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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신작특선/박현수/병뚜껑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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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박현수
병뚜껑 외 4편
어린 날
저 주름을 망치로 펼쳐
병뚜껑 딱지를 만들었지
양철소리도 맑은
동그란 딱지를 만들었지
주름을 펴면
둥근 원이 된다는 건 일종의 화두
그때 우리는
양철을 두드리는 구도자였지
이제 어떤 아이도
병뚜껑으로 딱지를 만들지 않지
이제 어떤 아이도
주름진 것들도
한때는
완전한 원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지
민달팽이
-리듬론
소용돌이무늬로
견고하게
빛나던 각질을 벗어던진 살덩이는
이제 온몸으로
흐물흐물
각질을 흉내 내어야 한다
맨살이 손톱이 되듯
내용만으로도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민달팽이처럼
안행(雁行)
우리 동네에서는
‘형아야’를 ‘새야’라고 했다
큰형은 큰새야
작은 형은 작은 새야 하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면
우리는
지상에서 저만큼 떠오른 듯했다
큰형이 앞서고
작은 형이 뒤를 따르고
나는 맨 마지막에 까불대며 날아서 좋았다
‘형’이 ‘새’가 된 경로를 추적하는
어원학도
이 비상을
멈추게 하지는 못하였다
새가 된 다음에야
우리는 떠오르기 때문이다
부고
중학교 동창이
심장마비로 고인이 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자전거포 아들
통통한 얼굴이 떠오르는데
초등학교 여름날
냇가에서 커다란 트럭 튜브를 자랑하던
그의 득의의 미소가 떠오르는데,
바로 정정 문자가 왔다
그래, 뭔가
잘못되었겠지, 하는데
장례식장이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곧 이어
다시 정정 문자가 왔다
권 씨가 아니라 손 씨라는 것이다
(내게는 처음부터 이 친구였다)
끝내 죽음은 정정되지 않았다
동네 마담과 시 읽기
시집 한 권을 읽기 위해 동네 술집을 돌아다닌다
저물녘 가을바람 때문이다
엄원태 시인의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이다
무어냐고 마담이 물어오는 것을 기다려
시 몇 편 읽어달라고 한다
추억이란, 어둠 속으로 제 그림자를 밀어 넣는 일
이라는 구절에 아, 하는 마담도 있다
생이란 도대체 난산이어서
뼈저린 고통은 저토록 공포에 질리기도 하는 것
이란 구절을 한참 내려다보는 마담도 있다
목소리가 좋다고 추켜세우자
서너 편을 연달아 읽은 마담은
시들이 지하 창고처럼 축축하다고 한다
나는 첫 장을 펼쳐 시인이 붙여온 쪽지를 보인다
안녕하세요 엄원태입니다
제가 지난 6월말에 큰 수술을 받고
근래 퇴원해서 회복요양 중입니다만
면역억제제의 투약으로 인해
한동안 더 외부접촉을 차단한 채 지내야 합니다
당연히 제가 직접 서명해서
새 시집을 보내드려야 마땅하나
부득이 이렇게 생략하게 된 점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담과 말없이 건강을 축원하는 건배를 한다
이제 가을 같은 것은 가도 좋았다
시작 메모
시에는 진화가 없다.
모든 시 쓰기는 최초의 쓰기이다. 매번 최초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시 쓰기다. 그 출발선도 견고한 반석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끈적끈적한 늪의 표면과 같은 것이다. 출발선의 수준으로 돌아오는 일조차 어렵다. 어느 순간 늪 속으로 꺼져 버리는 일도 흔하기 때문이다.
시에 진화가 있었던들 시 쓰기가 매번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만일 시에 진화가 있었던들 대가급 시인들이 발표하는 말년의 시들에 그토록 실망할 일이 있겠는가. 어떤 시인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시를 쓴다는 보증을 받을 수가 없다.
시에 진화가 없기에 시만큼 공평한 것도 없다. 기성시인이나 신인이나 시를 쓸 때마다 최초의 출발선으로 돌아가서 모두들 나란히 같이 서야 한다. 시단만큼 노장이 대접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곳도 없다. 그 출발선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고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등단 이력이 쌓여도 자신의 시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여전히 부끄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문학청년 때나 등단 20년이 지난 때나, 저녁에 쓴 시가 아침까지 마음에 드는 일이 드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좋다. 나는 매번 늪의 표면과 같은 출발선에 서는 일이 두렵고, 또 설렌다.
시는 진화의 예외지역에 있어 위대하다.
* 박현수: 시인. 문학평론가. 경북 봉화 출생. 1992년 한국일보에 「세한도」로 등단. 시집으로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평론집 황금책갈피 등이 있음.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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