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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시/김중일/눈사람의 존엄성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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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중일
눈사람의 존엄성
내가 태어난 해, 보이저1호는 나와 똑같이 빚어진 눈사람 한명을 태우고 우주로 발사되었다.
적막의 플라스마를 통과해온 보이저 1호가, 태양의 국경을 이탈해 항진한지 정확히 얼마나 지났을까. 이 별들의 경계로 부터 석달 열흘……,
측량할 수 없다 슬픔의 반감기에 대해.
완벽히 사랑하고도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완전히 사라지고도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는, 충분히 멀어지고도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는 놀라운 본질에 대해,
나는 오직 슬픔에 대해서만 환대해 왔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존엄성이 있는가. 사라지기 때문에 존엄성이 있는가.
적설 위에서 벌어지는 해와 달의 농성 속에 하얀 피 흘리며 타오르는 눈사람의 존엄성은 있는가.
흰 모자를 들추면, 광막하게 펼쳐지는 어둠의 수열 속에 눈사람의 존엄성은 있는가.
미지근한 체온의 손과 흰 건반 위를 함부로 뛰어다니는 발자국과 팝콘처럼 일생 흘린 웃음이 모두 뭉쳐져, 한꺼번에 몽땅 녹고 있는
밤과 새벽 사이의 두꺼운 적요를 덮고 녹아서 사라지는 중인
눈사람의 알전구처럼 하얀 알몸의 피부 밑에 그 존엄성이 숨겨져 있는가.
번번이 존엄성은 왜 숨겨져 있는가.
지금 이 시각 눈사람은 왜 또 혼자 켜져 있는가.
기타를 메고 지나가던 사람이 공깃돌을 주워 눈사람의 떨어진 눈알을 다시 붙여준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며 기타로 눈사람의 머리통을 날린다. 그는 눈사람의 자손이다. 그는 눈사람이다.
아주 긴 세월에 걸쳐 그의 부모가 둥근 등뼈와 흰 머리의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 사실은 가계의 비밀로 유지되었다.
눈사람은 눈 깜박할 사이 사라지는 사람, 햇빛으로 짠 관으로 눈사람의 시신을 모조리 실어갈 때까지도 누가 그를 이곳에 빚어놓았는지 그도 모를 것이다.
공중은 세세연년 함께 돌려 입은 옷, 눈발이 보풀처럼 일고
촛불을 품고 있던 눈사람의 신체 일부로 비어져 나온 불꽃이, 입술이다.
불타는 그 입술에 입 맞춰라.
입술을 훅 불어 끄고 뒤돌아서라.
캄캄해지게 더욱 캄캄해지게. 더 이상 아무도 앞이 안 보이게.
몰아치는 눈발 속 공중이라는 자궁 속에서 저 눈사람 한명도 꺼내주었으면.
새벽에는 눈사람 옆의 자작나무가 헛구역질을 하며 백마 한 마리를 낳았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빙판처럼 바닥에 누웠거나 서리처럼 창문마다 기대있던
백마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눈사람을 핥으며 목을 축였다.
빙판과 서리와 그와 나는 다 같은 눈사람이다.
우리는 태양의 아랫목에서 고작 수십년에 걸쳐 녹고 있다.
내가 사랑한 눈사람들.
누군가 저 달을 번쩍 들어 지구 위로 한몸처럼 올려놓을 때까지,
우리의 아이는 지구상에 단 한발의 총성도 폭발도 비명도, 함성조차 없는 기적 같은 어느 밤중에 태어났으면
좋겠다.
새를 받았어
사과가 땅에 떨어지듯 새가 하늘로 떨어진다 긴 치마를 활짝 펼쳐 사과를 받듯 하늘이 새를 받았다 빗방울이 빛나는 구두코 위에 떨어지듯 새가 저 깊숙한 구름의 모서리로 후두둑 떨어진다 볍씨를 흙 속에 파종하듯 새 떼가 공중에 점점이 흩뿌려진다 바람이 일어놓은 구름 속으로 까맣게 파묻힌다 금세 수숫대처럼 장대비 줄기가 자라나 주룩주룩 내린다 지상까지 뻗은 빗줄기에 사람들의 어깨가 검은 이파리 문양으로 젖으며 흔들린다 옥수수처럼 빼곡한 빌딩 창문들 빗줄기 끝에 그득그득 매달린다 오렌지 등 거리마다 가득 찬 저녁 몇 차례 폭염으로 수차례 태풍으로 거리에 낙과처럼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가 온다 새들로부터 번개가 곁가지처럼 웃자라는 순간 검게 벼린 바람에 싹둑 잘려나간다 베어진 수숫대를 하늘 끝까지 쌓아둔 자리인 물웅덩이들로 사방 가득하다 오늘 새들이 까마득한 지상 위로 올라앉아 제 몸에서 돋고 나고 자라고 쏟아진 부스러기들을 도로 쪼아 먹고 있다 이 모든 건 결코 마법이 아니다 기필코 현실이고 불가피한 자연이다
*김중일 :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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