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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특집2/오채운/그늘 혹은 그림자에 대한 집착 - 하두자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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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486회 작성일 15-07-0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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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운

그늘 혹은 그림자에 대한 집착


이번에 리토피아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하두자 시인의 신작시 10편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일에 집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그 형식은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낭떠러지에서 떠밀리기를 원하거나(「청사포에서」), 누군가 절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거나(「떠도는 섬에 관한 변명」), 허튼 소리에 하얗게 삭아 내리는 너를 발견하거나(「증발의 방식」), 사라지는 속도를 배웅하고 꼭꼭 숨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꼭, 꼭, 숨바꼭질」)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하두자 시인의 사라짐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그 의미는 반어적 측면에서 드러난다.

반쯤은 열어 놓은 바다가 있지/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는/두 개의 섬//낯선 곳에서부터/먼 바다로부터/물길 가득한 경계를 지우고 왔지//살아서 마주치는/붉은 혹은 푸른 그리움을/내려놓지 못하고 떠돌다 잃어버린/저녁나절//마음의 뿌리는 늘 젖은 채로/길을 내고 있었지/우린 푸른 혹은 붉은 섬을 사랑했지만/사실 우리들의 아름다운 끝은 거기쯤,//누가 절벽 꼭대기에서 이름을 부르나요?/앞 다투어 자리를 바꾸던 어둠의 지느러미에/슬쩍 마음 뺏긴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나도 누군가의 섬이 되어/넘치는 거품들만 머물 수 있는,/한 방울 거품이라도 품을 수 있을까/불안한 가장자리 끝, 닳을 수 있을까//파도만 줍는다
- 「떠도는 섬에 관한 변명」

이 시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인간들의 관계는 마치 섬처럼 모두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섬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등을 보이며 살아야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지만 단순히 등을 보이고만 있지는 않다. 등을 쓰다듬는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등을 보여야만 하는 운명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자신들을 갈라놓는 경계를 지우고자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물이라는 액성이미지가 원형적 의미로서 정화, 순수, 생명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물은 인간을 서로 연결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간을 갈라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갈라져서 외로운 인간들의 외로움 혹은 그리움은 저마다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고 시인은 인간들이 이러한 그리움들을 서로 인정하며 사랑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다.
등을 보인 인간끼리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본성이며 한계인 이유는 그 그리움이 인간을 위기의 끝에 서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서로를 부르는 모습은 절벽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위기의 순간을 맞게 한다. 또한 상대에게 다가간다 하여도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영원히 섬으로 떠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화자는 섬으로 머문다 해도 단절된 섬이 아니라 누군가의 섬이 되고 싶은 마음을 내보인다. 누군가에게 소유가 됨으로써 그 존재가 성립되는 관계지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단절되어 있는 인간들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시라 할 수 있다. 다른 섬을 향해 다가가려 애쓰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물거품이 비록 물거품으로 끝난다 해도 ‘다가감’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내고 있다.

눈은 내려/가만가만 내려/따뜻한 식탁이, 잦은 폭설에 갇힌//펄펄 끓는 물에 하얀 국수를 삶아 건져 올려/차가운 물에 헹궈 소반에 올려 놓고//저 먼 길, 길을 내어 타박타박/떠나고 싶었어/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어//잘 우려낸 달큰한 멸치장국에/양념장을 곁들여 내는/잔치, 잔치 국수가 무럭무럭 수증기를 떠 올릴 때//풀풀 날아다니는 흰나비 떼/눈은 거침없이 내리고/저리도 서러운 몸짓으로 부딪치는데//노오란 지단과 하얀 지단 채 썰어 올려놓고/더운 국물 국자로 퍼서 한 사발 말아 올리면/거짓말처럼 어우러지는 배고프고 추운 것들의 아우성//하늘은 잿빛으로 기울어 어둑한 오후를 넘어가고/창문으로 몰리는 흐릿흐릿한 눈발/낭자하게 차오르는 하얀 피가 눈을 찔러//눈발에 묻혀가는 저 발자국 따라/기울어 가는, 목이 멘 마음/날개를 버리고 날아가고 싶었다고 그러나//쉿, 말하자 마 그리고 묻거들랑/잘못 들었다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줘
- 「가만가만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려」

이 시에서 화자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런 화자의 따뜻한 식탁에 차가운 눈이 내린다. 그 차가움은 외부와의 단절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의 온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화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차가운 온도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을 내보이는데 그 태도는 오히려 반어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떠나고 싶으면서도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떠나고 싶은 마음과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고 싶거나 사라지고 싶다는 화자의 속삭임은 존재하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더군다나 준비하는 음식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을 한 자리에 초대하는 잔치국수인 바에야 오히려 화자가 많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 잔치국수 위에 올려놓는 화려한 고명은 화자의 내면에 숨어 있는 설렘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설렘은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서 발생한 것이다.
화자의 이런 이중적 마음과는 상관없이 외부와의 단절은 계속되어 화자는 내리는 눈을 ‘흰나비 떼’로 인식한다. 나비는 따뜻함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므로 여기서 화자의 마음이 차가운 눈보다는 따뜻한 봄날의 나비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화자가 끓여내는 뜨거운 멸치장국이 내포하고 있는 마음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가 바라보는 눈은 거침없지만 거침없는 만큼 ‘서러운 몸짓’으로 인식된다. 
화자가 가지는 이 서러움은 묘하게도 사람을 기다릴 때의 설렘과 만났을 때의 열정과 어우러지면서 그 간절함을 더하게 된다. 그러나 화자의 바람과는 달리 사람은 나타나지 않기에 화자는 하루를 기다림으로 마감하고 내리는 눈은 흐르는 눈물이 되고 흐르는 눈물은 다시 핏물로 변주가 된다. 
사람들은 오히려 화자에게서 떠나가고 화자의 외로움은 더해간다. 이에 화자의 마음은 떠나가는 사람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마음으로 더 충만해진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한 화자의 태도 때문에 그 외로움과 간절함은 더욱 깊어진다.
사실은 그 옆에 존재하고 싶으면서도 사라지거나 없어지겠다는 화자의 반어는 「벚꽃 또는 분분한 오해에 관하여」에서 모두들 그림자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상황에서 혼자서만 그늘 밖으로 밀려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나는 벚꽃 그늘 밖으로 자꾸 미끄러지고’에서 드러나듯이 화자가 다른 사람에게 스며들거나 기대려고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수차례 벚꽃 그늘에 스며들려하고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그늘 속으로 슬쩍 밀어 넣어 볼까요’에서 ‘슬쩍’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 말 때문에 누군가에게 스며들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오히려 더 간절해 보인다.
타인에게서 밀려난 화자의 심정은 「수족관, 어류도감」에 오면 그 상실감을 더해간다. ‘수조에서 퇴출되어버린 황량한 아가리를 벌리고’에서도 드러나듯이 화자는 삶의 공간에서 완전히 내쫓겨버린 심정을 느끼게 된다. 내쫓긴 자의 절규는 ‘황량’하리만치 넓고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나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아가리만 벌리고’ 있을 정도로 소외에 대한 충격은 크다.

저장 파일을 열어 그림자를 엿본다/창에 비쳐본다 이제부터 거울을 난간에 걸어 둘 것이다/너의 흔적들과 함께/거울 속에 너무 오래 머물 생각은 없다//그림자는 어디에서 왔을까/누구를 위한 볼록거울이었을까//거울 속에서 끌려오다 흩어지는 뜬소문에/그림자는 더 무거워지고/그림자는 더 깊어가고//저장파일 속으로 또 다른 당신과 나를/깊숙이 집어넣는다
- 「엿보다」에서

타인에게 다가가고 싶은 화자의 마음은 이 시에서도 간절하다. 화자가 타인과의 관계에 이토록 연연하는 것은 그가 잡을 수 있는 것이 타인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하두자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화자가 ‘당신’이 아닌 ‘당신의 그늘’이나 ‘그림자’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을 직접 발설하지 못하고 그 ‘주변’에 맴돌고 있는 화자의 조심스런 태도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은 화자의 간절함을 배가시킨다. 
이 시에서는 화자가 당신의 그림자에 집착하는 행위가 자아의 발견과 동일시된다. 그림자를 엿보는 행위는 결국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춰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그 집착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된다. 또한 ‘그림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누구를 위한 볼록거울이었을까’에서 알 수 있듯이 엿보는 행위는 근원을 따져 묻는 행위로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이러한 집착 때문에 ‘그림자는 더 무거워지고 깊어가게’ 되는데 이는 그 그림자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닌 화자 자신의 것으로 변이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화자가 당신의 그림자를 거울 안에 집어넣고 관찰하는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묻고 자신의 근원을 반추해 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화자의 타인에 대한 집착은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집약된다. 이는 타인이 있어야만 자신이 존재하는 관계지향성 자아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하두자 시인의 시적 발상은 서로 단절되어 있는 인간관계를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단절되어 있는 만큼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 또한 강한 것이다. 그러나 하두자 시인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루하루를 위기의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하두자 시인의 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것이 아무리 위험한 일, 즉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따뜻함’이라는 방법으로 타인을 향해 과감한 한 발을 내딛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 한 걸음의 시도를 통해 인간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채운 :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2004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현재 한양대학교 강사. 시집 모래를 먹고 자라는 나무, 저서 현대시와 신체의 은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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