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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신작특선/고우란/처절한 거짓 3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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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287회 작성일 15-07-0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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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고우란

처절한 거짓 3
     -화장花裝 
 
 
 누가 또, 죽어 가나 보다 
 때 이른 아침부터 그의 눈썹같이 생긴 까마귀가 산의 저편 뒤쪽으로 날아간다
 생生의 악보 위에 그리는 곡조가 슬프다 
 
 나는 깨끗한 물로 몸을 닦고 흰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 검은 연미복 차림으로 생기가 다   빠져 버린 얼굴에 화장을 시작한다 
 
 내 무대 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미는 얼굴이다
 
 나직이 감은 두 눈자위가 붉다 
 눈은 지금 막 씨앗을 품은 꽃봉오리 닮았다 한 겹 꽃잎을 뚫고 나오는 꽃술처럼 속눈썹이   길다 화장이 끝나면 저쪽 무대 위에서 환하게 눈을 뜰 것이다 
 
 차가운 몸을 안는 일은 슬프다 나의 두 팔이 유난히 길어진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매만   지는 내 손가락이 몹시 희다 
 
 손가락은 다시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두드리듯 이쪽의 몸과 저쪽의 몸을 오간다 등뼈가    휘도록 하강곡선을 그리는 이 몸이니 가볍게 반올림하여 나르고자 하는 저쪽 몸의 열망은   수직일 것이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저쪽의 몸이 긴장한다 다음 항해를 위해 어느 바람코   지에 돛을 올린 채로 떨며 서 있는 함선 같다 아니 다음 곡의 연주를 위해 팽팽히 줄을 매   긴 채 잠시 세워 둔 현악기 같다 저 몸은 출항의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이쪽 몸의 무게에 눌린 소리가 저쪽 몸 가벼운 소리의 날개를 때려 울리며 오르페   오가 시작 된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징검다리가 놓이고 있다
 
 나는 얼굴이 꽃봉오리처럼 살포시 눈을 감고 꽃잎 같이 순한 입술로 아흔 아홉 골짜기에    산다는 초록 깃털에 가슴이 붉은 새 소리를 죄다 끌어 모아 노을을  충분히 깔아 놓을 때   까지 지상의 색色계로 탄주하고 
 욕망이 거세된 카스트라토는 오로지 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천상의 음音계로 탄식해야    한다  
 
 아, 너무 빠르지 않게 아, 그의 손이 뜨겁게 내 몸을 만질 때 떨리던 그때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겠다 아, 너무 높지 않게 
 
 생生의 저녁 만찬에 까치들도 떼로 몰려와 수많은 눈망울을 반짝이고  
 언제나 레퀴엠은 찬란하게 끝났다 슬프다 
 나는,  




 깨진 항아리를 위한 변명


 그가 말한다 입이 꽁꽁 얼어붙어 완강하게 서 있는 텅 빈 항아리를 와장창 깨 부숴버린 적   이 있다
  
 항아리가 깨지면서 내가 아무도 몰래 꾹꾹 집어넣었던 글자들이 흘러나왔소 칠이 벗겨진    글자들이 두려워 뒷걸음치는 내 발바닥에 찰싹 달라붙었소 제기랄, 발자국을 뗀 자리에는   그 동안 한껏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들썩거리며 거품을 내뱉어 내가 걷는 거리마다 글자들   로 온통 시끄러웠소

 그랬다 거리는 글자들로 몹시 더러워졌다 나는 이런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발바닥에 묻어 번식되는 글자들은 바람을 타고 길가 잡풀 우거진 숲 속이건 아니건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 아무데나 터를 잡고 신화처럼 혹은 개불알꽃처럼 마구마구 꽃을 피워댔소 

 누가 한 번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꽃씨가 배양되어 몸속 깊이 숨어 들어간다 그 꽃은    숨어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다리가 되어 가지를 뻗고 팔이 되어  꽃을 피우고 시가 되어    너에게로 간다 어쩐다 내가 버린 글자들이 색깔 소리 냄새 맛 살갗으로 화악 번진다 그런   식으로 꼬리친다 게다가 진화한다 개미새끼알만한 글자들이 오색빛도 찬란하게 세상 바닥   에 와글와글 굴러다닌다 

 이크, 큰일났소 내가 말하는 새에 생각 밖의 여자 하나가 머리에 글자꽃을 피워 두르고 생   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소 오, 이런 그 여자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바로 당신이란   말이요 우라질 

 아직도 그가 빈 항아리 안에 머리통를 집어넣고 다 못 한 말씀이 내게 남아 있다 그래 태   초에 있는 힘을 다해 너를 사랑한다고 고래 고래 소리 지르고 나서 확 엎어놓다 생긴 일이   었다 내 몸의 일이다 그러니 속이 비었다고 뚱뚱한 항아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칫,    재미 없는 말이다




 초록뱀을 삼켜라 7


 초록뱀 한 마리가 팽팽한 수평선을 물고 꾸불꾸불 뭍에 닿아서는 녀산의 붉은 능선에 하나   둘씩 꾸불꾸불꾸불 초록물을 풀어 놓더니 새침한 산목련 봉오리 함뿍 베어 물어 하늘청 고   인 물그늘에 하나꾸불 두울꾸불 셋 넷 다섯 여섯 또 꾸불꾸불꾸불꾸불꾸불꾸불 흰 파도를   그려 넣다 
 
 그래도 하 심심하여 초가을 미인의 눈썹달까지 꾸부울 새겨놓고 꼬리치다 휘엥 사라진 월   곡月谷에 
 
 나도 따라 꾸꾸부울하게 지켜 서서 팽그르 번지는 내 마음의 못물 하나를 훔친다 




 곡우를 건너다 2


 지금 절 마당에는 목련꽃들이 숫기 많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 나비처럼 내려앉습니다 탑   을 도는 바람의 독경소리가 옛인연을 쓸어 적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어떤 기다림

 
 팔순 난 할머니는 콩새의 눈알 같이 작은 콩꽃씨를 텃밭에다 심으시고 헤살헤살 웃으셨다   선한 바람 잘 들라고 잡초를 뽑아 놓고 헤살헤살 웃으셨다 이빨 빠진 구멍으로 헤살헤살    웃으셨다
 
 텃밭에 처박혀 있던 땅꼬마 콩꽃씨께서 실눈 뜨고 일어나 두리번거리다 세 달 박이 어린    젖니를 내밀어 연두 꽃대를 세워 놓고 신비한 주문을 외워 콩새 한 마리 카수 시켰다 가는   귀 먹은 할머니 귀에
  

*고우란 : 2007년《리토피아》신인상. 시집《호랑이 발톱에 관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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