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2호/한시산책/서경희/눈 내린 겨울 강을 바라보며
페이지 정보

본문
한시산책
서경희
겨울의 문턱에 서 있으면 알지 못할 외로움이 스며든다. 그 외로움은 내게 처해진 여러 가지 상황이 불리할 때 더욱 가중된다. 유난히 추울 것이라고 미리 여러 번 예고했지만 발목부터 시리다. 아래로 부터 시려오는 겨울.
겨울시의 백미는 당나라 중기 시인인 유종원柳宗元(773~819)의 ‘강설江雪’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보여 지는 한 폭의 설경도雪景圖를 연상시킨다. 어떤 이는 “산에서 바라보는 실제 설경 속에 시인의 고독한 심경을 절묘하게 담아냈다.”고 평하기도 했으나, 유종원의 고매한 심상을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유종원은 자가 자후子厚이며 장안長安에서 태어나 21세에 진사에 합격했다. 이후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고, 진보주의자인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여했다. 그러나 왕숙문이 실각하여 죽음에 이르자, 33세 이후 호남湖南 영주永州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했고, 다시 광서廣西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다가 4년 후인 47세에 운명했다. 그는 유주 백성들의 교화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대에도 훌륭한 지방관리로 각인되었다. 본적이 하동河東이어서 유하동柳河東이라고도 하며, 유주자사를 지냈으므로 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불린다.
유종원은 산수시 부문에서는 도연명과 비교되었고, 산문에 있어서는 한유와 더불어 당송 8대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고문부흥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송대의 소동파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소동파가 만년에 도연명과 유종원의 시문집을 항상 곁에 두었다고 한 것을 보면, 도연명과 유종원의 인생관에 상당히 경도되었던 듯하다.
온 산에는 새들이 날기를 멈췄고
모든 길에는 사람의 자취 끊어졌다.
외로운 배위에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 내린 찬 강에서 낚시질 한다.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멈추어 서 있다. 산과 길에 오가던 생명체들도 움직이지 않는다. 생물의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음은 추위와 눈 때문이다. 작가의 시선은 하늘에서 산, 길 그리고 강으로 옮겨진다. 나는 새가 있어야 할 하늘은 비어 있고 산은 고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엔 인간의 발자취도 없다. 시인의 귀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시인의 눈에는 하얀 눈이 흩날리거나 쌓인 백설의 자연세계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산은 동물들의 터전이며 그들의 영역이다. 산 속의 숲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돌아와 쉬는 곳이다. 길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삶의 현장을 연결해 주며,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를 중앙으로 이끌기도 한다. 강은 배들이 오가고 어류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겨울 강은 쉬이 얼지 않는다. 그 곳엔 마지막 희망이 있다.
적막강산에 홀로 남겨져 보았는가? 그 처절한 외로움은 경험한 자만이 안다.
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생명이 되어 보았는가? 절絶과 멸滅은 관념적인 외로움을 경험한 시인의 고매함을 드러낸다.
도롱이와 삿갓 속에서 숨을 죽이고 낚시를 드리운 사람. 그 따스함을 품은 이는 인생의 어느 부분에선가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노인이다. 모두들 집 안에서 눈과 추위를 피해 있는데 이 노인은 눈비를 막는 도롱이와 삿갓으로 무장하고 배를 타고 강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그의 행위는 우매함이 아니라 강직함이며 저항정신을 간직한 올곧음이다. 시인의 외로움은 단순한 인간의 외로움이 아니다. 외로움의 극점에서 터득한 인생관. 그것은 유유자적으로 이어진다.
아래에 소개하는 유종원의 또 다른 산수시 ‘계거溪居’의 내용을 보면 그가 남쪽 유배지에서 외로움으로 점철된 삶을 영위한 것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래도록 관직에 매여 있다가
다행히도 이 남녘땅에 귀양 왔네.
한가로이 농가 이웃에 의지해 사니
어쩌다 산림에 묻힌 처사 되었네.
새벽엔 밭 갈며 이슬 젖은 풀 뒤엎고
밤이면 배 저어 시내 돌 울리네.
오가며 만나는 이 없으니
푸른 남쪽 하늘에 길게 노래 불러보네.
久爲簪組累 幸此南夷謫(구위잠조루 행차남이적)
閑依農圃隣 偶似山林客(한의농포린 우사삼림객)
曉耕飜露草 夜榜響溪石(효경번로초 야방향계석)
來往不逢人 長歌楚天碧(내왕불봉인 장가초천벽)
그의 시와 산문을 통해 유교, 불교, 도교를 섭렵한 시인의 인생관을 고려해 보면, 결코 그의 삶을 불운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을 듯하다. 극단적인 분노를 시로 승화시킨 시인의 시를 접할 때마다 느낀다. 부디 세 면의 사상을 고찰해 본 후에 다시······.
*서경희 : 한국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한성대학교 강사, 가톨릭 대학교 강가, 성균관대학교 강사 역임. 박사논문 ⌜삼국유사에 나타난 화엄선의 문학적 형상화⌟, ⌜영조 어제 해제⌟,⌜열하기행시주⌟공역. 현재 재단법인 실시학사 문학팀 ⌜정산집⌟ 번역 수행.
추천0
- 이전글52호/책 크리틱/박성현/창조적 행위의 시간성, 혹은 '시'라는 세계의 뒤틀림 15.07.06
- 다음글52호/연재/윤의섭/표현의 기술 15.07.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