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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오늘의 시인/허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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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116회 작성일 15-06-12 11:04

본문

허형만 대표작 5편

 

 

그늘이라는 말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년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해 머물고 싶은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손톱

 

 

강원도 건봉사 화장실 두꺼운 유리문에 손가락이 끼었다

검지와 중지 손톱에서 붉은 피가 솟았다

순간 멍했다 아득했다

짜릿한 아픔은 한참 후의 일, 희한하게 정신이 맑았다

겨울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까지 한결 더 빛나 보였다

시 쓰는 정신이 이럴 것이다

긴장과 소름, 통증과 눈물을 속으로 감추는 일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토해내는 피로 일갈하고 있는 손톱

시인으로 사는 일이 이럴 것이다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에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찍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시는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당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영혼의 눈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신작시

유산 외 4편

 

 

호적은 족보보다 한 살 적었다

족보에는 닭이라 쓰고 호적에서는 개라고 읽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현해탄을 건너온 해방둥이

어린 곁에 수리조합 측량기사 아버지는

세상을 측량하느라 잠시도 머무르지 않았다

족보보다 한 살 적은 호적 덕분에

나는 한 해 더 선생을 했다

한 해 더 받은 봉급, 그것이 유일한

무일푼의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이었다

말년에 빚내서 보내드린 일본

당신은 소원성취였으나 나는 그 빚도 유산이었다

그토록 푹푹 퍼붓던 폭설의 소한 날씨에

삽날도 박히지 않는 땅을 파는 것도

얼어붙은 땅 파기보다 더 힘든

시 한 줄로 불면의 밤을 끙끙 앓게 한 것도

무일푼의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이었다

 

 

 

 

이 늙은 나무도

 

 

이 늙은 나무도

푸른 하늘이 쓸쓸해 할까봐

보슬비 보슬보슬한 살결로

부드러운 애채 한 줄기쯤 길러내고

아, 이 늙은 나무도

달밤이 무서워 별들이 외출하지 않을까봐

달빛이 지상에 내려가기 전

아카시아꽃 향기를 뿜어 허공에 다리를 놓고

 

 

 

 

귀 무덤

 

 

나의 평화와 사랑과 안식의 심장 속

한 편짝에는 귀 무덤이 있다

오늘도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들어온 늦은 밤

하루 동안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들이 들어있는 귀를 자른다

검붉은 더러운 피 흐르는 귀를 칼칼이 씻고

또 씻어 염한다 염한 귀

귀 무덤에 안장하며 두 손 모아 고개 숙여

성모송을 읊는다 오늘도

귀 무덤엔 잘린 귀 하나 늘고

심장에서는 용서의 눈물이 고이고 있다

 

 

 

 

우물

 

 

생가를 찾아갔다

지금은 육촌 형님 내외가 사는 집

문패는 번지수만 같을 뿐

아버지 이름도 내 이름도 아닌 집

앞, 우물은 그대로인데

우물은 녹슨 뚜껑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한 때는 가족의 목숨이었던

한 생애가 하늘과 닫혀 있었다

 

 

 

 

가을의 맨살

 

 

만파식적이지 싶은 청아한 소리가 허공을 솟아오르다 말고

잠시 먼 산의 일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사이

손끝으로 튕기면 은은하게 울릴 것 같은 지평선 쪽으로

천진난만한 바람이 맨발로 신나게 달려가고

저물녘 지상은 연푸른 그림자를 드리워 별밤을 기다리고

 

 

 

 

나의 세 가지 신비

 

나에게는 세 가지의 신비가 있다. 첫째는 빛과 소리의 신비요, 둘째는 만남의 신비요, 셋째는 은총과 자비의 신비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요즘 나는 이 세 가지 신비로움을 더욱 절실하게 가슴에 품는다.

나에게 봉사하고 있는 우주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낮추어지고 눈물이 난다. 헬렌 켈러는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라는 감동적인 글에서 첫째,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둘째,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셋째,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고 당부한다. 듣지도 보지도 못 하는 사람의 이 당부가 요즘처럼 더욱 절실해옴은 무슨 까닭일까.

남들이 나의 대표 시라고 일컫는 작품 중에 「영혼의 눈」이 있다. 이태리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악을 듣고 쓴 시인데, 그 미성의 목소리와 감동적인 음악성에 온전히 침잠한 순간을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와 ‘블랙’은 바로 이러한 나의 시와 같은 맥락의 이미지이다. 빛과 소리의 신비, 나는 잠시라도 이 첫 번째의 신비로움을 잃지 않으려고 오늘도 우주 앞에 겸손하며 감사한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잘란루딘 루미가 ‘당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삼라만상과의 만남은 한 생의 커다란 축복이다. 잘란루딘 루미는 말한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곧 당신에게 향한 길이었다. 내가 거쳐온 수많은 여행은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도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당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당신 역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나는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삼라만상을 만났다. 앞으로 나의 생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몰라도 그리 만날 것이다. 이 만남이 때로 애증이 되고 때로 축복이 될 터이다. 때로 시가 되고 때로 바람이 될 터이다. 마치 실크로드와 나이아가라 폭포와 티베트에서 만났던 그 신비로움처럼.

그러나 만남은 곧 이별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만남의 신비 속에 이별 또한 신비로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유언시를 미리 써놓았다.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 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이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본시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 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 이제 가노니, 허허청청 수월(水月)의 뒷모습처럼 그냥 가노니”

나의 세 가지 신비 중 마지막, 은총의 신비는 물론 신앙에 의해 체득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빛과 소리의 신비’와 ‘만남의 신비’가 포함된 이 ‘은총의 신비’는 이만큼 나를 살아오게 해주신 모든 우주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한다. 나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한 생을 단단하게 살아오신 거대한 나무를 보면 그 나무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위대하십니다” 우러른다. 저 미치게 푸르른 밤하늘의 미리내를 바라보며 “저도 한 몸으로 흐릅니다” 빠져든다.

이처럼 은총의 신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이후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산다. 매사에 고마워 한다. 아픔도 행복으로 받아들인다. 혹여 나의 사랑의 마음이 오해로 받아들여 나의 가슴이 저릴지라도 “바람이 불면 허리가 아파오는 꽃처럼 네가 생각나는 날은 늘 이렇게 가슴이 저리단다”(「痛」 전문)고 받아들인다. 그렇다. 나의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기에 끊어야 할 인연은 빨리 끊고, 갚아야 할 빚은 빨리 갚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은총의 신비는 묘비명도 남기지 말라고 충고한다.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것, 잘못했노라고, 용서해달라고, 미안하다고, 마음 속 진정으로 빌고 미련 없이 떠나라고 타이른다. 나는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의 신비를 실천할 것이다.

 

허형만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고,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그늘이라는 말』『첫차』『영혼의 눈』 등 13권과 활판시선집 『그늘』, 평론집 『영랑 김윤식연구』『시와 역사인식』 등. 영국 IBC 인명사전 등재(2002).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역임. 국립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현재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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