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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특선/김동호/저승사자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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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김동호
저승사자
저승사자 신사이다
예고 없이 나타나는 일 없다
방 앞에 와서도
정중하게 노크하고 들어온다
저 세상 데려갈 때도
그냥 무자비하게 데려가지 않는다
여러 사정 들어보고 데려간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 보았다
뒤늦게 달려온 아들딸들이
‘엄마’ ‘엄마‘ 울부짖자
출발하려던 발길 멈추고
사흘간을 가다렸다
그들의 속울음 멎을 때까지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의 옷
검정 옷 입지 않았다
물결무늬 무색옷을 입고 있었다
적으면 다 아름답다
적으면 다 아름답다
남자가 적으면 남자가 아름답다
여자가 적으면 여자가 아름답다
구름이 적으면 구름이 아름답고
사막이 적으면 사막이 아름답다
독사의 독도 재벌의 돈도
적으면 적으면 적으면 아름답다
잔소리도 적으면 아름답다
남자들만 사는 집 청소부 아줌마
좁쌀망구 잔소리 욕하는 사람 없다
못난이도 적으면 아름답다
못난이 삼형제
이쁜이들 사이에서 인기 높다
술을 좋아하는 이유
돈과 술은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술은 술술 속 잘 털어놓는데
돈은 앙- 입 다물고
절대로 속 열어주지 않는다
찬물 한 바가지
팔십 老木이
不惑의 꽃에게 폭 빠져
천방지축 헤맬 때의 일이다
금싸라기 같기도 하고
쇠붙이 쓰레기 같기도 한
무거운 자루 하나를 어깨에 메고
못 가는 데 없이
쏘다니는 꿈을 꾸었다
어떤 파티에선 개망신을 당했다
가족모임에선 쫓겨나기도 했다
가까운 친구들도 표정이 이상했다
된통 얻어맞고 깨어난 아침
찬물 한 바가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찬물
뼈 속까지 저리게 하는 석간수
그 물맛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연줄
얼음-대륙을 끊임없이 깨서
숨통을 트고 있는
남극 바다의 물-곰을
북극 대륙의 한 곰이
남이섬만한 얼음-섬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음의 연을 날리고 있다
“저 노역, 고역일까 희열일까“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
연-날리기가 한창이겠지만
이렇게 긴 緣줄을 보긴 처음이다
시작메모
<시, 의미의 陰影>
TV에서 남극의 한 풍경을 비춰주고 있다. 물속에 사는 바다 곰들이 끊임없이 머리 위의 얼음대륙을 깨서 숨통을 트는 장면이다. 체온에 맞는 따뜻 시원한 수온에 무진장한 먹이-- 물속은 물속대로 살맛나는 곳이겠지만 물 밖 또한 얼마나 살맛나게 하는 곳인가. 상쾌한 공기 맛있는 공기를 가슴 활짝 열고 한껏 마시는 맛, 그 맛이 보통 맛인가. 얼음 깨는 노고 있지만 축복 아닌가.
얼마 전에 보았던 북극곰의 한 장면이 뒤따라 떠오른다. 쪽-섬 얼음덩어리에 올라앉은 한 백곰이 물끄러미 하늘을 보며 연신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다. 남극의 곰들 뛰어오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뒤이어 또 하나의 겨울 풍경이 떠오른다. 얼음이 뒤덮인 설야에서 아이들이 연날리기 하는 장면이다. 추운 날씨인데도 아이들은 신나게 연을 날리고 있다. 긴 꼬리들을 흔들며 하늘로 올라가는 龍들이 장관이다.
문득 세 장면이 한 장면으로 합친다. 하늘 높이 올라가는 연을 잡고 있는 가느댕댕한 연
끈과 남극 곰에 닿아 있는 북극곰의 먼 눈길, 불가시의 緣줄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는 의미의 그늘이란 생각을 해본다.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무늬 같은 것, 물결무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시지만 말로 말고 그림으로도 말고 그림의 그림자로 밝혀내는 것이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옛날에 썼던 시 한 편을 떠올리며.
오전에는 내가 그를 따라갔지
오전에는 내가 그를 따라갔지
오후에는 그가 나를 따라왔지
점점 커지는 그는
뒤로부터 나를 꼭 껴안았지
눈을 뜨면 둘이지만
눈을 감으면 하나가 되는 우리
마침내 동산만큼 커진 그는
지평선까지 닿는 듯 하더니
훌컥 세상을 삼켜버렸지
빛으로 내가
이 만큼 커본적이 있던가
빛으로 내가
이 만큼 따뜻해본적이 있던가
빛으로 내가
이 만큼 깊은 날개를 달아본적이 있던가
*김동호 : 1934 충북 괴산 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바다, 꽃, 피뢰침 숲 속에서, 詩山 일기, 老子의 산, 나는 네가 좋다, 壺壺의 집, 나의 뮤즈에게, 오현금. 성균문학상 수상.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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