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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특선/서윤후/눈치의 공감각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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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서윤후
눈치의 공감각
농아원의 아이들이 머뭇거리는 것은 가장 수다스러워졌다는 뜻, 곁눈질 너머로 담을 넘는 따옴표들이 오간다 창문 너머 막 내리기 시작한 눈처럼 쉽게 쌓이거나 쉽게 녹는 온도의 수다, 눈사람을 오랫동안 가질 수 없듯 하늘이 내려준 것을 별로 갖지 못했다 옆 사람을 정확히 바라보는 안경이라면 모를까, 입술에 머무른 말들을 먼저 들으면서 쓴 아이들의 사전은 점점 두꺼워지고 그것은 아무도 펼칠 수 없다 몇 분씩 빠른 손목시계를 차고 조금 일찍 깨진 무릎, 접질린 소리들이 꽁꽁 언 귀 앞에서 자꾸 넘어질 때 아이들은 크레파스를 쥐고 드문드문 본 매일의 부모들을 초상화로 그린다 입술밖에 없는 사람들의 얼굴만이 봉사활동을 다녀가고 소꿉놀이가 끝난 저녁, 금방 그친 눈에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눈사람을 먼저 빚으며 겨울이 눈동자에 찾아왔지만, 함박눈엔 원래 소리가 없다는 것을 차마 알아차리지 못한 아이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때의 머뭇거림은 고요하다
감염제국
재난 영화가 끝났다
간판 없는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미래의 간병인을 먼저 만나고 온 기분이 들었다 사례금이 모자랐다 영화 속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소년병들의 긴박하지만 신중한 눈빛
자막 없는 흐느낌
나의 방구석보다 더 어두운 사람들의 죽음을 보며 나를 위로한다
결말이 슬픔으로 전이되지 않는 유일한 처방
병이 병을 통치하는 나라에서
살기 위해선 하나가 다른 하나를 껴안아야한다
고작 하나가 되는 일을 해야 했지만 고작 그것이 우리의 모든 면역력이어서 쉽게 병에 들었다
변이된 세포들이 서로 닮아가며 하나의 심장을 향해 싸워가는 터널에서 우리는 사랑에 감염되고 쉼 없이 식어가는 덧셈을 풀었다 그 사이사이엔 이미 사라진 인류가 있었지만
심장과 무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우리는 처방전을 보냈다 건망증만 필요하다는 진술과 함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치료제를 개발하는 동안
병에 자연스럽게 감염된 사람들이
다시 둘로 나뉘는 방식으로 폐허를 지켰다
무거운 눈꺼풀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필름
소년병의 눈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빛의 교실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은
주관식으로 나올 확률이 크다
괄호에 빛이 든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상상력
백발의 과학 선생님이 빛을 사용해
OHP 필름을 보여준다
7교시의 암전에 빛으로 모여드는 눈빛
지구의 내부가 쉽게 보이는 순간
학생들은 일제히 침묵하고 필기를 시작한다
색색의 볼펜을 돌려가며
빛이 사라지고 지구는 보이지 않았다
하얀 스크린 위엔 지구가 앉았다 간 자리가 뜨겁고
학생들은 빛 없는 별들을 그렸다
몇 글자로 된 정의된 지구의 내부를
먼지가 빛을 훔치며 자라나고
정답이 정확해지는 순간
헷갈리기 시작하는 괄호 속에서
넘쳐나는 빈칸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백신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얼룩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하게
애어른 같은 아이를 키우는 집은 행복할 것 같다고 옆집 사람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공사장에 다녀온 사람이 불을 끄고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도 검은 발바닥은 검은 발바닥이었다 아버지가 더러워도 더럽다고 할 수 없는
팔레트의 굳은 물감
흰 양말을 가지런히 벗어놓고선 마른 빨래를 개키던 어머니를 돕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조용히 책도 읽었다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는 깨끗한 손이 있었다
새로운 것만 깨끗한 것이라면
더러워지려고 사는 것처럼
새카만 수챗구멍에 머리카락이 섞였다. 이미 얼룩이 되어버린 것처럼 딱딱한 침대에 몸을 숙인 채 잠이 드는 밤이면
아버지의 발바닥이 생각났다 검은색의 생각들이었기 때문에 깊은 밤 속에 파묻혀 아버지가 화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우는 일만 하던 어머니의 표백된 얼굴이
자꾸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병에 걸렸다
흰 색을 잃어가는 여전히 흰 옷 같은 나의 세포
나에게 묻은 것들이 무엇인지
나를 보호하는 이 깨끗한 색으로부터
나는 가장 위험했다
퀴즈
빙하시대에 불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것은 있었다
독서하던 소년은 그것을 길러야만 했다
부부의 싸움이나 불구경에도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시작하지도 않은 채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하수구에 쏟아도 버릴 수 없는
그것의 그림자들은 악취를 풍기며 포옹 한다
침묵이 허락된 시간을 지나
창문을 열고 까마귀 울음소리 들려와도
그것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무도 물어보거나 대답할 수 없다
의사도 손을 쓸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는
소아과의 우는 아이에게도 있다
박제된 부엉이가 노려보는 과학실에서도
잘못 찾아온 무덤 위에서도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인기척을 한다
그것을 연구하다 죽은 자들에겐 유서가 없다
용감한 인류는 이미 멸망했다
그것에 대입할 명제는 끊임없이 태어났으나
끝끝내 말할 수 없었던 그것은
내일 당신이 받게 될 질문이다
시작메모
엄마는 식품영양학과를 나왔다. 그리고 고향집으로 어쩌다 배송된 문예지를 보고선, “너의 시도 실렸더라.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엄마도 모르는 시를 쓰고 있다. 시가 늙고 그것을 쓴 사람이 죽고, 그 뒤 식품영양학과에서 현모양처를 꿈꾸던 한 여자에게도 지나지 못하는 그런 시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나는 딸꾹질을 한다. 백 번 넘게 딸꾹질을 하면 죽을 거라고 농담하던 사람에게도 닿지 못할 그런 시를 나는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아흔아홉 번째의 날숨이 빠져나가가고 멎는 시간들에 서있다.
* 서윤후 : 2009년「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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