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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미니서사/김혜정/바람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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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서사
김혜정
바람의 눈
우리 셋은 저녁을 먹은 후면 화단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고는 곧 풀이 우거진 숲을 산책을 시작했다. 그것은 이 집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바로 시작되었다. 산책을 시작한 전부터 나는 줄곧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나는 그것이 나의 삶과 상당히 중요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나아가 우리 셋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종종 우리가 걷는 산책길의 중앙을 통과해 반대쪽 풀숲으로 날아갔다. 처음엔 왼쪽에서 다음에는 오른쪽을 차례로 오가며 종횡무진, 그러다 멈추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연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먹이를 찾아다니고, 이따금씩 홀로 불을 밝혔다. 들판을 거닐 때 그것을 보면 나는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뒤쫓아 간다거나 아니면 밤에 그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누군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시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에게 색이 있다면 파란색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때때로 늑대나 혹은 맹금류의 소리를 냈지만 대부분 바람소리에 묻혔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우리 셋 중 아무도 없었다.
“방금 내 옆으로 무언가 지나갔어.”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누구에겐가 비밀이 노출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설마.”
“정말이라니까.”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한참 깔깔대며 걸다가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가 보이지 않잖아.”
“오줌을 누러 간 걸 거야. 이럴 땐 모르는 척해주는 게 좋아.”
“그렇군.”
그녀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것을. 그녀의 얼굴은 추석날 보았던 달빛보다 창백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산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침이 밝기 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김혜정 : 여수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바람의 집』『수상한 이웃』장편소설『달의 문(門)』『독립명랑소녀』‘제15회 서라벌문학상 신인상’‘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송순문학상’‘2013 아르코창작지원금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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