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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시/장이지/날마다 일요일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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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장이지
날마다 일요일
나는 정글짐에 사는 아이. 이름은 없다.
아무도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않는다.
나는 성명서에 연명을 하지도 않고
재판을 받지도, 심판을 하지도 않는다.
월요일에 나는 뒤로 걷는 아이.
수요일엔 신나게 풍선껌을 씹고
토요일엔 동면(冬眠).
아니, 그건 거짓말.
(거짓말이 나쁘다는 걸 깜빡깜빡한다.)
월요일에 나는 힘이 세다.
나는 삐삐 롱 스타킹의 최측근.
월요일에는 뒤로 걷고
턱이 빠져라 풍선껌을 씹는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저무는 들판 저쪽의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적막을
홀로 보는 것이다.
적막의 집이 무너지고
들판에 잠의 돌기들이 일어나면 나는,
속눈썹으로
두 눈꺼풀로
짐짓 세계의 어둠을 덮는다. 꿈의 스크린이 드리운다.
적막의 폐자재 위 스크린에다가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별들의 흔한 일상을 질리지도 않고 틀어준다.
망년회
망년회는 만원이다. 이렇게나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다. 자작(自酌)한다. 옆에 앉은 남자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시켜본다. 소설, 쓰시나요? “아니요, 전 아직 쓰는 중이에요.” 남자의 음성이 약간 떨린다. 아, 쓰시는 중이군요. 아직 쓴 것은 아니지만. 미등단(未登壇)이시군요. ‘미장가’라는 것도 아닌데, 남자에게서 어둠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남자 왈, “이미 등단하셨죠?” 네, 뭐. 십수 년째 쓰고 있는 중이랍니다.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요. 자칫하다가는 중견이죠.*
이렇게나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다. 어둠의 아우라를 뿜고 있는 곁의 사내 걱정을 좀 하면서 자작. 미등단이 미장가라는 것도 아닌데. 망년회가 망명(忘名)작가 연찬회가 아닌 것처럼.
그러나 이렇게나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비로소 나는 혼자다. 원광(圓光)을 잃은 것도 아닌데, 머리가 상쾌하다. 이름을 잃은 것조차 아니고 잊은 것뿐인데, 절망은 내 왼팔을 물었던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 나를 놓아준다. 나는 무명(無明)의 거리로, 온전한 밤으로 망명한다. 교묘하게 이름을 술집 화장실에 흘리고, 영락한 자작(子爵)처럼 콧물을 코끝에 매달고(이게 ‘나’다! 원광은 보들레르 씨에게, 이름은 고물상에게 문의할 것!!).
* 최승자의 어떤 시에서 따옴. “우리는 벌써 중년 자칫하다가는 중견”.
*장이지 :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연구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 평론집 환대의 공간, 번역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등. 제2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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