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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책 크리틱/박성현/창조적 행위의 시간성, 혹은 '시'라는 세계의 뒤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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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4,663회 작성일 15-07-0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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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행위의 시간성, 혹은 ‘시’라는 세계의 뒤틀림
장종권, 호박꽃나라, 리토피아시인선, 2013, / 천선자, 도시의 원숭이, 리토피아포에지, 2013.
박 성 현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은 자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다. 그것이 난청이나 몰이해로 귀결될지라도, 그 세계는 선험으로 존재하는 ‘현실-세계’의 균열이고, 불편이며, 자기반성이다. 특히 ‘시’는 시인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균열과 불편, 자기반성의 강도가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훨씬 높다. 사회가 시인에게 일정한 도덕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이, 다시 말해 시인이 자신의 시와 더불어 자신의 사회적 삶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은 이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태도가 ‘문학성’ 혹은 예술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이지만. 
시를 쓰는 행위는 문장을 유려하게 직조하거나 숱한 비유와 상징으로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대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라는 특수한 언어의 사용을 통해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다른 세계와 충돌하게끔 하는 것이다. 시인의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와 더불어 피어나고, 그 속으로 스며들며, 마침내 그것과 함께 명멸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계는 시 속에서 분열하고, 분열된 세계는 시인의 정신에서 다시 창조된다. 후술하겠지만, 장종권 시인과 천선자 시인이 획정한 세계가 유독 디스토피아로 기울어지는 것은 분열된 세계를 ‘세계-속-에서’ 직접적으로 계열화했기 때문이다(두 시인은 철저하게 삶의 완고한 구심력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만들었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시인의 창조적 행위는 반드시 ‘시간’과 결부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시인의 도덕적인 책무가 투영된 ‘반성적인 세계’이며, 공간의 재구성은 부차적인 문제기 때문이다(사물의 재구성은 배치의 문제에 해당한다. 배치가 달라진다고 사건이 다르게 계열화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물의 재배치에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은 순전히 ‘이념’의 권리에 속한다). 시인의 성찰은 우선 동일한 과거가 반복되지 않도록 현재를 정지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벤야민). 이 과정은 사건이 배태된 ‘시간-운동’과 직접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는 바, 시인의 창조적 행위는 시간의 유연한 흐름과 급격한 단절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컨대, 장종권 시인이 “누가 이중섭을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았을까. / 황금 제단에 탐스러운 천도화를 놓아두었을까. / 보는 이마다 간절하게 낙원으로 끌고 갔을까.”(「오늘이라는 낙원」)는 물음을 시의 화두로 삼았을 때, 기표로써의 ‘이중섭’는 관습화된 언어-이미지를 멈추고, ‘십자가’라는 전혀 이질적인 기표로 수렴된다. 정지된 것은 이미지일 뿐이데, 급격하게 붕괴되는 자리에 만들어지는 것은 ‘세계’다. 
창조적 행위의 시간성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에서 시간을 세 가지 층위로 파악한다.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삶에서 ‘미래’와 ‘과거’의 시간적 방향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현재만이 구체적인 실제로 감각된다. 다시 말해 과거는 ‘기억’에서 출발하고, 미래는 ‘기대’라는 감정의 기울어짐으로 수렴된다. 현재는 그 ‘사이’에서만 뚜렷이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라는 사이를 중심으로 하여 ‘시’는 세계로 확장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과거의 삶이 기억을 통해 현재로 펼쳐지는 과정에서 서사가 구축된다는 점이다. 리쾨르는 ‘이야기가 시간의 경험을 서사화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된다’고 강조한다; “시간은 서술적 방식으로 진술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시간이 되며, 반면에 이야기는 시간 경험의 특징들을 그리는 한에 있어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시간은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현존을 증명하며, 이야기는 시간 속에서만 의미를 생성한다. 이야기와 시간은 서사와 서정의 변증법으로 확대되며, 이 과정에서 ‘살아 있는 은유’가 생성된다. 우리가 장종권 시와 천선자 시에서 만날 수 있는 ‘이질적임’ 혹은 ‘새로움’은 바로 창조적 행위의 시간성을 기반으로 한 언어의 변이(變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서사의 충격 혹은 은유의 불편함 : 장종권 시집 호박꽃 나라

앞서 말한 것처럼 리쾨르는 ‘살아 있는 은유’를 주체의 구체적 삶 속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한 형식으로 간주한다. 특히 은유가 삶의 구체성(‘이야기’)과 만날 때, 새로운 것이 언어 속에서 솟아난다고 강조한다. 이때 새로운 것이란 술어의 형태로 제시되는 알려지지 않은(혹은 이질적인) 삶이다; “이야기를 은유에 접근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질적인 것의 종합이다. 그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아직 말해지지 않고 또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언어 속에서 솟아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살아 있는 은유, 즉 술어 기능의 새로운 적합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작위적인 줄거리, 즉 우연적 사건들의 배열을 통한 새로운 적절함이다.”(시간과 이야기1) 그가 주장하듯, 은유(시)가 이야기(서사)와 결합하는 것은 ‘이질적인 것의 총합’에 해당한다. 그 두 개의 이질적인 것이 결합할 때 문학적 새로움이 생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된 장종권 시편은 이야기와 서정을 교묘하게 교집하고, 풀어냄으로써 ‘살아 있는 은유’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시인이 집중한 ‘이야기’는 지금-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며, 우리가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할 충격의 서사다. 

누가 이중섭을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았을까. / 황금 제단에 탐스러운 천도화를 놓아두었을까. / 보는 이마다 간절하게 낙원으로 끌고 갔을까. / 망우리 그의 하얀 비석에는 이끼도 자라지 않아 / 빈 무덤에 이름 없는 들꽃들만 무더기로 피어 / 흘러가던 구름도 궁금하면 때때로 돌아보지. / 누가 이중섭을 산채로 십자가에 매달았을까. / 눈먼 민중들에게는 어떤 비명도 들리지 않아. / 파도 소리에 귀 막고 등 돌려 벼랑으로 가네. / 벼랑 끝 도열한 십자가는 오늘도 경매가 한창이고, / 경매가 끝나면 또 다른 이중섭이 십자가로 가네. / 얼굴 다른 이중섭이 도살장 소처럼 끌려가네. /보는 이마다 낙원으로 향하라 시든 꽃비 내리네.
- 「오늘이라는 낙원」 전문 

한국 근대미술을 통해 이중섭만큼 굵직한 족적을 남긴 화가는 드물 것이다.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저항해야 했던 까닭에, 그의 그림은 디스토피아의 절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를 모티프로 한 무수한 그림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역사의 잔인함을 외면하지 않았고(뼈만 앙상하게 남은 소는 바로 우리 민족의 궁핍한 현실이다), ‘가족’을 대상으로 한 그림에서 보이듯, 주체와 타자가 서로 스며들어 공존하는 낙원을 꿈꾸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는 파국과 낙원을 그림에 녹아내리게 함으로써 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다. 때문에 시인이 ‘이중섭’에게서 순교자의 이미지를 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중섭과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전후(戰後)의 비극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후 사람들은 그림에서 역사를 제거하고, 오로지 ‘화폐’라는 물신(物神)의 가치만 남겨 놓았다. 돈의 가치를 통해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파국이며, 폭력이다. 더욱이 “망우리 그의 하얀 비석에는 이끼도 자라지 않아 / 빈 무덤에 이름 없는 들꽃들만 무더기로 피어” 있는 현실은 비극의 무게를 더욱 가중한다. 사람들은 이중섭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기어이 그의 그림을 역사 밖으로 빼낸다; “벼랑 끝 도열한 십자가는 오늘도 경매가 한창이고, / 경매가 끝나면 또 다른 이중섭이 십자가로 가네 / 얼굴 다른 이중섭이 도살장 소처럼 끌려가네.” 한국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이중섭은 자신의 그림이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이중섭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중섭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채 ‘경매’라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예술가들이 어디 한 둘일까. 돈에 “눈먼 민중들에게는 어떤 비명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간을 넣었다 뺐다 하”고, “인간이 인간의 로봇이 되”며, 또한 “모든 인간들이 모든 로봇이 되”고, “모든 인간들이 마루타가 되는 시대에”서 예술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토끼해에 1」). 이에 대해 시인은 말한다. 현실이 이러해도 예술은 스스로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누가 이중섭을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았을까.”라고 직설하며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자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만든 세계는 현실과 상동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불편이고 풍자다. 

강아지를 데려다가 성대를 손질했지요. / 꼬리를 살랑이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 짖어대는 건 너무 시끄럽거든요. / 막무가내 발길질을 해도 / 죽기살기로 달라붙으니 사람보다 낫군요. / 혼자 돌아오는 집에 살아있으니 / 잡귀는 없다 싶어 편한 잠을 잡니다. / 이참에 항문을 아예 꿰매버렸습니다. / 처치 곤란한 개똥 냄새가 이유입니다. / 밥은 안 주면 그만이지요. / 안 주면 내놓을 일 없지요. / 그래도 당분간은 반갑기 그지 없네요 / 현관문만 열면 와락 달려드는 / 그놈만 한 사람이 세상에 없지요. / 항문이 막힌 강아지가 춤을 춥니다
- 「만화 2」 전문 

‘이중섭’과 그의 그림을 역사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사람들은 그림을 (화폐와 같은) 물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도대체, 이중섭이 거세된 「흰 소」라니! 이중섭과 그의 그림과의 관계는 상품과 인간의 관계를 폭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인격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 상품-인간의 관계망은 사회적 관계의 물신화로 이어지며, 필연적으로 인간관계의 물신화로 귀착된다. 전 근대 사회에서 상품(혹은 재화)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가시적인 반면,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될수록, 그러한 관계는 현실의 이면으로 은폐되고 불가사의해지는 현상이 이를 반증한다. 요컨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람들에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사회적 관계가 상품들의 관계와 같은 추상적이고 비의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페티시즘’(fetishism)이 일상적인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작동하고 있다. 위 시에서는 사람들의 폭력성을 폭로한다. 사람들은 짖어서 너무나 시끄럽기 때문에 강아지의 성대를 제거한다. 게다가 “처치 곤란한 개똥 냄새” 때문에 아예 항문까지 꿰맨다. “밥은 안 주면 그만”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로지 강아지에 바라는 것은 “막무가내 발길질을 해도 / 죽기살기로 달라붙”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강아지는 생명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고독을 대신할 ‘필요’라는 꼬리표일 뿐이다. 묘하게 「오늘이라는 낙원」에서 ‘눈 먼 민중’과 중첩된다. ‘강아지’는 생명체가 아닌, 봉제공장에서 생산된 ‘인형-이미지’로써만 존재하는 것. 이 같은 시인의 현실인식은 정치권력에 맞닥뜨려서는 더욱 비판적으로 확대된다.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백성들이 너무 많으면 다스리는 자들도 위험에 빠진다. // 처음에는 체면 때문에 빌어먹지도 못한다. / 하루, 이틀, 사흘, 계속 먹잇감만 뺐어버리면 / 드디어 저들은 속이고, 훔치고, 뺏고, 싸우기 시작한다. // 이즈음에 법을 발동시키면 세상은 적절하게 고요해진다. // 죄수가 된 백성은 백성이 아니다. / 스스로 죄를 지어 죄수가 된 백성들을 위해 / 하늘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 그의 육아법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경쟁이 필요하다는 것. / 그래도 죄수가 된 허망한 백성들은 그를 믿는다. // 동문서답이야말로 만고의 진리이다
- 「망민」 전문 

오늘날 권력은 모습을 감춤으로써 사회를 지배한다. 드러난 권력은 관습화된 상징에 불과하며, 그들은 더 큰 권력이 ‘어쩔 수 없이’ 혹은 ‘의도적으로’ 보여줘야 할 부분일 뿐이다. 일례로, 대통령은 권력 자체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지지하는 더 큰 세력이 ‘자신이-여기에-있음’을 과시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감시하고 처벌하며, 권력에 복종하게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판옵티콘(panopticon)으로 압축되는 이러한 권력 작동 시스템은 근대 사회의 정치 구조와 맞물린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이와 관련해 시인은 「낯선, 혹은 낯익은」이란 시에서 언제, 어디서고, 조건과 관계없이 작동하는 ‘권력’을 묘사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그와 마주친다. / 골목길 들어서다가 그와 마주친다. / 꽃집에 들렀다가 그와 마주친다. / 낯익은 그의 얼굴이 낯설게 스쳐간다. (중략) 아침에도 저녁에도 / 자나 깨나 / 어디서나 스쳐가는 그를 만난다”. 또한 「강력한 그」에서도 암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포로입니다. 그의 하찮은 반찬거리입니다. / 나는 노리개입니다. 그의 변함없는 일상입니다. / 신에게는 있는 용서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권력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고자 하는 자본주의 경제원칙을 정확하기 적용한다. “백성을 굶주리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권력은 최대의 효과를 창출한다. 우선 백성의 수를 조절함으로써 ‘다스리는 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두 번째, 굶주린 백성들은 양식을 위해 서로 “속이고, 훔치고, 뺏고, 싸우기 시작”하게 되며,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배가 된다. 세 번째, 백성의 ‘아수라’에 ‘보이는 권력’ 즉 법을 발동시키며 백성의 정신을 장악한다. 죄와 죄가 아닌 것의 차이는 권력의 적절한 자기 배분에 불과하다. 권력은 “스스로 죄를 지어 죄수가 된 백성들을 위해 / 하늘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백성을 죄수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양분한다(“죄수가 된 백성은 백성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죄수’마저 권력을 추종하도록 개조함으로써 그것을 완성시킨다. 여기까지가 이 시의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그의 육아법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경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삽입함으로써, 이 시가 권력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임과 동시에 ‘지금-여기의-권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문장은 교묘하게 IMF 이후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해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끝없는 경쟁에 돌입하게 한 상황과 유사하다.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듦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속이고, 훔치고, 뺏고, 싸우게 만들어 버린 것. 시인은 일침은 분명하다: “동문서답이야말로 만고의 진리이다.” 다시 말해, 권력이 옭아맨 (‘경제논리’라는) ‘문제의 프레임’에 갇혀 있지 말라는 뜻이다. 
「베스트 셀러」도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싸구려 밥집이 전부였던 동네에 “건물도 보기 좋게 꾸미고 동시에 동시에 친절하”기까지 한 냉면집이 생겼다. 냉면집이 우선 집중한 것은 겉모양과 이것을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 ‘친절’이다. 다음에 경품과 서비스 등을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냉면 맛도 일품이지만 값도 싸다는 것이다. / 게다가 잘 삶은 돼지고기 몇 점까지 얹혀 준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그 냉면집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주변에 냉면집이 생기고 상권이 형성되었지만, 손님은 오직 그 집 문 앞에서만 줄을 선다. 다른 집의 냉면 맛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까닭이다. 권력은 백성들을 길들인다. 얼마 안 되는 양식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게 웬 맛이냐. 지랄 같네. 그의 생각이다. / 개점 때보다 한참이나 못한 냉면 맛이지만 / 그 집 앞에는 오늘도 기다란 줄이 서 있다. / 이 동네 입맛이 되어버린 까닭 때문이다.”
「망민」의 ‘동문서답’이라는 엉뚱한 화두는 시집 곳곳에 나타나며, 언어유희를 통한 풍자적 경향을 드러낸다. 가령, “반달은 반달도 못 산다”거나 “참말이지 보름달은 보름도 못산다”(「요즘의 달」)는 부분이나. “개나리꽃이 지랄 같이 피었습니다. / 아무도 정색하지 않는 갈보 같은 얼굴입니다. / 하필이면 개, / 사실은 개조차 바라보지 않는 똥꽃입니다. / 뱀구멍, 쥐구멍 사이로 잡년처럼 머우대가 자라고 / 수십 년 묵은 시누대가 죽지도 않고 살아나려 합니다.”(「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부분이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꿈꾸고, 창조한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 

복수를 꿈꾸세요. / 미물들도 꿈틀거리는 욕망으로 세상을 삽니다. / 입술 옹골지게 깨무세요. 차가운 복수의 칼 치켜드세요. /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신을 분노케 하세요. // 죽음보다 더한 절망도 신이 빚어낸 꽃입니다. / 시퍼런 복수의 칼도 뽑으면 어느새 꽃이 됩니다. / 참담한 절망도 눈감으면 금방 황홀한 꽃이 됩니다. / 벌레의 꿈틀거리는 욕망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 그의 가슴에 시퍼런 칼이 꽂히고, / 그의 분노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도, / 눈 감았다가 뜨면 송이송이 만발하는 꽃이 됩니다. / 당신의 무서운 칼도 알고 보면 아름다운 꽃입니다.
- 「당신의 칼」 전문 

시인은 ‘복수’를 꿈꾸면, “미물들도 꿈틀거리는 욕망으로 세상을” 산다고 말한다. ‘복수’라는 말에서 우리는 물신화된 세계, 더 이상 인간의 존엄을 되돌아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는 「감자밭」의 경우 “그녀의 싱싱한 감자밭은 / 늘 뜨거운 햇빛과 싸움을 벌이며 / 그녀와 함께 시시각각 썩고 있다.”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신을 분노케” 할 유일한 방법이 시인의 정신과 문장 속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주가 들어 있어야 비로소 사랑이”(「봄의 나라 3」) 되는 세계이고, “내가 어머니를 열고 태어나는 순간”(「오월의 밤」) 내게로 온 소리이며, “어둠의 속성이 사라지면 그 속에, 어머니가 앉아있”(「달빛」)는 적멸이다. 시인은 “핀 꽃은 시든 꽃의 자리를 메우고 / 시든 꽃은 무심히 다음 꽃을 준비한다.”(「꽃들의 거래」)고 말한 바 있다. 꽃의 시간 속에서 생과 사의 비밀을 본 것이다. 시간, 그것은 소멸의 은유지만, 동시에 생성의 은유이기도 하다. 한 편의 시는 우주의 무게와 맞먹는다. 그것은 시가 시인의 일생을 담고 있고, 시인이 살고 있는 시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경험했던 모든 시간들이―씨줄과 날줄이 얽혀 옷감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정교하게 얽혀, 소담스럽기도 하며, 웅장하기까지 한 교향악, 바로 그것이 한 편의 시라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본다면 시는 개인의 발자취며 냄새이고, 사진이며 소리다. 그러나 시는, 그 시리고 붉은 열매를 세상에 내놓을 때, 사회적 소통으로 확대된다. 관점에 따라서는 공적 ‘기록’이다. 우리가 시는 즉자적(卽自的)인 것이 아니라 대자적(對自的) 실존으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의 내부, 혹은 ‘세계’라는 모조-이미지들; 천선자 시집 도시의 원숭이

천선자 시인이 세상에 내놓은 시는 그녀가 살아온 경험이 응결되고 단단해진 거대한 서사다. 그 서사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라는 삶의 주관자로서의 당당함이고, 그녀가 경험했던 수많은 시간들을 예술의 문장으로 직조한 미적 장인으로서의 섬세함이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당당함과 섬세함을 서사의 축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생활의 소소한 일들이 시로 승화되는 그 지점에서, 천선자 시인의 ‘세계’는 열린다. 
하지만 그 세계는 광명으로 가득 차 사람들이 희열과 열락을 느끼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시인은 “허공에서 돌멩이가 자란다. / 삶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 그 돌멩이 자라서 바위가 된다. / 이것이 세상사는 법이라고, /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지면서 / 머리 꼭대기에 내려앉는다.”(「돌멩이」)고 고백하는데, 이로 미루어 시인의 세계란  ‘머리 꼭대기’를 내리누르는 돌멩이의 무게만큼이나 답답하고 처절한 삶의 이면이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생의 부재를 깨닫는 순간 찾아온다.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의 심정이란 더위를 먹고 사는 거대한 맹수야. 야생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고 육식의 욕구로 채운 벌건 얼굴이, 사바나의 열대야를 만들어. 우기가 가고 타들어가는 맹수의 영역, 숲이 사라진 초원의 지표면은 용광로로 변하고 불새가 날아올라. 물 한 모금을 위해 동족의 등을 밟고 앞으로 돌진하는 코뿔소, 강을 찾아가는 누우 때의 걸음엔 대지의 거친 숨소리, 흔적으로 남아있는 삶의 터에는 시원했던 바람의 무덤만 무성하고, 마른 강바닥에는 퇴색한 열정의 찌꺼기들, 맹수의 천국이야. 시침과 분침의 교차점에서 멈춘 사바나, 태양의 붉은 발바닥 위에서 발톱을 세우고 송곳니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빛의 그림자만 물어뜯어.
- 「하루, 하루」 전문 

당연하지만,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결국 몸의 이곳저곳을 죽음과 함께 삶을 마친다.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란 여성성이 조금씩 사라져버려 성적(性的)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이다(남성도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의, 그 싱싱하고 탐스러운 몸이 거품처럼 붕괴될지 모르는 위기감 때문에, 그녀는 하루하루 더욱 맹렬하게 돌변한다. ‘더위를 먹고 사는 거대한 맹수’로서 말이다. 죽음이 문턱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욕구로 충만해지며, 과거는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숲’이 과거의 영욕이 되어버렸고, 남은 것은 그것에 집착하는 ‘용광로’와 같은 자신이다. 그녀가 “야생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고 육식의 욕구로 채운 벌건 얼굴”로 하루를 견디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싸워야 하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물 한 모금을 위해 동족의 등을 밟고 앞으로 돌진하는 코뿔소”처럼, 그리고 ‘강을 찾아가는 누우 떼’의 거친 숨소리처럼, 그녀는 하루하루 지워지는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사진을 인화하듯 과거를 현상한다. 이때 기억은 분리수거된 ‘양털잠바’로 표상되거나(“분리수거하는 날 사각통 속으로 던져지나봐. 흙탕물이 튄 구겨진 신문처럼 낡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더니 주린 배를 채우려는 어둠이 입을 달싹거리고, 토끼를 잡아먹고 있는 고요의 등 뒤에서 외로움이 웅크리고 있나봐.” 「양털잠바의 꿈」), ‘인형’에 투사하거나(“검은 피부에 버드렁니를 드러내고 웃는 못난이 인형. / 멜빵청바지 끈 한 쪽을 늘어뜨리고 웃는 못난이 인형. / 들쑥날쑥 자른 단발머리에 팔짱을 끼고 있는 못난이 인형. / 엄마를 졸라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온 못난이 인형. /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우투거니 서있는 못난이 인형” 「고독」), 혹은 ‘문턱’이라는 단자화된 상관물을 통해 진행되기도 한다(“기억의 조각들 끊임없이 뇌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문턱, 밤새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뜰, 눈물의 뜰에 갇힌 문턱, 며칠 밤 자면 온다던 엄마의 목소리가 귀울음 하는 문턱, 너의 첫사랑이 떠나고 그 후 몇몇 여자들이 떠나간 문턱, 까치발을 하고 눈물콧물 흘리며 너의 여자들을 기다리는 문턱, 닳아버린 문턱엔 어린 네가 살아가고 너의 여자들이 살아가지.” 「집착」). 
거의 울음에 가까운 문장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인은 연민이 아닌 본능으로 자신의 삶 속에 박제되어버린 모습 속에서 시인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조심스럽지만, 그것이 천선자가 구축한/했던 세계의 독특한 미로가 아닐까). 일단 그것을 세계의 ‘핵’이라 말하자. 
그 열쇠를 풀기위해 우선 살펴볼 것은 시인의 시작 태도가 암시된 건축술이다. 시인은 곳곳에서 집을 짓고 그 속에 온갖 이미지를 집어넣는다. 「맹지」에서는 ‘빌딩’을 상상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한다(“꿰맨 자리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자루의 곳곳을 타고 기억들이 흘러내린다. 돌돌 말린 슬픔이 별처럼 반짝이는 풀리지 않는 자루이다. 현재가치가 없는 자루이다. 미래가치가 없는 자루이다. 혹시, 한 귀퉁이 터진다면 빌딩 하나 세워질 자루이다”). 「코트 속의 남자」에서는 ‘새로운 DNA로 만들어진 패스트푸드점’ 곧, “태양의 자궁”을 찾아가는 남자가 비판적으로 그려지고 있다(“그가 태양의 자궁을 찾아 간다. 지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자신의 DNA를 생각한다. 가방 깊이 넣어 둔 마지막 자존심인 트런치코트를 입고, 태양의 DNA가 화석으로 남아  살아 숨 쉬는 패스트푸드점으로 간다”). 
또한 「허망한 영광의 알레고리」를 보면, 시인은 “구름안개 스멀거리는 능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목에 앉은 까마귀의 눈빛과 마주치며 시선의 동선이 흔들리는 지세가 높은 곳, 임의대로 사용하다 처분할 수 있는 나대지에 터를 닦고 너를 위한 건축설계를 한다.”고 쓴다. 집이란 ‘우리의 최초의 세계’(바슐라르)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아무리 남루한 집이라도 아름답다. 집은 피난처이자 은신처이며, 기억할 수 있는 사물들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집은 열려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닫혀 있는’ 개인의 은밀한 세계를 표상한다. 시인이 집을 짓는 것은 이러한 공간을 만들고자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불편하다. 

측량을 한다. 일정한 면의 두 지점 사이에 기둥을 세운다. 수직거리와 수평거리의 비를 맞춘다. 내밀한 언어의 뿌리를 어루만지듯 내력벽을 쌓는 흙손, 필연의 형영形影한 등걸로 지붕을 얹는다. 죽은 이를 위해 오페라 무대가 있는 정원을 만든다. 선혈의 장미를 심는다. 가시로 화관을 엮어 나들문에 걸어 둔다. 장미 꽃잎으로 길을 덮는다. 너를 초대한다. // 사냥개처럼 달려드는 안개 속을 달린다. 과속으로 달려가는 바람을 제친다. 길 위에 나풀대는 은빛분리대, 노란점선이 승용차를 가볍고 투명하게 통과한다. 가로등의 소리 없는 비명이 등 뒤로 사라진다. 접도구역에서는 젖은 나뭇잎들의 실핏줄이 터진다. 검은 숲 가름목을 지나 멍에목에 접어들자 거리목을 지나는 고라니의 번뜩이는 눈망울을 본다. 너를 납치한다. // 지하실 문을 열면 무영등 밑 벽난로에서는 장작더미 불춤을 춘다. 벽면 실험대 위에는 플라스크며 실린더 크고 작은 수술용 메스 날과 풀린 붕대가 어지럽게 놓여있다. 시약장 안에는 식염수에 담긴 돼지의 심장, 동물세포유사분열 몇 개가 들어 있다. 그 옆엔 반이 빈 무색투명한 포르말린으로 채워진 유리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너를 원한다. // 계단마다 너의 심장을 깔아놓는다. 너는 나를 위해 남겨둔 보류지, 영원한 보류지, 수평투영면적으로 내려다본다. 바닥에 내 마음을 펼쳐놓는다. 푸른 입술, 철문처럼 굳게 닫힌 눈꺼풀, 날카로운 콧날을 하고 있는 너의 얼굴을 석고로 본을 떠 지하실 머릿돌에 새겨 넣는다. 너는 거기에 있다.
- 「허망한 영광의 알레고리」 부분

이 시를 보면 불편한 이유가 나타난다. 시인이 짓는 집은 산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자신의 내밀한 과거가 아닌 ‘죽은 사람’인다!). 시인이 ‘죽은 이를 위해’ “오페라 무대가 있는 정원을 만”들고, “선혈의 장미를 심”으며, “가시로 화관을 엮어 나들문에 걸어” 두어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집으로 가는 길도 을씨년스럽고, 다소 그로테스크하다. 안개는 ‘사냥개처럼 달려들고’, 접도구역의 ‘젖은 나뭇잎들은 실핏줄이 터져 검은 피를 흘리고 있으며,’ ‘거리목을 지나는 고라니마저 굶주린 짐승처럼 눈을 번뜩인다.’ 집의 지하실은 더욱 음습하다. “벽면 실험대 위에는 플라스크며 실린더 크고 작은 수술용 메스 날과 풀린 붕대가 어지럽게 놓여있다. 시약장 안에는 식염수에 담긴 돼지의 심장, 동물세포유사분열 몇 개가 들어 있다. 그 옆엔 반이 빈 무색투명한 포르말린으로 채워진 유리병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이 모든 풍경이 수백 년 방치된 흉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왜, 시인은 기억의 핵을 찾는 과정에서 폐허를, 그것도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흉가에 맞닥뜨렸을까. 미래는 온전히 가능성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는 경향이 있다(기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말은, 같은 사건을 접했던 사람들이라도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지평에 따라 과거를 다르게 꾸미고 해석하는 무의식적 의지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기괴한 것, 원시적이고 흉측하기까지 한 ‘미래의-죽음’에 집중한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가 그러했다기보다는 미래의 어느 순간 닥쳐올 어떤 것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라는 명민하지만 불길한 예감이다. 뿐만 아니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죽음’의 상동성이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가능성의 박탈이며 죽음의 은유가 되는 것. 때문에 시인이 죽은 사람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은 시인이 기억의 핵을 찾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우리가 천선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불편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천선자 시인의 시적 잠재의식이 시작된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원시적인 것의 무한한 공포가 다시 시로 체화되는 것. 여자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그것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지워지고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통해, 죽음이라는 거대한 점입(漸入)을 완성하려는 집요하면서도 반성적인 태도에 가깝다. 하나의 확고부동한 사실은 다른 현상들의 정확한 의미를 일깨운다. 핵은 일종의 ‘문턱’이다. 

폐교로 만든 곤충박물관 긴 복도를 따라 놓인 유리 상자 안에 집을 짓고 있는 왕거미, 교미를 끝내고 수놈을 잡아먹는 암사마귀, 먹이를 먹는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광대노린재를 지나, 여러 나라의 나비와 나방이 전시된 이학년 오반 교실로 들어간다. 지중해 바닷빛의 날개를 가진 열대우림에 사는 모르포 나비 뒤의 나방, 뒷목덜미에 그려진 원숭이의 얼굴, 뚫어져라 쳐다보는 우수에 젖은 눈빛, 축 쳐진 어깨, 낯익은 얼굴은 거울 속 나의 얼굴, 밤마다 깡술로 비굴함을 삼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걷는 도시 뒤에 몸을 숨긴 탈을 쓴 원숭이, 달콤한 맛에 맛들이고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원숭이, 눈물이 없는 원숭이, 생의 부패한 조각들을 파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뱃가죽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속에서 내장도 쓸개도 빼주고 사는 원숭이, 아름다운 도시의 원숭이.
- 「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 전문

돌멩이가 짓누르는 힘으로 뒤틀리고 압화(壓花)된 기억은 시인의 건축술로 환원되는데, 그것은 산 사람을 위하거나 과거를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 미래의 어떤 것에 대한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예감의 내부에 장치된 ‘사물-이미지’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이 ‘핵’을 찾는 두 번째 열쇠다. 
「허망한 영광의 알레고리」에서는 해부실을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들이 있었는데(‘플라스크며 실린더’, ‘수술용 메스 날’, ‘식염수에 담긴 돼지의 심장’, ‘동물세포유사분열 몇 개’, ‘포르말린으로 채워진 유리병들’), 「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에는 인간에게 전시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곤충박물관이 제시된다. ‘박물관’은 과거의 것들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과거의 시간을 간직한 채 지금 남겨져야 할 것들을 보존하는 집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허망한 영광의 알레고리」에 제시된 집과 유사한 이미지다. 이곳에는 “유리 상자 안에 집을 짓고 있는 왕거미, 교미를 끝내고 수놈을 잡아먹는 암사마귀, 먹이를 먹는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광대노린재”가 있고(기묘하게도 상당히 잔인하고 공격적인 포즈의 곤충들이 보인다), “여러 나라의 나비와 나방이” 박제된 채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열대우림에 사는 모르포 나비 뒤의 나방”, 곧 ‘탈박각시나방’을 본다.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에 장식되기도 한 이 나방의 뒷목덜미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보이는데(포스터에서는 해골 이미지다), 시인은 ‘원숭이의 얼굴’을 본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우수에 젖은 눈빛, 축 쳐진 어깨”의 원숭이는 왠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로, 바로 시인이 거울에서 매일 볼 수 있는 자신의 얼굴이다. “밤마다 깡술로 비굴함을 삼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걷는 도시 뒤에 몸을 숨긴 탈을 쓴 원숭이, 달콤한 맛에 맛들이고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원숭이, 눈물이 없는 원숭이, 생의 부패한 조각들을 파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뱃가죽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속에서 내장도 쓸개도 빼주고 사는 원숭이”이다. 폐허라고 해도 무방할, 혹은 죽음이라 해도 조금도 틀리지 않을 자기 부정의 이미지들이다. “금빛으로 장식한 빌딩은 무너진 나의 꿈, 환각의 늪, 환청의 늪, 암울한 불빛들”(「악어의 가방」)과 같은.  
그렇다면, 시인의 집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부정의 이미지는 무엇을 표상하는 것일까. 이것이 세 번째 ‘핵’의 열쇠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페티시즘과 관계가 깊다(물신성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의 부정성이다). 시인은 “가방 속에 있는, 이미지 한 장이 나를 지배하는 이율배반적인 핸드폰을, 비밀번호를 누르고 계좌번호를 누르면 자동화된 삶이 하루씩 이체되는 신용카드를, 만으로 밀려가는 심약한 눈물의 파도를 닦는 손수건을,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열쇠꾸러미를 버리고, 도시의 늪을 탈출”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가 간 곳은 ‘롯데백화점 앞’이다(「악어의 가방」). 시인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밤새 실한 놈만 달린 한 그루가 없어지고, 대형자물쇠를 매달고 시퍼렇게 질려 떨고 있는 남은 한 그루 곁에서 돋보기 낀 유리들이 눈을 빈짝이며 야간경비를” 설 수밖에 없는 공포의 극장이고(「키위나무」), “음부를 드러낸 채 입술이 갈라터지고,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소리치면서 열 시간이 넘도록 산고를 겪고 있는 그녀, 마른 아이를 낳고 있다. 혼미한 귓가에서 속삭이는 악마 시간의 탯줄이 길어지고, 양수에 빠진 노란 햇살 산허리가 온통 핏빛”(「노을」)인 ‘난산’의 기형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나무가 스스로 물관을 끊어버”(「나무, 우울증」)릴 수밖에 없는 우울한 우리의 초상이다. 
천선자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는,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다는 의미에서, 도무지 탈출구가 없는 미로다. 자본주의가 양산한 페티시즘의, 모조-이미지들이 가득한 비루하고 전도된 미래. 시인이 과거를 통해 본 미래의 모습이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성현 : 시인. 2009년 <중앙일보> 등단. 서울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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