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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신작시/석정호/얼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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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석정호
얼굴
심장 비위장 콩팥 그런 것에는
넓은 강이 있다 깊은 숲이 있다
겨울새의 하늘이 떠 있고 봄 두더지의 길이 튀어나오고
장대비 이랑마다 뜨겁게 따라붙는 햇살이 있다
썩은 물을 퍼 올리느라 등 굽어진 의사가 지나간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
미움의 손이 종이를 뭉개 놓았다
누가 내 얼굴 진흙 밭을 비틀걸음으로 갔다
심장 비위장 콩팥 어딘가에 압정을 꽂아두고
그는 가까운 어떤 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환칠!
혹은 동굴 벽 깊숙이 못 박기!
나는 휴지통에 버려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종이나 진흙 같은 얼굴의 사람!
가벼운 눈짓 한 줄에도 짓물러지고
손시늉 한 번에도 벼랑 끝으로 날아간다
심장 비위장 혹은 콩팥이 너무 작아서
심장 비위장 혹은 콩팥이 쉬 병들어서
저기,
다 찢어진 그림판을 들고 누가 걸어오고 있다
나성에 가면
그때 통근버스였어요 어디선가 실 뭉치 자줏빛이 굴러오고
능금꽃들이 활짝 머리를 들이밀고 달리고 있었지요
봄 한 마리가 앙큼스레 내 앞에 앉았잖아요
자줏빛 실오라기 나를 묶고
한없이 작아진 손가락이 속에서 올라와
자꾸만 앞자리에 가 붙어도
- 오늘 흙비가 내렸어요
- 진창길을 걸었지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울 텐데 뚜루룰루
한 마디 인사도 건네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소문은 들었어요
이웃동네의 가끔씩 내려온다는
눈앞 서울의 뒤태는 생각보다 멀었어요
그래도 어느 밤길에 만났잖아요
풀벌레 소리 머리에 가득해도 루룰루루
부엉이처럼 반짝이던 나를, 잊지 말아줘요
- 말의 시체들을 짓밟아요
- 관계들의 냄새 오늘 지독해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울 텐데
난데없는 오해의 열매를 삼키고
철길 아래로 뛰어내렸지요
지금 어디에 계셔도
만개하여 죽은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때 내 앞에 떨구었던
실 뭉치의 봄! 생각해요?
우리 묻힌 전생의 땅 끝까지 찾아가면 있을까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겠어요
*석정호 : 경주 출생. 2005년 <월간문학>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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