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2호/연재/강우영/내 안의 숨결과 저 밖의 숨결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
페이지 정보

본문
연재
정우영
내 안의 숨결과 저 밖의 숨결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
-민영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정희성 시집 <그리운 나무>, 윤재철 시집 <썩은 시>, 이은봉 시집 <걸레 옷을 입은 구름>
정우영(시인)
잘 익힌 가을 맛본지 언제더라. 잘 익어 절로 훈훈해지는 시의 가을, 만나보기 좀체 쉽지 않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마음 벅찬 가을들을 두 손에 받아들었다. 나는 시흥(詩興) 도도한 기분 어쩌지 못하고 가을볕에 몸 축이고 있다.
혹여 가을볕이 시(詩) 말린다고 여기는 분들은 저 들에 나가 이런 시들 활짝 펼쳐 보시라. 주흥보다 깊숙이 들어차 적시는 시흥에 감읍하게 될 것이다. 가을에서 쓸쓸함만 건지는 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중 어느 한 권이든 들고 나가 어느 나무엔들 기대어 한 수만 읊어보라. 한 호흡 가르자마자, 가슴 뿌듯하게 벅차오르는 한 감응(感應) 터질 터이니. 물론 그 감응이 다 달디단 것은 아니다. 시도 어쩌지 못하는 쓸쓸함이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시 읽기 이전의 그 쓸쓸함이 아닐 것이라 여긴다. 커피에 깃든 단맛과도 같은 게 살금 얹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시의 맛이자 가을의 맛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맛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다. 거기에는 생의 비의(秘意)와 경륜이라는 무늬가 촘촘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순(耳順)은 넘어서야 이런 시들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천명을 알아야 하고 귀가 순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나이 들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누구든 예순에 이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다 이순인 것은 아니다. 나 아닌 것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는 자의 귀는 순해지지 않는다. 그렇다. 숨결이다. 이순은 내 안의 숨결과 저 밖의 숨결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때 다가온다.
나는 오늘 여기, 그 이순의 시들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벌써부터 훈훈한 숨결 느껴진다. 이들 시로 하여 당신의 가을은 문득 뻐근해질 것이다.
민영: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
가을이 깊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이
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고,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민다.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왔는지,
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
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념하는 일이다.
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
시월 상달 이 눈부신
서릿발 치는 푸른 날빛 속에서
어디로 가야 만나볼 수 있단 말이냐!
-민영, <이 가을에> 전문
민영의 귀는 이제 숨결만이 아니라 운명의 어떤 기척까지 느끼는 것 아닐까 싶다. 여든의 귀는 생물학적으로는 어두워졌을지 몰라도 시적으로는 듣고 보는 귀가 깊어진 것처럼 보인다. 나이 들어갈수록 감성은 엷어지고 계몽은 늘어간다는데 그는 여전히 감성으로 충만하다. 어쩔 수 없이 과거로 흘러드는 시선은 멈추지 못하지만, 그게 다 회고만은 아니다. 과거가 이끌어내는 생생한 현재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 그래서 그가 “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 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념하는 일이다”라고 말할 때에도 그게 애상(哀傷)으로 다가들지 않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미는 까닭 아닐지. 이런 마음이 밑바탕에 있으므로 그가, “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 하고 호명할 때 그 호명이 아스라하지 않는 것이다.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은 “시월 상달 이 눈부신/ 서릿발 치는 푸른 날빛 속에서”도 깃 열어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 품어 안는다. 그래서 내게는 연신 외치는 “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어디로 가야 만나볼 수 있단 말이냐!”하는 영탄(詠嘆)이 안타깝지만은 않은 것이다.
나는 이 영탄을 ‘사라짐’이 아니라, ‘되살림’으로 읽는다. “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으로 “말없이 떠난 이들”은 그의 이 영탄으로 아연 되살아나온다. 그가 과거로 들어가 그들을 껴안는 게 아니라, 그들을 현재로 호명하여 “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이/ 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듯이 쉬어 가라고 토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이므로 그의 가을은 깊고 우리의 가을도 또한 깊어진다.
어디 가을뿐이랴. 그의 새벽도 깊어진다. 그러나 그 깊어진 새벽은 어떤 서두름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몇 번이나 말한다.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 이루지 못하다
새벽에 눈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울타리 밖에 내리는 파리한 눈,
눈송이를 후려치는 아라사 바람이
수천마리의 양처럼 떼지어 달려와서
왕소나무 숲을 뒤흔드는 망각의 땅,
고구려와 발해의 터전을
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
그곳을 떠나온 지도
육십년이 지났다, 그곳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슬픈 아비가
해란강 언덕 위 흙 속에 누워 있고,
늙어서 허리가 굽은 옛 동무들이
강둑에 나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뒷동산 언덕 위의 넓은 풀밭과
얼굴이 하도 고와 뒤쫓아다니던
왕가네 호떡집 딸 링링도 살고 있다.
이토록 바람 불고 추운 날에는
검은 털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말 타고 달려오던 녹림의 호걸들,
그 마적들이 외치는 군호 소리에
어린 나를 끌어안고 가슴 조이던
애젊은 오마니도 이제는 없다.
장백산 올라가는 멧등길에
하얗게 피어 있던 백도라지 꽃,
그 북간도의 화전 마을을
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민영, <새벽에 눈을 뜨면> 전문
나이 여든의 그가 새벽마다 가야 할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울타리 밖에 내리는 파리한 눈,/ 눈송이를 후려치는 아라사 바람이/ 수천마리의 양처럼 떼지어 달려와서/ 왕소나무 숲을 뒤흔드는 망각의 땅,/ 고구려와 발해의 터전”이다. “그곳을 떠나온 지도/ 육십년이 지났”지만, 그는 그곳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사연일까. 그는 왜 그렇게 그곳을 애달파하는가. “그곳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슬픈 아비가/ 해란강 언덕 위 흙 속에 누워 있고,/ 늙어서 허리가 굽은 옛 동무들이/ 강둑에 나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뒷동산 언덕 위의 넓은 풀밭과/ 얼굴이 하도 고와 뒤쫓아다니던/ 왕가네 호떡집 딸 링링도 살고 있”는 까닭이다. 아마도 그는 꿈길 속에서는 늘 어린시절의 저곳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새벽 꿈에서 깰 때 그 허망함은 얼마나 극심할 것인가. 나만이 버려졌구나 하는 상실감도 무척 컸으리라. 그런데 육십 년도 더 지난 지금, 그는 어떻게 “그 북간도의 화전 마을을” 찾을 수 있을까. “장백산 올라가는 멧등길에/ 하얗게 피어 있던 백도라지 꽃”이 그 이정표이다. 그 “백도라지 꽃”만 있으면 그는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겠다고 여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백도라지 꽃”은 얼마나 유한한가. 그의 심중에는 여전히 또렷이 살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더 늦기 전에!” “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알고 나도 안다. 이것이 꿈이란 걸. 꿈길 더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을. 그렇지 않은가. 시간을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그러나 이 비원(悲願)만으로도 얼마나 값진가. 이런 비원 없이는 실은 삶의 길도 열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원이 이후의 삶에게는 새로운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비원에서 남과 북 이산의 아픔을 느낀다. 어린시절 삶터에 대한 애정도 이렇듯 애절한데 남과 북으로 나뉘인 가족들은 어떨까 생각하니 막막하고 먹먹하다. 그리하여 나는 노시인을 대신하여 이렇게 외치고 싶다. 정치놀음 다 관두고 남과 북 닫힌 문 어서 열라고. 사무친 그리움 앓다가 우리 이웃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정희성 : 붉은 피 도는 청정함
이제 다 내려놓고
단순하게 살고 싶네
콩댐을 한 장판방
머리맡엔 목침 하나
몸 이긴 마음이
어디 있을까
창호지에 들이치는
싸락눈 소리
-정희성, <한거(寒居)> 전문
정희성의 청정(淸淨)함은 천연(天然) 아닐까. 나는 그와 그의 시에서 꾸밈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일흔이 가까워오지만 그는 낡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꽉 맞물려 조여 있지도 않다. 살갑게 쩡하다. 푸른 피의 청정함이 아니라 붉은 피 도는 청정함이다. 그래서 그의 청정함은 다사롭다. 그가 ‘한거(寒居)’를 말할 때도 나는 거기서 차가움보다는 가난함을 먼저 읽는다. 물론 그 가난함은 누추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청렴의 가난이다.
청렴한 그가 바라는 것은 방 한 칸이다. 그는 그야말로 “이제 다 내려놓고/ 단순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 단순함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머리맡엔 목침 하나” 놓여 있는 “콩댐을 한 장판방”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콩댐에서 멈칫거릴 것이다. 콩댐을 알아야 어떤 장판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콩댐’은 불린 콩을 갈아서 들기름 따위에 섞어 장판에 바르는 것이다. 콩댐해야 장판도 오래 가고 벌레 류의 침범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과정이 복잡해 보이지만, 예전 방 들일 때에는 가장 단순한 방치레였다.
그는 그와 같은 장판방에, 목침 하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방에는 아무런 치장도 가구도 없다. 달랑 베고 잘 수 있는 목침 하나뿐이다. “창호지에 들이치는/ 싸락눈 소리” 들리는데 이불 한 채마저 없다. 추운 방, 차가운 거주이다. 그는 왜 이와 같은 ‘한거’를 추구하는가. 나는 “몸 이긴 마음이/ 어디 있을까”에서 찾는다. 가난한 몸피에 청정한 정신이 깃듦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몸의 겉치레를 버려야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득 저 방이 수도하는 도인의 방처럼 여겨진다. 그러니 저 방은 시인의 방이자, 도인의 방이다. 나도 저 방에 들어 새로이 시를 깨우쳐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저 ‘한거’에서 그는 무엇을 꿈꿀까. 평안만이 그가 바라는 것일까. 혹 그리움은 아닐까. 거처는 비록 한거하다 할지라도 그리운 마음만은 어쩌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무가 그러하듯이.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정희성, <그리운 나무> 전문
나는 이 시야말로 ‘한거’의 마음이라고 여긴다. 여기의 ‘그리운 나무’는 한거에 든 그가 아니고 또 누구랴. 이 시는 그런 점에서 <한거> 이전의 프리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본 영화의 전사(前史)처럼 ‘한거’ 이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에 나오는 ‘나무’는 제자리에 서 있는 나무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한거에 든 그의 형상처럼 읽힌다. 멀리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자의 애타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으니 그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것이다.
왜 이제 나무가 저리도 속절없이 꽃을 피우는지, 벌 나비가 저렇듯 꼬여드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당신은 혹 아는가. 그 마음은 심지어 ‘바람’을 일으킨다. 기압차로 바람이 생긴다고? 이 과학적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한 나무의 그리운 마음이 그리운 나무에게 가닿는 향기 실어 보내려 바람 일으키는 것이다. ‘한거’에 드는 자도 마찬가지다. 한거는 누추하게 버려진 자의 방이 아니다. 꿈꾸는 자의 방인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리움의 향기를 저 멀리 누군가에게 실어 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향기는 도대체 무슨 향기일 것인가. 나는 시의 향기일 거라 믿는다. 생각해 보라. 시의 향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게 무엇이겠는가.
윤재철 : 썩어야 돋는 시의 눈
시가 발효되면
술이 될까
술이 되어
사람들을 취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러고서는
오줌이 되고
똥이 되어
향그러운 흙이 될 수 있을까
다시 그 땅 위에서
파랗게 돋아나는
풀이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풀잎 간지르는 바람이 될 수 있을까
시도 썩어야 한다
썩은 시에서 눈이 돋는다
-윤재철, <썩은 시> 전문
모두 가을의 열매를 향해 눈 둘 때 그는 땅과 흙을 향해 고개 내렸다. 저 열매를 열매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 흙이다. 땅이다. 그러니 그는 흙과 땅을 먼저 살핀 것이다. 그에 대한 고마움도 물론 당연히 땅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릇 시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술을 좋아하는 그는 시의 발효를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시가 발효되면/ 술이 될까/ 술이 되어/ 사람들을 취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쉽지 않으리라 여긴다. 활착(活着)의 시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발효되기는커녕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멀쩡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시들에서 오줌과 똥이 되어 “향그러운 흙이 될 수 있”길 기대하겠는가. 부질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저 말 수는 없다. 그는 궁리한다. 어떻게 해야 “다시 그 땅 위에서/ 파랗게 돋아나는/ 풀이나 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풀잎 간지르는 바람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찾은 답은 시이다. 시도 밀알처럼 “썩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썩은 시에서 눈이 돋”기 때문이다. 이때의 눈은 아마도 싹을 말하는 눈이면서 세상의 지혜가 담긴 혜안(慧眼)으로서의 눈일 것이다. 풀의 눈[芽]이자, 정화와 지혜의 눈이다. 그러니 시가 썩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이에 적극 동의한다. “시도 썩어야 한다.” 그의 이 발언은 내가 최근 접한 시행 중 가장 통쾌한 선언이다. 그래, 맞다. 시도 썩어야 한다. 썩어야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썩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그는 말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그 방식도 참 쉽다. 반만 허락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에서 집중을 빼자고 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반은 좀 어두워지자”고. “반은 전깃불 좀 끄자”고. “반은 잠도 좀 자”고 “쓸데없는 꿈도 좀 꾸자”고.
반은 좀 어두워지자
반은 전깃불 좀 끄자
반은 잠 좀 자자
반은 쓸데없는 꿈도 좀 꾸자
반은 좀 무너지자
반은 좀 허무해지자
셔터 내리고 끈도 좀 놓아버리고
반은 나 혼자 내버려두자
반은 TV도 좀 끄자
PC도 좀 끄자
눈 감고 팔베개한 채 그냥 멍하니
바람 소리도 좀 듣자
반은 자전거도 타고
반은 나무들 사이도 걷고
반은 슬프지 말자
반은 죽일 놈도 용서하자
이제 별도 내려오지 않는 밤
작은 스탠드불 밑에 마주앉아
반은 따뜻하게
반은 좀 어두워지자
나는 그의 이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것이 노자가 말하는 바, ‘쓸모없음의 쓸모’라고 생각한다. 쓸모없다고 여기는 게 실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있는 자원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일하는 데 쓰고 그 일에서 보람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일과 일 사이에 쉬는 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그가 이르는 이런 전언들-“반은 좀 무너지자/ 반은 좀 허무해지자/ 셔터 내리고 끈도 좀 놓아버리고/ 반은 나 혼자 내버려두자”-이 눈에 확 띌 수밖에.
실은 이래야 산다. 이런 게 삶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자본주의가 만든 병폐이다. 쉬는 인간, 노는 인간이라야 한다. 아마도 “반은 TV도 좀 끄자/ PC도 좀 끄자/ 눈 감고 팔베개한 채 그냥 멍하니/ 바람 소리도 좀 듣자”고 하면 반문명의 전사쯤이거나 혹은 아나키스트로 여길지도 모른다. 원, 천만에. 그가 정상이고 우리가 너무 많이 나 밖의 것들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의 핵심은 다른 게 아니다. 나를 좀 둘러보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의 반은 나를 위해 쓰라는 것이다. 내가 없는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이것이 곧 현대병의 근원 아닌가.
당신, 잘 살고 싶은가. 그러면 당장 그의 말을 좀 듣고 따라라. “이제 별도 내려오지 않는 밤/ 작은 스탠드불 밑에 마주앉아/ 반은 따뜻하게/ 반은 좀 어두워지자.” 맞다. 따뜻하게 어두워져야 한다. 우리의 삶은 너무 춥게 밝은 쪽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이은봉 :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성찰
돌 속에서 내가 자랐듯이 내 속에서 돌이 자라고 있다 돌 속에서 내가 나왔듯이 내 속에서 돌이 나오고 있다
콩이여 팥이여 콩팥이여 돌에서 나와 돌로 돌아가는 생명이여 죽음이여.
-이은봉, <결석> 전문
내가 곧 돌이라는 깨달음은 만만한 게 아니다. 저 흔한 돌멩이들과 나의 동일시라니. 어찌 나 같은 존귀한 생명체와 저 하찮은 돌덩어리들을 비교한단 말인가. 자못 비분강개(悲憤慷慨)할 일이다. 하지만 저 우주에서 우리를 들여다본다고 가정해보자. 이 지구라는 혹성은 무엇으로 보일까. 먼지 아닐까, 먼지. 아니, 그보다도 저 작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선에는 나와 돌이 어떻게 비칠까. 그저 하찮은 물질에 불과하지 않을까. 돌과 나는 딴몸이되 한 몸과 진배없는. 그러나 실은 누가 자기를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모두 스스로를 존귀한 존재라 여길 것이다. 왜 아닐 것인가. 내가 지면 한 세계도 끝나고 마는 것인데.
이은봉의 시선은 그 어름에 머물지 않을까. 물질과 생명 사이 어디쯤. 나는 돌이로되 생명 가진 돌이라는 지점에. ‘나는 현세인이면서 동시에 태초인’이라는 자각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아된다. “돌 속에서 내가 자랐듯이 내 속에서 돌이 자라고 있다”는 전언은 그래서 단순치가 않다. 우주만물의 시초와 지금 여기의 존재를 동시에 두드리는 것이다. 사유의 폭이 넓고도 깊다고 할까.
그런데 그 자각의 원천이 무엇인가. 결석이다. 몸속의 석회질이 굳어져 만드는 딱딱한 돌덩어리들이다. 그는 그 결석에서 태초의 돌과 태초의 인간을 떠올렸으며 그들을 지금 여기의 존재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연상한 것은 콩과 팥이다. 결석이 콩팥에서 주로 발견되니 콩과 팥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콩과 팥, 그리고 인간의 몸인 콩팥을 돌로 인식하여 호명하고 있음이다. 그에 따르면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까지 우주만물은 한 몸이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이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성찰을 읽는다. 그러니 그가 “콩이여 팥이여 콩팥이여 돌에서 나와 돌로 돌아가는 생명이여 죽음이여”하고 읊조리는 것은 한탄이 아니라 깨우침인 것이다.
그러나 돌의 생명이라 해서 그 생명의 탄력까지 돌로 여겨서는 안 된다. 돌의 생명도 한때는 팔팔한 심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돌의 전사(前史)는 어땠을까.
농협 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 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
눈 내리뜨면 낮은 둔덕 아래,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이은봉, <민들레꽃> 전문
나는 민들레꽃에서 돌의 전사(前史)를 읽는다. 민들레꽃은 환한 생명의 약동을 보이는데 이 생명력과 돌의 생명이 다른 게 아니다. 게다가 그는 이 민들레꽃에서 “웬 낯빛 뽀얀 계집애”를 본다. 식물과 인간의 병치이자 동일선상의 생명력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돌과 식물과 인간의 생명력은 다르지 않다.
물론 발랄한 생명력은 인간이 더 생생하게 발현한다.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는 표현을 보라. 얼마나 생동감 있는가. 아마도 저 오줌소리는 무한한 생산의 기운이기도 할 것이다. 그뿐인가.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말이다. 앙증맞잖은가. 절로 입 벙그레진다. 민들레의 생명력과 소녀의 생명력이 만나 이룬 하모니가 환하다.
이 하모니가 이렇듯 환하므로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조차 뒤로 밀린다. 과연 세상 그 무엇이 저 팔팔한 심장의 설렘보다 빛날 것인가.
그러나 물론 잊지 말 것이 있다. 생명은 유한하다는 것이며 묵언으로 빛나는 돌의 생명력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을을 가을답게 익히는 방법
자, 여기까지다. 내가 느끼는 시의 숨결은 이쯤에서 갈무리하고자 한다. 깊어가는 가을에 얼비치어 빛나는 마음들 시 속에서 요동치시길 바란다. 그러자면 이 글 맨 앞에서 말했듯이 시 한 편은 들고 읽어야 한다. 가을을 가을답게 익히는 것은 시를 읽는 것이다. 소리내어 시 읽다 보면 자연과의 교감은 절로 깊어질 것이라 믿는다.
가을에서 문득 뻐근해지는 설렘을 맛보고 싶으신가. 한동안 시를 읽으며 시와 깊게 사귀시라.
(※ 제 ‘시평에세이’ 연재는 이 글로 마칠까 합니다. 그 동안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따뜻이 보아주셔서 즐거웠습니다. 가을 멋지게 익히시길 바랍니다.)
*정우영 :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살구꽃 그림자⌟.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시는 벅차다⌟.
추천0
- 이전글52호/연재/윤의섭/표현의 기술 15.07.06
- 다음글52호/장편소설/강인봉/타나의 달 15.07.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