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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한시산책/서경희/가을 저녁 술 한 잔의 정취가 시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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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8,366회 작성일 14-08-0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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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산책/서경희/

가을 저녁 술 한 잔의 정취가 시를 남기다

 

 

근래에 창의교육을 강조하다보니 필수적인 암기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세대가 당연히 외웠던 역사 인물과 시 구절 등을 요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린 시절에 익힌 예절과 말씨, 솜씨, 암기 내용은 평생 인격의 한 부분이 된다.

 

여고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시절, 내 목표는 한시 하나라도 먼 훗날 기억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한자를 배웠지만 한시 하나도 외우지 못하는 나를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한문 교과서에 수록된 한시를 훑어보니 도연명陶淵明의 시가 첫 번째로 눈에 띠었다. 학생들에게 「음주飮酒」라는 제목의 시를 외우게 한다는 것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소동파가 ‘채국동리하彩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구를 극찬하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명시였기 때문에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다음 시는 도연명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음주」시 20수 가운데 제 5수이며,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잡시雜詩」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고문진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에 속한다. 선조가 율곡선생에게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묻자 시경, 서경, 고문진보를 읽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이 책은 요즘 학생들의 글쓰기 교본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조선의 학생들인 우리 선배들이 당연히 외우던 시라고 하겠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시 율곡 선생, 퇴계 선생, 다산 선생도 외웠던 시야!”

 

사람의 경계에 집지어 살고 있으나

수레와 말 다니는 시끄러움이 없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나

마음이 세속에서 머니 사는 곳이 절로 궁벽하다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본다.

산 기운은 아침저녁으로 다 아름답고

나는 새는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이 사이에 참 뜻 있으니

말하고자 하나 이미 말을 잊었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결려재인경 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문군하능이 심원지자편)

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

此間有眞意 欲辨已忘言(차간유진의 욕변이망언)

 

오두막은 자신의 집에 대한 겸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경계란 성 밖이나 외곽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성안의 도회지를 의미한다. 그 곳엔 당연히 수레와 말이 다니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세속의 일에 관심이 없고 그런 주제로 갑론을박甲論乙駁하는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니, 세속인들과는 자연히 멀어져 궁벽한 곳이 된다. 그들이 오지 않으니 시인의 삶은 유유자적하고 혼자 자작하는 시간도 늘어 간다. 동쪽 울타리에서 술에 띄울 국화를 따다가 우연히 저 멀리 남산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의 산 기운도 좋았는데, 저녁나절의 산기운도 아름답다. 하늘을 날던 새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오는 해질녘, 시인의 그윽하고 한가한 시선은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광활한 공간을 가로 지른다. 울타리 아래에 핀 국화와 꽃을 따는 자신, 저 멀리 바라보이는 산과 허공을 날다가 집으로 향하는 새. 시인은 그 모든 것에서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 없는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한다.

 

도연명은 자서自序에서 가을밤 술을 마신 뒤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고문진보에서는 “도연명이 이 시를 지어 그윽이 사는 정취를 읊었다.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마음이 멀고 사는 곳이 궁벽하여 참다운 즐거움을 자득自得하니 말로 형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라고 평하였고, 소동파는 “국화를 따는 즈음에 우연히 남산을 바라본 것이니, 애당초 의도한 것이 아닌데 그 경치가 우연히 뜻에 맞은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다음 시는 소동파가 도연명의 음주시의 제 1수에 화답한 시의 일부이다.

 

나는 도선생님만 못하여

세상일에 얽히고설켰다.

어찌하여 한 번 자적함을 얻어

선생님 같을 때도 있게 되었다.

마음에 가시밭길 없으면

아름다운 곳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 가는대로 세상일 함께 하니

만나는 것에 다시 의혹이 없다.

우연히 술의 취미 얻어

빈 잔이라도 항상 잡는다.

 

我不如陶生 世事纏綿之(아불여도생 세사전면지)

云何得一適 亦有如生時(운하득일적 역유여생시)

寸田無荊棘 佳處正在玆(촌전무형극 가처정재자)

縱心與事往 所遇無復疑(종심여사왕 소우무부의)

偶得酒中趣 空杯亦常持(우득주중취 공배역상지)

 

소동파는 자신보다 더 술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자신보다 더 술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량은 지극히 적지만 술을 마신 후의 흥취를 최대한 즐긴다는 말이다. 그는 57세에 도연명이 체득한 경지에 이르러 도연명의 「음주」시 20수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음주로 인해 마음에 구속이 없는 자적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시인들이 이 가을 저녁 술 한 잔의 정취에 가슴 뭉클한 시어를 뿜어내어 난폭한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서경희∙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한성대학교 강사, 카톨릭 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강사 역임. 박사논문 삼국유사에 나타난 화엄선의 문학적 형상화, 「영조 어제 해제」, 「열하기행시주」 공역. 현재 재단법인 실시학사 문학팀 정산집 번역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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