문학세계에 있어 한 모색기가 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물론 1960년 이후의 일기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2. 자기점검의 장치로서의 일기와 ‘어머니’ 표상

 전집판 김구용의 일기는 1940년 2월 24일자로 시작된다(김구용은 1922년생이므로 열여덟 살 무렵임). 그 중에서도 해방 전의 일기는 1939년 아버지의 죽음 이래 공주로 나와 살면서 쓴 것들과 1940년 7월 1일 입산하여 동학사에 머물면서 쓴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2월 26일자 일기에는 “사람들은 자신이 괴상한 팔자를 타고났다고 생각하기 쉽다. 언제고 나도 자서전을 쓰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진술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을 요약하여 일기에 옮기면서 자신의 기억과 비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진술의 욕망은 그의 병약한 체질과 잦은 요양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한 탓에 어머니와 떨어져 강원도 철원군 월정 근처에 살던 유모 삼마의 집에서 컸다. 그리고 수시로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치병 요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940년 6월 14일은 아버지 탈상이었는데, 그는 탈상의 소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나 같지가 않다. 없어진 나를 느꼈다. 그런데 나는 울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진술 이외에도 일기를 살펴보면, 몸이 안 좋거나 날씨가 아주 궂지 않는 한 그는 매일 아버지의 산소를 둘러보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차지하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유추할 수 있다. 병약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남겨진 그 역시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무서워하는가. 무서워하는 한 이승에 낙원은 없을 것이다.”(1940.3.8)라고 그는 적었다. 그 외에도 그는 “문학과 장수를 바란다.”(1940.5.10)라든지 “머리가 아프다. 죽음은 편안할 것이다.”(6.26), “어제 과로했나 보다. 몸이 개운치 않다.”(7.22)처럼 건강과 병, 죽음 등에 대해 자주 썼다.
 자기진술에 대한 욕망은 그로 하여금 문학을 지망하게 했다. “밤에 집안사람들은 내가 문학을 하겠다는 데 반대했다. 나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40.3.13)고 그는 썼다. 임꺽정, 토마스 만 단편집, 군도, 안나 카레니나, 레 미제라블, 홍루몽 등을 읽었다고 그는 일기에서 밝혔다. 또 이 시기 그는 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문학청년의 일기」와 서사시 「백화와 그 선생」이라는 작품을 쓰고 있었다. 1940년의 일기 중 「문학청년의 일기」와 「백화와 그 선생」은 대략 12회 정도 언급되어 있다. 이들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이 이 시기 일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일기는 허영이 아니다.”(5.12), “일기는 감시며 고통이며 책임이다.”(5.13)라고 쓴 바 있는 김구용인 만큼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습작 과정을 규율하고 독려하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습작은 결과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중단된다. “「백화와 그 선생」도 「문학청년의 일기」도 마음대로 써지지가 않는다. 건강을 잃은 것 같다. 이러다가는 이대로 끝장이 날 것만 같다.[…]이런 무리는 참다운 의욕이 아니다. 병이 나에게 이런 무리를 시키는 모양이다.”(4.11)라고 그는 적고 있다. 습작의 이와 같은 실패는 비일비재한 일이기 때문에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닌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시기 김구용의 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시에 나타난 ‘어머니 표상’이 어떤 궤적을 그리면서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가) “내, 초열흘께 꼭 올게.” “가방도 빗도 다 두고 간다.” “들어가거라, 백지(괜히) 나와쌀 것 없다.” “내야 괜찮다. 속히 들어가거라.” 나는 돌아섰을 때 치미는 슬픔에 당황하였다. 가다가 돌아보고 가다가 돌아보았다. 어머님은 여전히 비석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석봉 동네 앞길을 틀어 돌면 백정자가 안 보인다. 돌아보았다. 아득하다. 하얀 옷을 입은 어머님이 나를 향하고 계신다. 내 팔자는 고독인가 보다. 이 고독에서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7.6)
(나) “저것 보래. 나무도 열매가 많으면 저리 꺾일 듯이 굽었네. 사람도 자식이 여럿이면, 저 나무매로 무겁고 고생이 많은가 보다.”
 어머님은 말씀과는 반대로 활짝 웃고 계셨다. 언젠가 어머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전에 어린 자식들을 죽 눕혀놓고 보니, 이 세상에 무슨 꽃이 좋네좋네 해도, 자식같이 좋은 꽃은 없더라. 자식 두고 살러가는 년은 사람이 아니제.”
 나는 그때 말씀이 생각났다. 깨독나무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가 많이 열려 있었다.(7.12)
(다) 그 대신 나는 원색 사진 수야방애(狩野芳崖)의 「자모관음(慈母觀音)」(부인구락부부록으로 나왔던 것) 족자와 역시 원색 사진인 방애의 부동명왕을 한데 말아서 들었던 터라, 젖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백지로 여러 겹 싸 왔고, 우산대 안으로 깊숙이 넣었기 때문에, 조금도 젖지 않았다.(7.1)

 우선 (나)가 동학사 아래 계곡의 깨독나무들을 보며 모자가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보는 바와 같다. (나)가 김구용의 시 「깨독나무」(1953)에 이어져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7월 12일자 일기에서 그는 깨독나무의 이름도 모른 상태에서 어머니에게 깨독나무의 이름을 듣고, 머리에 바르면 이가 슬지 않는다고 하는 깨독나무의 효능에 대해서도 배운다. 그리고 깨독나무에 자식이 많은 집의 사정을 빗대고 있는 (나)의 장면이 이어진다. 그는 이 생소한 나무를 두고 어머니가 들려주신 모성애가 가득한 이야기를 그날의 일기에 적어둠으로써 오래 기억하려고 했다. 이 일기의 기억을 토대로 전쟁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깨독나무」를 쓰게 된 것이다. 
 (가)는 그가 수양을 위해 동학사로 들어갈 때 따라온 어머니가 아들을 두고 하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있기 전인 7월 5일자 일기에는 그가 어머니에게 불손한 말을 해서 어머니를 슬프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6일 아침 어머니는 속이 좋지 않다며, 조반도 거른 채 하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그는 더 애틋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는 자상한 어머니, 인고하는 어머니로 비쳤을 것이다. 어머니는 동학사로 돌아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전송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그는 (가)와 같이 인상 깊게 그려놓았다. 특히 “하얀 옷을 입은 어머니”라고 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상정하여 「꿈의 이상」(1958.12~1959.2)을 쓴 바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그는 오렌지를 훔쳐서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자신을 구해준 여성이 ‘흰 옷’을 입고 있었다고 썼다. 그리고 다시 이 ‘흰 옷의 여인’을 ‘백의관세음보살’과 오버 랩시켰다. 
 하얀 옷의 어머니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의 변주가 (가)의 주제였다면, 「꿈의 이상」은 이 변주에 다시 ‘관음보살’이라고 하는 종교적 의장을 추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변주는 사실 (다)를 참조할 수도 있다. 김구용은 동학사에 들어가면서 가노 호가이(狩野芳崖)의 ‘비모관음(悲母觀音)’과 ‘부동명왕(不動明王)’을 가지고 가서 방에 걸어두었다. 이 ‘비모관음’은 부인구락부에서 부록으로 준 모조품이었음이 (다)에 드러나 있다. 어머니가 부인구락부를 구독하고 있었으리라는 유추가 가능한 대목이다. 모조품일망정 그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건네준 물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학사의 승방에 이 ‘비모관음’을 걸어둔 채 두고두고 보았을 것이다. 이 ‘비모관음’에 대한 김구용의 애착은 그동안 전혀 언급된 바 없다. 그러나 ‘어머니-백의의 여인-관세음보살’로 이어지는 계열체의 성립에 대한 근거는 이 ‘비모관음’을 통해서 더 확고해질 것이다. 사실 불화에서 관음보살은 ‘남성’으로 그려지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이 관음보살을 ‘어머니[悲母]’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김구용의 시에서 관음보살은 여성으로 일관되게 그려진다.
 김구용에게 동학사는 흔히 징용을 피하기 위해 들어간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기를 일별하여 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6월 23일자 일기에서 동학사의 주지가 김구용이 입산한 목적을 ‘수양’으로 규정하고 있음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학에 정진하기 위해 입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열아홉 살의 그가 이미 불교에 친숙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나는 전생에 스님이었을까.”(3.21)라고 썼을 정도다. 그는 불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고 가노 호가이의 불교적 색채가 강한 그림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불교문화에 익숙했다. 해방 전 그의 일기는 이러한 그의 정체성과 향후 그의 시 세계의 원풍경들을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드러내 보여준다.

3. 주제의식의 심화와 문예물로서의 일기

 해방기 김구용 일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해볼 수 있다. 불교관의 심화, 해방기의 정치의식과 세태에 대한 비판의식, 문학적 수련 과정이 그것이다. 
 우선 동학사에 들어간 지 5년여의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김구용의 불교관이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종교인가. 아닌 것만 같다. 종교에 대한 재인식이 있어야 할지 모른다. 사찰은 종교적이다. 불교는 인생 문제에 불과한 것 같다. 종교라면 별로 흥미가 없다. 부처님은 분명 석가라는 사람이었다. 불경은 그가 이룬 예술이며 인생이며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궁금했던 것, 미처 몰랐던 것, 상상도 못했던 것을 듣고 보았다. 필요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1946(1))
 모든 종교의 공통된 특색은 이단을 미워하는 데 있다. 옳을지라도 그만큼 편협하였다.[…]불교는 이단을 두지 않았는데 그러고도 종교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불교에 관한 한, 말할 수가 있으며 스스로 실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불교라고 할지라도 불이 문제일 뿐 교는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였다. 중생제도니 위법망구가 불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불은 사람들의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닐까.(1947(1))

 김구용의 집안은 원래 불교를 상당히 숭상했다. 어머니는 평소에 금강경을 다 외우셨고 고모도 그것을 본받아 금강경을 외우려고 했지만 병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1949.7.11). 아버지 역시 밤이면 간혹 한역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한문 ‘관음찬’을 외우셨다고 그는 쓰고 있다(1948.12.23). 그리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도 거사계를 받으려고 한 적이 있다(1947(2)). 
 해방 전의 일기에서도 그는 불교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피력한 바 있지만(1940.3.20), 해방기의 일기에서는 불교에 대한 성찰이 더 사변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부정하고 ‘자신불’, 깨달음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 대해서도 그는 진리가 변하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오늘날 설법을 한다면 과거의 경전과 반드시 같은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작에도 일관성 있게 관철되었다. 그의 장시들이 산문(山門)이 아니라 세속에서 자기[眞我]를 찾는 과정을 그렸다거나 송백팔(1982) 등의 시집이 ‘불이(不二)’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다. 그의 시에 나타난 불교의 영향에 대해 논한 논문들은 많지만, 그의 시가 종교와는 구분되는 불(佛), 교(敎)가 아닌 불(佛)의 시라는 점에 대해 일기를 토대로 논구한 글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해방기의 일기에서 김구용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은 하지 않았다. “북선은 6할이 민주주의요, 남선은 8할이 공산주의라니, 사실이라면 알다가도 모를 소리다.”(1947(1)) 정도의 기술이 전부다. 그보다는 해방 후 민족분열로 인한 환멸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해방이 됐는데 어째서 모두 다 목이 터지도록 자유를 부르짖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분열이 해방일 수는 없다. 필요는 간단명료한데 골육상쟁이 계속된다.”(1946(1)) “경비대, 대동 청년단, 민족 청년단, 서북 청년단 간에도 알력이 심하다고 들었다.[…]민족을 위한 나라였다. 싸움을 위한 해방이었다.”(1947(2)) 그가 신천지에 시를 발표한 경위에 대해 김동리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김윤식은 “김동리 측 신인들 시의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조혼>(신천지, 1950.1)에 이르러 발현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이는 조금 성급한 해석이다. 김동리가 신인들에게 강렬한 이데올로기를 요구했는지부터가 조금 의심스럽다. 김구용의 일기에 의하면 김동리는 김춘수를 좋은 시인으로 거론하면서 “충격적인 사상”이 기교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1949.6.6). 이 “충격적인 사상”이 정치 이데올로기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김구용 역시 김동리의 충고를 정치적 노선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김구용은 ‘여순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데올로기 문제만큼은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낮에 윷놀이판에서 들리던 ‘삼팔선’ 노래가 생각난다. 무심히 들었었다. 그런데 왜 다시 생각나는 것일까. 조금 전에 묵 형 방에서 본 LIFE 잡지 때문인 것 같다. 서두는 “Revolt in Korea”였다. 여수 사건 사진이 여러 장 나와 있었다. 총탄 구멍이 뻥뻥 뚫린 몸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 거적 밑으로 뻗어 나온 다리들, 땅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우는 아낙네, 아이들 뒤에 서서 굽어보는 미군의 측은한 표정, 그런 장면들이었다. 연달아 책장을 넘겼다. 큰 사진이 나타난다. 흐늘어진 꽃가지를 잡고 여울물에 서 있는 미국 아가씨는 전신 나체이다.(1949.1.30)
 백화점 2층에서 여수 순천 사건 사진전을 봤다.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 죽일 수 있을까.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분노보다 비애가 앞선다. 시체 앞에서 땅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 부인, 그 뒤에 서서 이 광경을 응시하는 미군, 산방이 그리웠다.(1949.3.3)

 인용한 부분에서 공히 그가 미군을 관망자적 위치에 두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것을 우파 이데올로기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 태도는 그가 해방 이후에도 줄곧 산방에 머물면서 일반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구용은 신탁통치에 대해서만은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일은 아무리 이해하려도 알 수가 없었다.”(1947(2))라고 그는 썼다. 반탁에 대해서만은 우파의 노선과 일치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그의 정치적 입장을 확정할 수는 없다. 
 김구용은 백범 김구를 공주에서 한 번 만나 글씨를 한 점 청하여 얻기도 했고, 김구 서거 때는 장례식 정경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일기에 썼다. 또한 조시인 「님이여―오호 백범 선생」(1949)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나 백범의 인간적 풍모를 그리는 데 그친 감이 있다. 반탁·좌우합작을 위한 백범의 노력 등에 대한 언급이 일기에 없는 것을 보면, 그가 현실 정치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불교나 문학만큼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문학적 수련 과정에 대해서는 해방기 일기에서도 김구용은 문학청년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작품을 쓰는 일이 갈수록 어려움을 느낀다면 결국은 어찌 될까.”, “정열이 작업을 방해했다.”(1947(2)) 하는 식이다. 문학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속세를 벗어나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적기도 했다. “산속에 들어온 지도 10년이 가깝다. 날마다 독서하고 썼다. 나는 종소리처럼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어야 하나.”(1948.12.16) 이러한 조급증은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맞물려 그를 더욱 괴롭혔다. “하루에 원고 두 장, 독서 30분, 공부 한 시간씩 할 수 있는 그런 시간 여유가 있는 직업을 가졌으면[…]내 인생은 족할 것 같다.”(1949.2.16)고 그는 썼다.
 언제부터인가 김구용은 산사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1949년 4월 할머니 제사 때문에 하산한 그는 공주에서 구직 활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상세한 설명은 없으나 “딱한 사정을 말했으나 뜻밖에도 냉담하였다.”(1949.410)는 식의 기술이 눈에 띈다. 그 이후에도 취직 교섭이 있었으나 주선하는 측에서 차일피일 확답을 미루고 의도적으로 그를 피한 흔적이 있다(1949.4.14~21).
 이 향리에서의 구직 실패를 계기로 그는 상경하여 역경원(譯經院) 등을 드나들면서 암중모색하다가 김동리를 찾아가게 된다(6.3). 그때까지 그는 범부 김정설도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 김동리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김동리와 그 사이의 접점은 <완미설>이나 문학과 인간과 같은 김동리의 글밖에 없었다. 김동리는 일단 그의 작품이 발표할 만한 수준이라고 인정하고 예의 그 “충격적인 사상”을 담은 시를 써보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소공동 플라워 다방에서 박목월에게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6.6). 결과적으로는 김동리의 도움으로 그는 ≪신천지≫에 「산음」(1949.10) 등을 발표하게 되고, 부산에서도 김동리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런데 문학적 수련 과정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일화가 아니라 일기 쓰기 자체다. 해방기 김구용의 일기는 해방 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문학적인 기록으로 변했다. 백범과 만난 것을 그리고 있는 1946(2)의 기록은 일기라기보다 김구, 이시영 등이 등장하는 소설처럼 대화와 진술이 적절하게 섞인 채 재구성되어 있다. 1946(1)의 경우, 시작부터가 석가족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싯다르타의 삶을 극적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1946(1)의 석가모니나 예수에 대한 단상은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일기의 성격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종교론이나 수상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 날짜를 일부러 누락한 것은 아니지만 날짜가 지워진 상태에서 본 김구용의 일기는 「구곡」 연작처럼 한 편의 시에 다양한 주제를 다면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가) 자유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를 위해서인가. 태양은 빛난다. 모든 생명은 생명한다. 분열이 해방일 수는 없다. 필요는 간단명료한데 골육상쟁이 계속한다.//내가 모르는 중에 잘못을 저지른 적은 없다. 지구의 불행은 각 개인에게 미친다. 사람마다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론만으로는 운행이 되질 않았다. ‘왜냐’는 말은 비열한 유행어로 타락하였다.//사전에는 모든 말이 있으나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사전은 필요할 뿐 통독하는 사람이 없다. 사전을 처음부터 읽는 사람이 없는 한 나의 글도 매양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1946(1))
(나) 폐회로에서 돌아온 아내는/남편에게 말한다./ “정원에 가위질을 마세요.”/부모는 산천에 빌어서/나라 없는 백성을 낳았느니라./소원은 무엇인가./도마 금 같은 손바닥을 보아도/고향은 없었다./수많은 길에 밀리어/그는 앞으로 나아간다./반(半)국민은 어디에 절하나/자기 이외에……/우리의 아들 장발장은/철창 안에서 자가발전을/해치우고 편안히 잔다./청년은 미소한다./꿈에서 신의 축복을 받는다.//죽음을 다시 한 번 죽여보아라./피리는 속이 비었네./그는 출입구로 들어선다./노인은 음악빛 주택에서/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여러 가지 과일이 열린/인조수들 사이로/장렬(葬列)은 기어온다.(「2곡」부분)

 (나)는 어느 유명 인사의 장례 행렬을 중심으로 도시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표정을 다면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구곡」 연작은 대개 이런 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나)의 중심 모티프는 ‘장렬(葬列)’이고 인간 군상들의 일화는 그 배음으로써 배치된다. 이러한 조합이 시의 주제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스타일은 (가)의 일기에서 이미 선취되고 있다. (가)는 자유-‘왜냐’는 말의 타락-사전 등의 화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화제가 일상의 연속적 흐름을 반영하는 형식인 일기 속에서 서로 반향하면서 어떤 논리적인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떤 논리적 관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배치의 묘미는 (나)의 효과와 흡사하다. 
 해방기 김구용은 「백탑송」, 「조혼」과 같은 시를 쓰는 한편 일기를 통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만의 진술 방식을 수련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기에 나타난 다면적인 진술 방식의 문학성을 눈치 채지 못하고 문학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나간 일기를 다시 읽어갔던 그의 오랜 습관에 의해 이 일기의 진술 방식은 어느 날 갑자기 그만의 창작 방식으로 발현하여 하나의 개성으로 고착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4. 다방과 산방 사이에서의 헤맴

 전시기 김구용의 일기는 1951년 12월 3일자부터 1952년 7월 19일자까지 남아 있다. 이 시기의 일기는 김구용 개인의 일기기도 하지만, 전시 하 피난지 부산에서의 작가들의 일상을 가장 핍진하게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거기에는 전시 하 일반 민중의 삶 역시 여실하게 그려져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개인의 기록을 넘어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 그는 일기를 여러 매체에 발표했다. 일기에 의하면 김형식(金亨湜)이 편집장으로 있었고 자신도 관여했던 사랑의 세계, 천상병이 관여했던 신생활 등에 일기초가 발표된 것으로 나와 있다(1952.5.24; 7.16). 이쯤 되면 발표하지 않은 일기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전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 일기의 문예적 성격이 전적으로 이 ‘가능성’ 때문에 형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기가 지면화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그가 초연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전시기 그의 일기는 더 이상 산방에서 혼자 쓰는 일기가 아니라 문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임시 수도 부산의 작가들 틈에서 쓰는 기록물이었다. 소설가 허윤석과 김동리가 당신은 이야기를 잘 하니 시보다 소설을 써보라고 권한 것(1952.2.7)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장시들이 ‘서정적 자아’라기보다는 ‘다채로운 등장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이 시기 그의 일기에 다양한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를 위해 몇 번이고 직장을 알아봐준 김동리, 없는 형편에 항상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권했던 천진한 박용구, 하숙방을 같이 썼던 의리 있는 이형기, 재기발랄한 말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허백년, 사람 좋은 주정꾼 서근배, 위트가 있었던 김말봉 등의 형상은 이미 뚜렷한 ‘캐릭터’였다. 이 시기 일기의 인물묘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1955)와 직접 경쟁하고 있었다. 

(가) “정직하고야 살기 어렵지. 진실이니 지식 따위는 굶게 돼 있어.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않는 천재들일 거야. 알고 보면 양담배만 피우는 축들도 남의 돈으로 피우지, 제 재산 쌓아두고 쓰는 건 또 다른 족속들일세.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는 할망정, 탓하진 말게. 누구나 양심이 어떻다느니 진실이 뭐냐느니 하다가는 볼장 다 보네. 그들이 우리보다는 오늘날을 정확히 안단 말이야. 자넨 수단 있거든 부잣집 딸이나 UN마담이라도 하나 꿰차게. 그러는 것이 젊음의 권리요 소망이요 공상인 걸 아나. 그 쓰메에리와 병정 구두부터 벗어버리게. 친구의 신사복과 구두를 빌어 쪽 빼고서, 그럴싸한 여자가 있거든 수작을 걸어보란 말이야. 여자가 병신이건 남자보다 억세게 생겼건 간에 돈만 많으면 절 백 번하고 결혼하겠다는 게 오늘날 총각들의 꿈이네. 아마 자네도 그럴걸.”(1951.12.30)
(나) 박용구 씨가 나를 위해 동행해주었다. 거리에서 김말봉 선생을 만났다.
 “요즘 외출을 안 하시던 박 선생은 얼굴이 맑아지시고 김구용 씨는 산중에서 수도하시느라고 살이 이찌 온스 내리시구” 하며 웃는다.
 “그래 어디로들 가십니까.”
 “찾아가볼 곳이 있어서 가는 중입니다.”
 박용구 씨가 나 대신 대답했다.
 “예, 그러믄요. 막걸리 집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오래간만에 만나시면 빈대떡에도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김 선생은 언제나 능변이시다.(1952.7.7)

 (가)는 김구용의 친구 학음(鶴陰)의 달변이다. 이것이 단지 사실의 기록이라면 대단한 기억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가필이나 재구성이 없었다고는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나)의 장면 역시 김말봉의 능변을 그대로 썼다고 하더라도 김말봉의 성격을 군더더기 없이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할 수 있다. 김구용은 일기가 반드시 사실의 기록에 그치는 것은 아니고, ‘표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내 체험을 표현할 뿐이지 꼭 사실만을 기록하려고 하진 않는다.”(1952.6.15)가 그것이다. 일기로 다진 소설적 재능을 그는 소설이 아니라 그의 장시에서 십분 발휘했다.
 피난지 부산에서의 일상은 ‘다방’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부산의 다방에서는 박생광, 백영수 등의 개인전이 열리고(1952.2.17), 나는 너를 싫어한다의 필화로 구타를 당한 소설가 김광주를 위한 문단 성명서의 서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1952.2.27). 이형기의 표현대로 다방은 “문인들의 직장”(1951.12.19)이었다. 1951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한 김구용은 이듬해 1월 7일 취직 전까지 거의 원고료만으로 부산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시 한 편에 이만 원, 산문의 경우 이백 자 원고지 한 장에 이천 원씩이었다(1952.1.29). 그 교섭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금강’, ‘녹원’, ‘금잔디’ 등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겨울이지만 문자 그대로 녹원 다방 안은 춥지 않아서 손님들이 많았다. 원고청탁을 하고 담배 연기 속에 앉아 있다.”(1952.2.11) 손님이라고는 해도 차 한 잔에 천삼백 원을 못 내서 멍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담은 그 옆에 가서 무엇을 드실 거냐고 줄기차게 눈치를 주기도 했다. 당시 풀떡 하나에 백 원, 찹쌀떡 하나에 오백 원, 녹두죽 한 그릇에 천 원(1952.1.18), 자장면은 삼천 원이었다(1952.1.4). 김동리의 주선으로 군경 원호회 기관지(사랑의 세계)를 내는 곳에 취직한 김구용은 하루에 차 두 잔씩 시켜서 들고 다방에서 일하라는 상사의 명령을 듣고 차라리 현금으로 이천 원 남짓을 준다면 점심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1952.1.10). 이 시기 그의 일기에는 하숙비, 음식값, 원고료, 월급 등 생활비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해방기 일기의 ‘사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사색과 같은 것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만큼 먹고 사는 문제가 당시 그에게는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김구용이 추구하는 문학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다방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부산에서의 삶을 “악착스러운 허영의 거리에서 먹고 살기 위한 아귀였다.”고 그는 반성했다(1952.4.3). 일기를 쓰는 사람들은 일기가 곧잘 자신의 정체성을 통합해줄 것으로 믿지만, 사실 그러한 희망은 단지 희망으로 끝날 때가 많다. 그것은 일기를 쓰는 과정에서 글을 쓰는 ‘나’와 묘사되는 ‘나’가 분리되기 때문이다. 김구용 역시 이 괴리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문인으로 성공하는 방법은 사색보다도 타고난 재능에 의한 적당한 솜씨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속력 시대의 특색인가 보다. 이름난 고전치고 독자가 많을 수 없는 형편이다. 한참 어려운 세상에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며 작품들을 쓰는지 그저 고맙기만 하다(1951.12.15).
 다방에서는 원고와 고료를 맞바꾸고 있었다. 문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고료를 위해서 뭐건 쓰고 싶다(1952.1.4).
 산속에서 일기를 쓸 때는 10년이 지난 일기라야 발표하겠다던 생각도 이제 생각하니 우습기만 하다. 불과 두 달 남짓 사이에 이처럼 변했는가. 청탁도 받지 않고 일기를 베끼면서 돈이 되어줬으면 하고 바랐다(1952.2.12).

 방송용 수필(1951.12.16)이나 유명인사의 방송 원고 대필(1952.2.27) 등 쓰고 싶지 않은 글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의 고뇌를 김구용은 일기에서 자주 피력했다. 다음 날 오후 두 시까지 여름에 관한 시를 한 편 쓰라는 주문도 있었다(1952.7.8). 그는 급하게 써서 넘긴 자신의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누군가 자신의 원고를 지면에서 보았다고 하면 왠지 창피했다. 번번이 다른 문인들에게 신세만 지는 삶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밥값을 한번 내려고 하면 난리가 났다. 황순원은 그가 밥값을 내려고 하자 멱살까지 잡으며 극구 말렸다(1952.2.20). 그는 그런 선배들의 인정을 이해하면서도 괴로웠다. 선배 문인들은 그를 “숙명적인 사람”(1952.3.16), “고아 기질”(1952.3.22)이라고 평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는 그의 결벽성과 고독에 대한 감상이기도 했다. 부산에서의 이런 방황에 그는 염증을 느꼈다. 자신의 문학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삶을 청산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산이 그립다. 책들이 기다리는 산방 정창이 그리워서 못 견디겠다. 문명도 역사도 20세기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나는 뭣을 하면서 있는가. 겨우 하숙비를 벌기 위해서 기계가 되어 돌고 있다.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1952.3.26) 그러나 동학사에 돌아가서 그가 본 것은 ‘허무’뿐이었다(1952.4.3). 산사에서는 또 다시 무위도식의 생활뿐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부산에서 김구용은 반쯤은 떠돌이 신세였다. 장송사와 묘심사에 차례로 거처를 마련했지만,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는 날이 많았다. 나중에는 이형기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사랑의세계사’에서는 주로 외근을 했다. 원고를 받으러 부산 일대를 일주하곤 했다. “나는 참다운 시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찾아 헤매는 방황을 쓴다. 조금도 위대할 필요는 없다.”(1952.1.18)고 그는 썼다. 그야말로 다방과 산방 사이의 헤맴이라고 할 만한 문학과 현실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는 이 ‘헤맴’을 자기세계의 한 숙명으로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의 시가 ‘헤멤’과 ‘자아 찾기’의 과정으로 귀착된 것은 일기에서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전시기 김구용의 일기는 일반 민중의 비참한 삶을 핍진하게 기록한 증언이기도 했다. 이 기록이 1950년대 그의 시의 한 배음으로 뚜렷한 성과를 냈다는 것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참조점이 된다.

(다) 문간채 방에 들어 있는 여자는 개성서 피난 왔다. 식구라야 어린 사내아이 하나지만, 그 여자가 고급 매음부란 데는 놀랐다. 밤에 소년이 와서 기별하면 외박하러 나간다는 것이다.(1951.1.28)
(라) 몸은 조여들며 입술과 혓바닥이 타들어갔다. 그는 몸부림치며 구원을 불렀다. 누가 흔들기에 눈도 뜰 사이 없이 물을 받아 마시었다. 감로수였다. 조그만 창은 새벽빛이었다. LIFE 잡지를 뜯어 바른 벽이 아스무레 나타나고, 한기가 들어서 놀랐다./ 벽 너머 바깥에서 어린것이 엄마를 부른다.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빈상으로 생긴 여자는 그가 벽인 줄만 알았던 문을 열었다. 길바닥에서 넝마를 입은 어린것이 벌벌 떨며 들어와 눈치를 살금살금 보았다.(<벗은 노예>부분)

 (라)(1954년작)는 어린아이가 딸린 매음녀를 모티프로 하고 있는 김구용의 시다. 이는 (다)를 토대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에서 매음부는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라)에서는 윤리 너머의 동정과 이해가 개입되어 있다. (다)는 김구용이 부산으로 가던 중 대구에 들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부산에 가서 그가 본 것은 훨씬 더 끔찍한 것들이었다. 물질이 정신을 황폐하게 하고, 인간을 기계의 부품으로 만들어버리는 풍토였다. 인간성의 일부가 망가진 인간들의 비참한 형상을 그는 거기서 목격했다. 그것은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참상이었다. 이 비참한 자들은 이수명이 레비나스를 원용하면서 말한 ‘절대적 타자’가 아니다. 김구용이 이 비참한 자들을 제도(濟度)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주체-타자’의 이자 관계 속에서 비참한 자들을 ‘판단’하지 않았다. 비참한 자들은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나’다. ‘나’ 역시 비참하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을 훔쳐간 Y에 대해 Y가 나쁜 것은 아니며 자신도 Y처럼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1952.6.19). (라)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가 ‘얼굴’로서 현현하는 것이 아니다. ‘매음녀’의 ‘빈상’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겁에 질린 아이, 어머니를 보고 있는 아이가 중요하다.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얼굴이 아니라 타자를 보고 있는 또 다른 타자를 보아야 한다.
 한겨울에 아래옷을 벗고 앉아 있는 40세 남짓한 거지, 차도 한가운데서 국부를 드러내놓고 있는 미친 여자, 금잔디 다방 마담 최기현의 자살을 위시한 문화인들의 자살과 죽음, 각종 스캔들, 이 모든 소란은 이미 선악과 같은 윤리의 문제를 넘어선 삶과 죽음을 에워싼 실존의 문제였다. 그 속에서 김구용은 자기를 찾아, 진짜 시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그러면서도 일제에게 나라를 되찾았기 때문에 전란의 피폐한 현실에서도 인심을 찾을 수 있다고 그는 되뇌었다(1952.1.23).  

5. 소결

 김구용은 194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기를 써서 후대에 남긴다. 1939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는 자기진술의 충동을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한 체질로 인해 사찰 등을 전전하면서 그는 자신의 운명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 차이에 대한 발견이 그를 문학으로 이끈 셈이다. 그는 1940년 7월 1일 입산하여 동학사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문학 수련을 한다. 이 시기 그는 「문학청년의 일기」와 서사시 「백화와 그 선생」을 습작하지만, 모두 중도반단 된다. 이때까지 그의 일기는 습작 과정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일기를 쓰면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시적 주제와 모티프들을 형성·발전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 표상’은 어머니와의 일화와 불가의 관음상을 종합하면서 발전했음을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일기는 추억 속 이미지의 편린(‘흰 옷’)이 어떻게 다른 사물들과 결합하여 변형되는지 그 기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학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입산한 지 5년이 경과하여 해방이 된 뒤 그의 일기에서는 사상으로서의 불(佛)에 대한 이해가 심화하고 해방기 사회의 난맥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엿보인다. 그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부정하고 ‘자신불’, 깨달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후일 그의 시적 주제인 자기 찾기나 ‘불이(不二)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의 정치적 스탠스에 대해서는 그동안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우파에 가까운 것으로 논의되곤 했으나, 일기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인간 이해가 오히려 두드러진다. 그가 해방기 사교계에 등장했을 때(1949.10)는 이미 문단 내 좌우 진영이 성립하여 고착화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그가 우파 단체에서 어떤 역할을 맡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해방기 김구용의 일기는 일층 문학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인물들 간의 대화 등 극적 장치가 개입하고, 다면적인 화제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김구용 특유의 진술방식이 성립한다.
 전시기 김구용은 어머니를 여의고 부산에서 새롭게 형성된 문단으로 향한다. 생활 기반이 없던 그는 선배 문인들의 도움으로 직장을 구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전시기 그의 일기에는 부산의 문단이 ‘다방’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양상이 잘 그려져 있다. 기성 문인들에 대한 그의 인물묘사는 소설의 ‘성격화’에 비견할 만큼 생생한 것이었다. 그는 일기를 지상에 발표하면서 그의 일기가 사실의 기록을 넘어선 ‘표현’이 되도록 신경 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쓰고 싶지 않은 글이나 급하게 쓴 태작을 발표하면서 자기 문학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그는 일기에 드러내기도 한다. “악착스러운 허영의 거리”에서 먹고 살기 위해 헤매고 다니는 일상 속에서 그는 이 ‘헤맴’을 자기 시의 숙명으로서 인지한다.
 전시기 그의 일기에는 당시 기층민들의 삶의 애환, 가난의 양상, 정신의 파괴와 같은 것들도 그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기 그의 일기가 이 실존적 위기를 개인의 차원에서 한 번, 그리고 민족·민중의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이중으로 증언을 하고 있는 소중한 기록이라는 점은 강조해둘 만하다.
 이 글은 김구용의 일기를 통해 김구용 문학 세계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선 전시기의 일기까지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일기 자체의 진술방식―인물 조형과 대화체, 다면적 화제의 배치, 등―과 김구용 시의 진술방식의 관계, 일기에 나타난 그의 사상적 주제의 심화 과정, 일기의 기록과 시적 모티프의 관련 양상, 전시기 그의 교우 관계나 현실인식 등을 점검했다. 그러나 일기의 기록을 김구용의 전반적인 시와 비교하여 그 사례를 풍부하게 조사해내지는 못했다. 그것은 이 연구가 일기를 중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1960년대 김구용의 일기는 지면관계상 다루지 못했으나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연구해보고 싶다.


*장이지 :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비평집으로 환대의 공간, 번역서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東浩紀) 등이 있음. 제2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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