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2호/신작시/김상혁/신입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김상혁
신입
슬픔이 계속되면 그건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지’하고 중얼거리게 되거나,
남청색 맑은 대기의, 혹은 느닷없는 자동차 경적의 기시감이
전력으로 노동한 적 없는 미끄럽고 시끄러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놀던 풍경은
소리 지르는 마음의 풍경이 되고
뛰지 않아도, ‘전력을 다한다’는 말엔 주먹을 쥐게 된다.
실패하지 않는 연애에 관한 소망, 부모의 임종을 꼭 지키겠다는 결심, 방으로 돌아와 침묵하며
저녁과 침침함을 머릿속 소음으로 바꾸기,
며칠을 이어지는 꿈이 실은 또 다른 삶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출근길 회사 회전문을 함께 밀던 초면이 고인을 닮아서
그에게 안부를 묻겠다는 식의 마음가짐은 아니다.
주말 전까지는 사무실에 신입이 들 예정이고 얼마간 그는 지치지도 못할 것이다.
나에게도 식사를 하거나 조금씩이라도
돈을 모으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실감이 난다.
다만 어제와 내일 사이에는 쪽문이 있고
깨진 유리를 밟고 지나가는 발들을 구경하게 된다.
매일 문을 밀면서, 그건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몰락하는 자
―베른하르트의 소설엔 ‘그는 오르막길에서 몹시
숨이 찬다고 하면서도 나를 앞질러 갔다’는 구절이 있다.
그는 피스톨을 열 개나 가지고 있다 나이프도 스무 개쯤
그는 낡은 아파트에 산다 매일 어두운 방 창가에 앉아 졸면서 또각또각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는데
생각했을 것이다 메스티소 혼혈의 피부는 아름답다고
서울로 돌아가기엔 나쁜 짓을 하도 많이 저질러버렸으니까
그는 여자들 사진을 서른 장 넘게 가지고 있다
아내의 오래된 사진도 마흔 장쯤
“비즈니스일 뿐, 너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어.” 하지만 죽어가는 자들에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마흔이 되어서야 너희들의 비명이 머릿속에서 끔직해지기 시작했으니까
고해성사가 쉰 번을 넘었을 때
그는 예순을 목전에 두고 쓸쓸해졌다 어차피 죄를 지을 기력도 없었는데
생각했을 것이다 고국엔 내가 모르는 나의 어여쁜 딸이 자라고 있다고
메스티소 혼혈보다 고운 피부를 가진 처녀, 아버지의 과거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그녀가
그의 서른한 번째 사진을 가슴에 넣은 채 어두운 바다를 건너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끝내 그는 저질렀을 것이다
나쁜 생각들이 하도 많이 그를 앞질러버렸으니까
*김상혁 : 2009년 <세계의문학> 신인상 등단.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 대학원 재학 중.
추천0
- 이전글52호/신작시/김학중/외계인의 탄생 외 1편 15.07.03
- 다음글52호/신작시/김가연/다만, 흔들릴 뿐 외 1편 15.07.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