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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장편소설/강인봉/타나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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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
강인봉
그때 용담은 충청도 서산의 어느 산간 마을에 있었다. 그 소식을 알려준 건 혜지였지만 이번에 그녀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날은 준우가 오히려 윤희를 재촉해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그곳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조금 지난 뒤였다. 윤희는 지난밤 내내 설레느라 한 잠도 못 이루고 뜬눈으로 하얗게 날을 새고 말았다고 했다.
“이번에는 정말 틀림없겠죠?”
다시 다짐을 받듯 가늘게 눈을 뜨며 준우의 시선을 찾는 그녀의 얼굴에 문득 고무풍선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이것이 그 긴 시련의 시작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열댓 그루의 커다란 감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외딴집이었다. 그때 마침 집 옆구리 짬의 나무에서 누가 장대로 감을 따고 있었다.
윤희가 먼저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산간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높고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준우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감나무는 집 주위의 밭과 산 밑에도 몇 그루가 더 있었다. 이제 보니 그래서 ‘감나무 집’이라고 한 모양이었다.
저만큼 앞서 간 윤희가 감을 따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묻고 있는 듯 그 사람의 동작이 잠시 멈칫해져 있었다. 어느 사이 장대는 그녀가 건네 쥐고 있었다. 또 불현듯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니, 이게들 누군가?”
그 사람이 대뜸 그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장대를 윤희에게 넘겨주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준우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바로 용담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소매 끝이 날깃날깃 닳아 떨어진 그 남루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우리를 용케 알아보시네요.”
이미 주눅이 들어 와서일까. 윤희는 말까지 더듬었다.
“알다마다. 그런데 자네들이 여긴 웬일인가?”
용담도 딴은 반가운지 입 끝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특별한 것이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다. 키도 그저 중키를 약간 웃도는 정도였다. 그게 워낙 여윈 탓으로 언뜻 훤칠하게 보일 뿐. 조금 실례가 되게 말한다면 그저 비쩍 마른 얼굴이었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눈이었다. 그렇다고 정기가 찌렁찌렁 울리고 있는 것은 아니고, 뭐랄까. 안개 저쪽의 어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빛 같다고나 할까.
“혜지 스님한테서 이곳에 계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랬군.”
용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는 지금 그 용담의 얼굴에서 과연 도인의 빛을 찾아보는가, 어쩌는가.
하지만 용담은 아무 눈치도 모르고 윤희에게서 도로 장대를 빼앗아갔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뭐하러 데리고 왔지?”
“실은 이 여자 때문에 여기 온 겁니다. 이 여자가 선사님을 다시 한 번 꼭 좀 뵙고 싶다고 해서요. 저번 때는 지장암에까지 함께 찾아갔었는데, 며칠 전에 이미 하산을 하셨더군요. 그래서 헛걸음만 했지요.”
준우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차마 면전에 대놓고 윤희가 도인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를 왜 또 만나?”
용담이 윤희를 슬쩍 건너다보았다.
“그땐 정말 몰라 뵙고 너무 죄송했어요.”
용담은 휙 사랑채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채는 더 높고 번듯한 오간 겹집이었다. 우물가 옆 화단에는 이제 막 칸나의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데 집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준우가 물었다.
“어째 사람이 아무도 안 보입니다.”
“두 부부만 사는데, 지금 시내에서 학교 다니고 있는 아이들한테 가고 없지. 내 어릴 때 친구지.”
“그럼 이곳이 고향이십니까?”
“고향은 아니고, 그저 잠시 와서 쉬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이 아가씨는, 내 얼굴을 보겠다고 하는 지금 그 자기의 얼굴이나 한 번 보시지.”
용담이 먼저 마루에 걸터앉았다.
“저는 아직 중생인데요.”
윤희는 벌써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마루에 올라가 용담을 향해 삼배三拜를 올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절을 하면서는 넌지시 준우에게도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준우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희가 너무 깊게 심취되어 있기 때문일까. 솔직히 이제 그는 차츰 불교가 싫었다. 두려웠다. 윤희가 세 번째 절을 하려고 할 때 용담은 이제 그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누군 중생이 아닌가? 오히려 그 중생이 바로 부처지.”
용담의 눈빛 속에서 윤희가 잠시 파닥거렸다. 그러나 아직도 그 눈빛은 안개의 저쪽에 잔뜩 숨어 있었다.
윤희가 물었다.
“그렇다면 도道란 무엇입니까?”
“그럼 자네는 어느 길로 왔는가. 자, 감이나 한 개 먹게나.”
용담이 옆에 놓인 망태기에서 감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네?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윤희는 곧바로 반문을 했다.
“감이 아주 달 거야.”
용담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대포알같이 생긴 장대감이었는데 빨갛게 물러 있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한입 베어 물면 금세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것만 같았다.
“도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어느 길로 왔느냐니요?”
윤희는 아직도 바짝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허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고불과거구古佛過去久라. 옛부처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네.”
윤희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용담이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선문답禪問答이라는 것인가? 준우는 저도 모르게 토끼처럼 쫑긋이 두 귀를 세웠다. 옛부처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라고?
하지만 윤희는 잔뜩 혼란스러운 얼굴이었고 그것은 거의 울상에 가까웠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어느 곳에서 왔겠습니까?”
윤희도 대담하게 용담을 맞받아 보았다.
의외의 물음이라는 듯 용담이 몸을 움찔했다. 적이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용담은 이내 허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내가 일러주리라.”
하지만 윤희는 용담이 자기를 한 대 때리려고 하는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이것은 준우가 뒷날 혜지로부터 들어서 안 소식이다.
“그냥 거기서 일러주세요.”
“그 또한 이미 지나갔느니라.”
윤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용담이 냉큼 들이받았다.
“죄송합니다, 선사님. 이 눈먼 중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윤희가 은근히 귓불을 붉혔다. 한참 돌아가는 낌새가 볼만했는데 준우는 그만 김이 쭉 빠졌다.
“그거야 어디 아가씨뿐이겠는가. 요즘은 너도 나도 남의 책만 읽고서 선禪을 압네, 하고 원숭이 흉내를 내는 세상이 아닌가.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길을 남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세상이 지금 어디로 가겠는가. 그러니 이 일이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 비로소 자기가 직접 그 도를 깨닫고 난 뒤 입을 열어야 한다고. 입을 잘못 열면 자기 한 사람만 죽는 게 아니야. 큰소리 빵빵 치며 여러 사람을 죽이는 거지.”
용담은 씁쓸히 머리를 내흔들었다.
“가령, 대전에서 어떤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지. 그 사람에게 서울 쪽이 아닌 부산이나 목포 쪽으로 길을 가르쳐준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대구나 광주쯤에서 다시 다른 이에게 길을 물어 여태 잘못 왔음을 깨닫고 도로 대전 쪽으로 되돌아와도 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자기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무작정 영원히 서울에 도달하지도 못할 길을 걷다가 죽는다면 그 인생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도인을 논하기 이전의 양심적인 문제야. 그러기에 고서古書에도 이르기를 ‘가난한 사람이 제왕帝王을 사칭하면 자기 한 몸만 죽지만, 깨달았다고 속여 법왕法王을 사칭해서 수많은 중생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면 그 죄상은 천 부처님이 출현해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지 않는가.”
용담은 갑자기 목이라도 마른지 입술에 침을 묻혔다. 이제 보니 그 입가에 기다란 흉터가 하나 있었다. 어릴 때 싸움이라도 하다가 생긴 것일까.
“선사님의 얼굴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봐도 될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제 윤희는 사람이 영판 달라지고 있었다.
“이까짓 늙은 얼굴은 그려서 무엇하게. 그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야. 지금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진실한 것이 아니야. 한갓 물거품이지. 일었다 꺼지고, 일었다 꺼지고 하는……. 하지만 이제 아가씨는 스스로 어리석은 줄을 알았으면 곧 현명한 사람이지.”
준우는 흘끗 윤희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윤희는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 용두사에서 공양주 보살의 잔소리를 들으며 불목하니 노릇을 하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용담은 이제 할말은 다 했다는 듯 먼 산을 바라보며 딴전을 부렸다.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어때? 저 분의 얼굴은 진짜 도인같이 보이는가?”
용담이 잠시 자리를 뜨는 틈을 타서 준우가 물었다. 이윽고 용담은 우물가에 가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나 윤희는 퉁명스럽게 받았다.
“준우 씨는 아까 뭘 들었어요? 지금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것은 한갓 물거품이라고. 나도 절에 다닌 지는 좀 오래 되었지만 그런 얘긴 여기 와서 처음 들어요. 저런 분이 큰절의 조실로 계셔야 하는 건데, 뭔가 분명히 잘못 되었어요.”
그녀는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집주인 내외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용담과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사내와 아주 치장을 곱게 한 부인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사랑채의 대문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섰다.
“늦어서 미안하네. 시장하지는 않았나?”
한눈에도 마음씨가 썩 좋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입이 약간 헤벌어진 게 그런 인상을 주었다. 그에 비해 그의 부인은 조금 대조적으로 오목조목 귀티가 얼굴에 금싸라기같이 묻어 있어 보였다. 그 나이에 수줍음까지 보이며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감을 따 먹었는걸 뭐.”
용담은 씩 웃었다.
“그런데 웬 손님들인가?”
집주인은 그제야 윤희와 준우를 발견했다는 듯 눈을 크게 벌려 떴다. 벌써부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윤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멀리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야.”
“자네가 여기에 있는 줄을 어떻게 알고서?”
“혜지를 만난 모양이야.”
“여보, 여기 술상 좀 봐오지. 점심을 굶겼으니 술이라도 먹여야지.”
옷을 갈아입고 부인이 방안에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주인이 재촉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식이 그 친구는 지금 충남대학교 교수로 있다더군. 그런데 자네, 명희 씨 소식 들어본 적 있나?”
“내 주로 산에서만 사는 몸이 어떻게 그걸 알겠나.”
용담이 멍청하게 집주인을 쳐다보았다.
“그거 참 안 되었더군. 그 여자 진작 과부가 되었었나 봐. 남편이 무슨 무역회사 전무로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간암인가, 폐암인가로 죽었대.”
그때 술상을 들고 그의 부인이 부엌에서 나왔다. 윤희와 준우가 약속이라도 한 듯 슬그머니 마루에서 내려오자 집주인이 손짓으로 도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지난가을에 담근 머루주요. 그런대로 귀헌 술이니 같이 앉아서 한잔씩 합시다.”
하지만 그들이 신발을 꿰어 신자 집주인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야. 그 명희 씨가 자넬 꼭 한 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는 거야. 어떻게 하겠나? 한 번 만나 볼래?”
술상이 그들 사이에 놓이자 집주인은 다시 용담의 시선에 매달렸다.
“그게 어느 때 얘긴데, 이제 와서 이 나이에 만나 무얼하겠나?”
쑥스럽다는 듯이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마음은 청춘이지 않는가.”
집주인이 먼저 주전자를 들어 용담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렇긴 하지.”
이번에는 용담이 집주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도 그때 참 못할 짓을 했지. 그래, 연애하다 말고 그렇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몰래 떠나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서 지금 고작 이 꼴이 되었나? 중노릇이 그렇게도 하고 싶던가? 그게 그렇게도 좋아?”
집주인은 금세 용담의 머리에 알밤이라도 하나 먹일 자세였다.
“그땐 나도 정말 내 정신이 아니었어. 자네도 이리 와서 한잔 하게나.”
집주인과 태연하게 잘도 죽이 맞으며 용담이 준우를 불렀다. 집주인도 다시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준우는 그 자리에 낄 처지가 아니란 듯 가볍게 머리를 내저어 사양했다. 그들은 이내 다시 술상으로 머리를 모아 갔다.
“학교 다닐 때, 그때 우리 술 많이 먹었지?”
“그럼. 많이 먹었지.”
“그래, 명희 씬 한 번 만나 볼래?”
집주인이 다시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글쎄.”
용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네도 분명 생각이 있긴 하지? 이 엉큼한 친구.”
“글쎄. 그 집도 아이들이 벌써 다 컸을 거야.”
“이 친구, 그 집 큰딸은 이미 시집을 갔어.”
“그랬는가?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자네도 참 웃기는 친구야. 부잣집 아들이, 그 많은 재산 다 버리고 오늘날 이거 꼴좋게 되었군. 더구나 그때 자네는 무슨 장학생이었지 않나. 이 친구, 거지가 뭐 따로 있는 줄 알아? 집도 절도 없으면 그게 바로 거지라구.”
“하긴 그래.”
그 소리는 어쩐지 서글프게 들렸다.
“이 좋은 세상에 그까짓 도는 닦아서 무엇 하나? 그저 매일매일 즐겁게 사는 게 바로 도지.”
“하긴 그래.”
어느새 용담은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윤희는 잔뜩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오르내렸다.
“이거야, 참 기가 막혀서……. 그러기에 저런 분은 산에만 계셔야 하는 건데……. 아무리 옛날 속가 친구라지만, 여자는 웬 여자? 뭔가 잘못 되어도 대단히 잘못 되었어요. 그리고 굳이 꼭 술을 대접하려면 ‘곡차’라고 하면서 정중히 따라드려야지, 감히 선사님더러 ‘자네’가 뭐예요?”
“자네 정말 명희 씨 한 번 만나 볼래? 어디 한적한 곳에서 둘이 다시 만나 옛날 그 시절의 추억을 되씹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그지?”
서로 허심탄회하게 맞장구를 쳐가며 그들의 잡담은 끝이 없었다. 보라. 용담도 이처럼 주거니 받거니 그냥 보통 인간이지 않는가. 도를 알면 생사를 초월하여 승속이 따로 없다고는 하지만,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 아닌 이상 제아무리 도를 닦아보았자 그 또한 결국은 우리와 같은 현실에 사는 인간임에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리라.
준우는 어쨌든 이번에는 마침내 윤희를 이렇게까지 용담과 연결해 주었으니 이제 그만 이쯤에서 이 일은 손을 떼고 다시 자기의 생활 속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용담은 지금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현상만이 소중했다. 우선 밥 벌어 먹고 사는 일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좋든 싫든 그 운명의 손은 그 가을을 향해 한 뼘 한 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를 죽음의 문턱에까지 끌고 가서야 그 손은 슬그머니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2.
준우는 사실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마지못해 그 집에 찾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윤희 어머니는 한참 동안 뚱하게 노려만 보고 있더니 이윽고 그가 자리에 앉자 잔뜩 볼 터지는 소리로 이죽거렸다.
“자네도 지금 그게 얼굴이라고 들고 왔는가? 세상에 원, 족제비도 낯짝이 있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윤호가 가져온 커피는 두 사람 사이에 낯설게 놓인 채 그대로 말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윤희의 집에서도 그를 달가워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처음에는 전화를 걸었었다. 그래도 윤호는 지금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게 뻔해서였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대뜸 전화 받는 소리가 이랬다.
“없네.”
지금은 윤호가 어디에 가고 없다든가, 어쨌다든가 하는 말은 일체 없었다. 그래서 준우도 절로 시큰둥하게 되받았다.
“왜 없습니까?”
“죽고 없네.”
그리곤 전화가 뚝 끊겼다. 저쪽에서 먼저 송수화기를 요란하게 내려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윤호가 죽고 없다니? 이놈의 할망구가 노망이 들었나. 멀쩡한 아들을 두고 죽고 없다니?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할 수나 있는 소리인가. 그것도 외아들을. 더구나 그 아이도 누나를 닮아선지 그림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꾹 참고 직접 찾아왔는데 이제는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자네가 무슨 염치로 우리 집에 찾아오나.”
그녀는 그제야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그때 내가 그만큼 알아듣게 일렀건만, 그 말은 죽어라고 듣지도 않더니만 이제 와서 무엇하러 우리 윤호는 찾나?”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긴 이제는 어차피 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이제는 그다지 그 얼굴에 비통해 하는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그의 맞은편 벽에는 큼직한 ‘佛’자가 하나 담긴 족자가 걸려 있었다. 바로 윤희의 흔적이었다.
“그 여승이 하는 명화원인가 뭔가 하는 고아원에도 진작부터 못 가게 했어야 했어. 이제 와서 더 탓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만.”
그때 언뜻 그녀의 머리 위에도 ‘世界一花’라는 만공 선사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윤희가 그 명화원 원장한테서 얻어온 또 하나의 복사본이었다.
“그 스님은 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준우도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모르는 소리 말게나. 속내를 알고 보니 그 여승도 그렇고 그런 사연이 있어서 입산을 했더구먼. 이것은 누구한테서 슬쩍 들은 얘긴데, 그 여승은 처녀 때 어느 비구승에게 혼을 홀딱 빼앗겨서 절간에 들락거리다가 끝내는 자기도 그냥 출가를 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그때 자기 딸이 그 여승의 영향을 받아 출가를 했지 않았나, 잔뜩 의심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건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공연히 엉뚱하게 죄 짓는 말씀은 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그 스님이야말로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다 버리고 사는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그동안 윤희가 그 지경이 되도록 대체 무엇을 하셨습니까?”
준우도 못내 그녀가 야속하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서산에 가서 용담을 만나고 돌아온 뒤 한 열흘 윤희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그때는 이미 윤희가 청암사로 떠난 뒤였다.
“정말 꿈만 같아요. 나는 너무도 잊고 살아왔어요. 그 도인을 찾아 헤매던 바로 내 자신의 얼굴을.”
그날 돌아오면서 윤희는 이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때 이미 출가를 결심한 게 분명했다. 윤희는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하지만 그 용담이라는 사람도 한 번 두고 볼 일이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다 일었다 꺼지고 일었다 꺼지고 하는 한갓 물거품이라고? 그러니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그럼 뭐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거지 별 뾰족한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자기는 그 도를 깨닫고서도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부처가 되었는가? 그러나 그는 고작 절간의 고된 공일이나 해주며 사는 초라한 신세가 아닌가. 그게 행복인가? 높은 자리에도 한 번 앉지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무엇인가. 돈이 나오는가, 옷이 나오는가, 술이 나오는가?
“이 사람이, 지금 그게 누가 할 소린가?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하지만 그녀는 슬쩍 그의 눈길을 피했다.
한때 그녀는 소문이 날 만큼 절에 반쯤 미쳐 가지고 불공을 올리러 다니곤 했다. 그것도 꼭꼭 딸까지 데리고 가서 그 복을 빌었다. 그래서 살림이 불같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딸은 그렇게 따라다니다가 결국은 불교에 깊이 병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누구의 탓으로 돌리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이제 좀 먹고 살만해지자 절에 아주 발걸음을 끊어 버렸다.
“커피를 다시 끓여 올까요? 다 식어 버렸어요.”
시무룩한 얼굴로 자기 어머니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윤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여전히 찻잔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 자네가 청암사에 갔을 때 어떻게 해서든 윤희를 끌고 내려왔어야 했어. 그래, 왜 그것도 하나 못 끌고 왔는가?”
준우는 다 식어빠진 커피를 마저 다 홀짝 마셔 버렸다.
그날 그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혜지를 만난 것은 정확히 오후 2시였다. 그는 지금도 그날만은 정확히 날짜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바로 그 사고를 당한 날이었으니까. 마음이 조급해서 약속 시간보다 훨씬 먼저 나간 탓에 그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이나 빼먹고 났을 때에야 혜지가 나타났다. 여전히 티 한점 묻지 않은 그 얼굴이었다.
“우린 정말 윤희 씨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차피 학교를 휴직한 상태니까, 그저 잠시 동안 청암사에 가서 지내고 싶다고 하기에 원장 스님이 그럼 그러라고 했지요.”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혜지는 다소 안 됐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눈빛 속에서 얼른 빠져나오며 말했다.
“차표는 내가 미리 사놓았습니다.”
윤희의 그 심보는 더 이상 물어보나마나 뻔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청암사에 가는 길을 알아보려고 그는 먼저 명화원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스님들은 다들 출타중이고, 맥없는 아이들만 알은체를 하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워낙 외롭게 사는 아이들이라 한 번만 눈빛을 마주쳐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는 그 아이들에게 천 원짜리 몇 장을 나눠 주었다. 지금의 생각으로야 돈이라도 더 주고 올 걸 후회되지만 그때로서는 아무 정신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게 귀찮을 뿐이었다.
다음날은 그곳에 가지 않고 전화를 했더니, 마침 혜지도 며칠 뒤 청암사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그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개찰구를 나오자 마침 버스가 대기중이었다. 그걸 보자 혜지가 그 맑은 얼굴에 싱긋이 웃음을 띠었다. 그녀는 걸망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앉으며 말했다.
“가서 잘 타이르면 윤희 씨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아무리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재가인在家人으로선 자기의 직분을 다 하면서 짬짬이 그걸 해야지요.”
그녀는 아직도 봄날 아침 따뜻하게 퍼지는 햇살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데 버스는 터미널에서 빠져나와 시가지를 한참 질주하다가 신호등에 걸려 있었다. 그 바람에 그는 겨우 조금 트였던 숨통이 다시 턱 막혀 왔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가 조금 못된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나오자 바로 큰 길이었고, 길 건너 이층 건물의 다방 간판을 바라보며 혜지가 말했다.
“이제 여기서 택시를 타고 조금만 산길을 올라가면 되니까 우리 저 다방에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하고 갈까요? 아니면, 어디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든지.”
어중간한 그 배려가 고맙긴 했지만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는 어서 빨리 윤희부터 만나고 싶었다.
“윤희는 지금 어디에 있답니까? 그래도 집에는 가끔씩 연락을 할 게 아닙니까?”
혜지의 말처럼 이 세상 가장 질긴 것이 그 인연인지 모른다.
그러자, 윤희 어머니가 샐쭉하게 되물었다.
“이제 와서 그 아이는 찾아 무엇 하려나?”
“…….”
“내가 그걸 알면 왜 여태 이러고 가만히 앉아 있었겠나. 당장 데려왔지.”
“윤호 너도 모르냐?”
“예.”
“하긴 자네도 그 엉뚱한 부처님한테 그 아이를 그렇게 빼앗길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청암사에 가서 물어보니 거기서도 모른다고 하더구먼. 사미니계만 받으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공부를 한다구 그러더구먼. 그러니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자기들도 잘 알 수가 없다고.”
“명화원 원장 스님한테서 듣기론 충청도 어느 절에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제가 한 번 알아볼까요?”
눈물을 글썽이는 그 어머니를 보자 준우는 다시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부처님의 자비는 저 가을 금으로 된 햇살 같다고 하는가.
“자네가 한 번 그래 주겠나? 나도 나지만, 우리 윤호가 자꾸 누나가 보고 싶은가 봐. 왜 아니 그러겠나. 그 일만 아니었음 얼마나 효녀였는데. 또 그것도 어디 제 한 몸 위해서 그런 것인가. 엄마 먼저 극락에 보내줄려고 그런 거지. 그 아이를 가졌을 때 태몽에 금빛 옷을 입은 부처님을 보았거든. 그래서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도 귀찮게 나를 따라 절에 다녔는지 몰라.”
“알았어요. 제가 한 번 찾아볼 게요.”
“제발 좀 그래 주게나. 하긴 그 아이가 이제 뭐가 되어도 되긴 될 거야. 한 번 한다면 하고 마는 아이니까. 그 아이 법명은 자운慈雲이라고 하더구먼. 그러니 자운 스님을 찾으면 되겠지?”
준우를 향해 그녀가 눈을 깜작깜작 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준우는 그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윤희네 집에서 나오자 곳곳에서 어둠이 달라붙고 있었다. 올가미처럼 외로움이 온몸을 죄어 왔다. 그때 어디서 갑자기 깊은 산골짜기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눈을 들고 바라보니 바람 소리였다. 바람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의 이파리들을 쓸고 가는 소리였다.
준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날 택시가 새로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산길을 오르고 있을 때 혜지가 말했다. 그러자 택시 운전수가 얼른 대꾸했다.
“아니, 더 올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저 위에는 요즘 다시 축대를 쌓느라고 한창 공사중이라는데, 아직 안 끝났을 거예요. 모처럼 산길을 밟고 올라가보는 것도 좋고요.”
깊은 산 속이라 그런지 택시에서 내리자 갑자기 기온이 소름이 돋게 서늘했다. 무엇이 들었는지 꽤 무겁게 보여 준우가 대신 걸망을 어깨에 메자 혜지는 싱긋이 웃었다. 3월에는 제법 꽃나들이가 좋은 곳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화사하게 목숨을 터뜨려 핀 벚꽃길이 절로 흰 눈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아나가자 절은 이내 한눈에 들어왔다. 준우는 이때까지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들이 산문에 들어서자 그때 마침 윤희는 저쪽 수각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윤희가 얼른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녀는 의젓하게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윤희는 저만큼 앞서 간 혜지만 발견한 듯 그쪽으로 반가이 달려들다가, 그 뒤를 따라 어정쩡하게 들어서는 그를 보더니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준우 씨.”
혜지는 윤희와 그를 그대로 놓아둔 채 요사채 안으로 사라져 갔다. 요사채 쪽을 힐끔 한 번 보고 나서 그는 말했다.
“꼴좋군. 승복까지 주워 입고. 미쳐도 분수가 있지,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거야?”
하지만 윤희는 어디에도 한점 미안하게 생각하는 기색이라곤 묻어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 윤희를 보자 그는 또 마음이 금방 변했다. 밥이고 뭐고 얻어먹을 것도 없이 당장 윤희를 끌고 내려갈 작정을 했다.
벌써 그의 낌새를 알아챘는지 윤희가 부드럽게 웃고 나서 지껄였다.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쪽 약수터로 가요.”
빨래를 대충 모아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윤희가 가볍게 몸을 돌렸다. 준우는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도 저만큼 먼저 성큼성큼 앞서 가는 그녀를 따라 산신각 뒤쪽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큰 바위 틈에서 약수가 찔끔찔끔 부처님의 눈물처럼 솟고 있었다. 윤희는 거기 놓인 바가지로 그 물을 열심히 받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부모님은 모두 편안하시죠?”
하지만 준우는 그걸 받아먹지 않고 그 옆 편편한 풀밭에 앉았다.
“이리 와서 여기 좀 앉아봐.”
“눈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까지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윤희가 도로 바가지를 제자리에 놓고 승복자락을 펄럭이며 준우 옆에 와서 앉았다. 하지만 그 옷은 어쩐지 남의 것을 빌려 입은 것처럼 그녀에겐 어설펐다.
“눈은 무슨 얼어 죽을 눈이야.”
그 순간 준우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준우 자신도 전혀 생각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윤희의 유방은 풍만하게 출렁이며 그의 가슴에 포근히 눌려져 왔다. 이제 보니 윤희는 더없이 미끈하고 탄력 있는 몸이었다. 그런데 못나게도 여태까지 그 젖통도 한 번 만져볼 생각을 못해 보다니. 준우는 더 끌어안은 팔뚝에 팽팽히 힘을 주었다. 윤희는 잠자리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었다.
“이거 어서 놔요. 준우 씨답지 않게 왜 이래요. 왜 여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그의 가슴속에 갇힌 채 윤희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우리는 결혼할 몸이지 않는가.”
이제 그는 대담하게 윤희의 옷깃을 헤치고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매지 않은 상태라 싱싱한 유방이 금방 손에 쥐어졌다. 그가 몇 번 가볍게 그 탱탱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주물럭거리자 윤희는 아무 말 없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비록 문제가 많은 여자이긴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윤희가 없는 자기의 존재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마 그가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항상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사람아, 그러기에 내가 그때 뭐라고 했나? 어디 여관에라도 꽉 잡아끌고 가서 우선 일부터 내고 보라고 했지 않았나. 사람이 아무리 못났어도 그렇지. 자네 그것은 대체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리 아껴 두었나.”
그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다 윤희의 젖꼭지를 끼어넣고 늑하게 힘주어 비비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창 빨갛게 익고 있는 오디 열매 같았다. 입 속에 집어넣고 잘근 깨물면 달고 새콤한 맛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윤희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분명히 앓는 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윤희는 스스로 자기의 아랫도리를 꿈틀꿈틀 그에게 밀착시켰다.
그 바람에 그는 윤희를 풀밭에 쓰러뜨려 눕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윤희의 허리띠를 풀고 잿빛 헐렁한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윤희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꼴깍 소리가 나게 침을 삼켰다. 그곳에도 보송보송한 또 하나의 풀밭이 있었다. 두 다리 쭉 뻗고 그는 이제 그 풀밭 위에 눕고 싶었다. 마치 그렇게 하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듯이 윤희의 호흡은 차츰 더 가빠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손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윤희가 그의 손을 움켜쥐고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건 안 돼요!”
윤희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안 될 게 뭐 있어!”
그는 사납게 윤희를 노려보았다. 이제 거긴 한 조각 팬티만이 앙증맞게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먼저 부처님한테 몸을 바쳤단 말예요. 이제 이러면 큰일 나요. 불벌佛罰을 받고 싶어요?”
윤희의 얼굴빛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순간 윤희의 몸을 냅다 밀쳐 버렸다. 윤희는 저만치 나동그라진 채 헉 소리를 내었다. 원망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듣자 밥맛이 뚝 떨어졌다. 어느새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깔리고 있었다.
여승방
1.
단청을 새로 해서인지 법당에 맑고 산뜻한 기운이 은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 아래 왼쪽에 요사채가 있고, 법당 위쪽에는 산신각이 있다. 다시 눈길을 돌려 요사채로 내려오면 산문이 있고, 그 옆에는 수각이다. 산문을 나오면 돌다리가 하나 있고, 돌다리 밑에는 사철 시린 계곡물이 흐른다. 거기서 잠시 망설이다가 좁은 샛길을 따라가면 바로 정랑이다. 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잘 어우러지고 있어서 도량이 한층 더 청정하게 보인다. 법당 뒷산은 온통 울창한 잣나무숲이다.
자운은 지금 이 회운사廻雲寺에서 지내고 있었다.
결국 발심發心이 부족한 탓일까. 그녀는 이번 하안거 결제夏安居結制를 견성암 선원에서 입방했는데 무리한 정진으로 몸에 그만 탈이 나서 도중하차를 하고 이 절의 주지 효경 사숙師叔을 찾아와 당분간 몸조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경전 공부라면 일찍이 여학교를 다닐 때부터 해온 터였고, 또 이미 출가를 하기 전부터 용담에게서 화두를 받아 스스로 웬만큼 갈고 닦은 터라, 자운은 강원講院에 가지 않고 선방만을 전전하고 있었다.
자운은 누군가 만공 선사의 수행찬修行讚을 외우며 도량석을 돌고 있는 소리를 잠결에 아득히 듣고 있었다. 유독 목소리가 청아한 걸로 보아 주지 효경 스님인 것 같았다. 자운은 오늘도 시계 바늘처럼 정확하게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효경 스님의 목소리는 샘물처럼 생기가 끝없이 넘치고 있었다.
자운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멈칫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문득 장준우의 얼굴이 눈에 밟혀 왔기 때문이다.
“장준우 그 사람, 지난번에 한 번 만났는데 아직도 몸이 그리 썩 좋지 않은 것 같았어. 그런데 자운은 걱정도 안 돼? 그 사고 났을 때도 가보지 않았잖아. 사람이 그래 가지고 어떻게 불제자라 하겠어?”
며칠 전 명화원 원장 선효 스님이 찾아와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한 번 찾아가봐. 그 사람 6개월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도 끝내 한 번도 안 가봤잖아. 아무튼 대단해. 대단히 지독한 여자라고!”
그러나 자운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내흔들었다. 다시 효경 스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인간오욕 다버리고 산에들어 중되는법 옷과밥을 구함인가
옷과밥을 구하려면 산에들일 무삼이며 부귀영화 구함인가
부귀영화 구하려면 산에들일 무삼인가 명욕권리 구함인가
명욕권리 구하려면 산에들일 무삼인가 문장명필 구함인가
문장명필 구하려면 산에들일 무삼인가 입산위승 하는법은
세상만사 다버리고 남음없는 발심으로 선지식을 참례하여
분향구두 신올리고 어떤것이 부처리까……
새벽 3시. 자운은 목에 수건을 두르고 개울가로 나갔다. 산사의 하루는 이 시간부터 시작된다. 어둠이 차고 맑게 개울물에 씻기고 있었다. 개울가에 두런거리는 사람의 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오늘도 그녀가 맨 먼저 일어난 모양이다. 가슴 속속 시려오는 찬물로 자운은 정갈하게 얼굴을 씻는다.
효경 스님은 여전히 목탁을 때리고 경을 외우며 도량을 돌고 있다. 그것으로 도량 안에 있는 모든 대중의 잠을 깨운다. 이것이 도량석道場釋이다. 원래는 큰방 부처님을 모시는 지전知殿 스님의 소임이었는데 요즘은 대중 가운데 아무나 먼저 일어난 스님이 자진해서 신심을 내어 적막한 어둠을 흔들며 도량을 돈다.
이제 자운은 예불을 모시기 위해 법당의 돌계단을 밟고 오른다. 법당 안은 언제나 은은한 향내음으로 가득하다. 여고시절부터 맡아온 정든 분위기다. 그녀는 온몸을 열고 그 향내음을 깊숙이 받아들여 그것과 하나가 되어 간다. 이 순간 모든 사물들은 그녀의 눈 끝에서 고요히 정지한다.
대중들이 하나 둘 정하게 가사 장삼을 수하고 법당 안에 들어선다. 졸음에 겨운 행자들, 공양주 보살까지 이 시간은 놓치지 않는다. 모두들 부처님을 향해 경건히 선다. 말할 수 없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 효경 스님은 목탁을 들고, 대중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목탁 소리가 법당 안을 가득히 울린다.
또르륵 똑 똑, 또르륵 똑 똑…….
목탁 소리에 맞춰 모두 염불을 외운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또르륵 똑 똑, 또르륵 똑 똑…….
지극한 신심으로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그 속이 비도록 파낸 목어木魚. 처음엔 목탁이 아니라 이 목어를 사용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살다가 죽은 뒤에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물고기 등에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스승이었던 스님이 배를 타고 강을 지날 때 그 고기가 물 위로 모습을 나타내어 그전에 저질렀던 죄를 참회하며 등에 자라난 나무를 없애주기를 애원했다. 그래서 그 어진 스승은 수륙재水陸齋를 지내주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해주고, 그 나무를 깎아 고기 모양을 만들어서 법당에 걸어놓고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는 범종梵鐘을 울리고, 들짐승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법고法鼓를 울리고, 날짐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운판雲版을 치고, 수중 중생水中衆生을 위해서는 목어를 쳤다 하는데, 그 목어가 점점 변형되어 지금의 둥그스름한 목탁이 따로 생겼고, 예전의 그 목어는 목어대로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르륵 똑 똑, 또르륵 똑 똑…….
목탁 소리는 계속해서 법당 안에 가득히 채워지고 있었다.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대 아라한 자비성중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諸大 阿羅漢 慈悲聖衆…….”
이 새벽예불의 염불 소리로 하루 수행의 문을 연다. 스스로 마음속의 모든 번뇌를 맑게 씻어 새 기운이 샘솟게 한다. 그래서 산사에서는 언제나 그 영롱한 태양이 법당의 부처님으로부터 움터 나온다.
“유원 무진 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 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唯願 無盡 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圓空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예불을 다 모시고 나면 스님들은 큰방에 눌러앉아 참선을 하거나 각자 자기 방에 돌아가 경을 읽는다. 자운은 큰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무자 화두無字話頭를 든다.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이 시간 청암사에서 행자수업行者修業을 할 때는 곧장 공양간으로 직행을 하곤 했다. 공양간에서 일하는 보살을 도와 쌀을 씻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상을 차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 일은 여고시절 수련회다, 뭐다 해서 절에 오르내릴 때부터 했으니 새삼스럽게 따로 행자수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거기다가 더 자진하여 정랑 청소, 마당 청소 따위를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사실 돈독히 쌓아온 신심으로 보나, 체면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그녀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처지는 아니었다. 또 스님들도 그녀의 그러한 정상을 참작하여 예외로 관용을 베풀고 그저 형식적으로만 행자이거니 했을 뿐 행자라고 부르는 스님도 없었다. 여전히 그냥 ‘최 선생’이었다.
하지만 사실 원리 원칙대로 하자면 여승이 되는 과정도 결코 그리 쉽지가 않다. 꼬박꼬박 스님들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시키는 대로 온갖 궂은일을 다 해야 한다. 그것도 최소한 10여 개월, 길면 2년 이상의 행자수행이다.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어느 날 한 스님이 개가 지나가는 걸 보고 조주 선사趙州禪師에게 물었다. ‘그럼 저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주는 답하기를 ‘무無’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이 무자 화두다.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그녀는 행자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용담에게서 이 화두를 받은 것이었다. 준우와 함께 서산에 가서 용담을 만났을 때였다.
“어떻게 하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요? 선사님의 말씀대로 나도 이젠 내 자신의 얼굴에서 직접 그것을 찾겠어요.”
그녀는 야릇한 전율을 느끼며 무엇에 홀린 듯 용담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분은 어디다 그 뿌리를 두고 살기에 얼굴에서 은은히 깊은 샘물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문득 붓을 들어 그 얼굴을 한 번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화두話頭를 들어야지. 화두는 바로 그 문을 여는 열쇠야. 방법은 오직 이것밖에 없어. 내가 직접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아야지.”
“그럼 제게도 그 화두를 하나 주세요.”
그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담을 향해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화두를 받을 때는 삼배三拜를 올려야 한다는 말을 명화원 원장 선효 스님으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자 화두를 하나 주지. 화두는 1천7백 공안이 있는데, 이 무자는 일찍이 만공 선사가 들던 화두였지.”
“만공 선사요? 그럼 저도 이 화두를 깨치면 만공 선사와 똑같은 경지가 되는 겁니까?”
그녀는 용담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여부가 있는가. 당연하지. 그럼 이제 아가씨가 다시 한 번 그 제2의 만공이 되어 보지.”
그래서 그녀는 당장 그날부터 이 화두에 온통 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지 않는가.
“이 무자를 어떤 조사는 ‘일체 명근一切名根을 끊어버리는 칼이다’고 했고, 어떤 조사는 ‘일체를 열어주는 자물쇠통이다’고 했으며,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다’, ‘나귀를 매어두는 말뚝이다’고도 했지.”
하지만 자운은 자꾸 선효 스님의 말이 떠올라 와서 도저히 화두가 잡히지 않았다. 자운은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선효 스님은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며칠 전 회운사에까지 찾아와서 또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장준우 그 사람,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6개월 동안이나 일어서지도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가 겨우 회복되어 병원에서 퇴원을 했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지금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어?”
선효 스님은 자운이 명화원에 다닐 때와는 달리 입산을 한 뒤론 너무도 표가 나게 쌀쌀맞은 것이었다. 특히 준우가 그 사고를 당한 뒤부턴 선효 스님은 이제 단 한 번도 자운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 안 찾아가볼 거야? 가서 한 번 만나봐.”
선효 스님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듯 다시 물끄러미 자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작 그런 소식이나 전해 주려고 회운사에 올라온 것일까. 하지만 자운은 말 한마디 대꾸 없이 요지부동으로 서 있었다.
“그놈의 고집하곤.”
“…….”
그래도 자운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먼 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효 스님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중노릇은 해서 뭐할 거야? 난 여태 그렇게 안 보았는데 정말 독한 여자로군.”
하지만 자운은 딴전을 부렸다.
“그런데 그건 웬 보따리예요?”
선효 스님의 손에는 보따리가 하나 들려 있는 것이었다. 선효 스님은 그 들고 온 보따리를 자운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 옷이나 한 번 입어봐.”
순간 자운은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제야 은사 스님으로서의 도리상 새 옷을 한 벌 지어온 모양이었다. 처음엔 한사코 자운의 은사 스님이 되어 주는 것까지도 반대를 했었다. 그걸 보면 선효 스님도 어지간히 독한 여자였다. ……이젠 나하고 무슨 원수가 되려고 나더러 은사 스님이 되어 달라는 거지?
“그런데 이 속에 웬 가사 장삼도 들어 있어요.”
“이왕 옷을 짓는 김에 함께 지었어. 그래도 어쩌겠어. 이제라도 내 할 도리는 해줘야 뒷말이 없지.”
그래서 자운은 사미니계沙彌尼戒를 받을 때 새 옷은커녕 가사 장삼도 없어서 자경 사숙의 헌 가사 장삼을 얻어 입고 갔었다.
“그나저나 어떡할 거야? 한 번만 갔다와봐. 사람이 어디 그래서 되겠어? 자기 도리는 하고 살아야지.”
하지만 자운은 끝내 냉랭히 말했다.
“이제 준우 씨와의 인연은 이미 전생의 일이에요.”
자운은 독버섯처럼 빨갛게 입술을 깨물며 창 밖 하늘로 시선을 밀어 올렸다. 이제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하긴 만약 그에게 몸이라도 허락했다면 어떻게 비구니가 될 수나 있었겠는가. 아직 그와의 그 관계가 깨끗하기에 그를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가.
그러고 보면 그는 참 순진한 사람이기도 하지. 결혼까지 할 사이였음에도 그녀의 몸에 한 번도 쥐새끼처럼 게걸스럽게 덤벼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날 딱 한 번 그 청암사 약수터에서 그 일이 있었을 뿐이다. 차라리 그때 그냥 더 죽은 듯이 두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있어 줄 걸. 그녀는 그 일이 눈 속에 아프게 떠올랐다.
절에서는 아침 공양을 6시에 한다.
전대중이 한 상에 앉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하게 공양을 든다. 대중이 많은 절에서는 발우 공양을 한다. 하지만 회운사는 요즘 다들 공부하러 떠나고 대중이 몇 명 안 되기 때문에 후원에서 그냥 상 공양을 한다. 절에서는 먹는 것까지도 매우 까다롭고 조심스럽다. 수저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는 물론이고, 홀짝거리거나, 후루룩거리거나, 음식 씹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공양이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한가하고 자유롭다. 그 틈에 자운은 잠시 또 책을 읽는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다. 출가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읽는 경이라며 청암사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 지암 노스님이 준 얄따란 책이다. 그래서 너무도 그녀의 손때가 자르르하게 많이 묻은 책이다. 자운은 그 책 때문에 언제나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를 잃지 않고 살 수가 있었다.
원효元曉는 그 책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이렇게 말했다. ……밥을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널리 알면서도, 진리를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알지 못하는구나. 실행과 지혜가 갖추어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새의 양쪽 날개와 같다.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하면 남의 죄를 풀어주지 못한다. 그러하니 계행이 없고서 다른 이의 공양을 어찌 받겠는가. 용상龍象의 덕을 우러르며 능히 긴 고통을 참고, 사자의 좌座를 기약하여 길이 욕락을 등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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