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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집중조명/이외현/다순구미 마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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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390회 작성일 15-07-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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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이외현

다순구미* 마을


물이 석유보다 귀하던 시절이다. 새벽부터 길게 늘어선 공동우물에서 길어온 한 양동이의 물은 다순구미 사람들을 해갈시키는 단비였다. 동네 아낙들은 째보선창에서 김칫거리를 절이기도 하고, 팔고 남은 생선이나 갓 잡은 멸치를 켜켜이 간질을 해 곰삭여 젓갈로 팔았다. 늙은 할매도 생선을 손질하거나 그물 손질을 하여 밥벌이에 보탰다.

째보를 닮은 째보선착장은 많은 고깃배들이 들락거렸으며 조금에 가장들이 돌아오면 생일이 같은 조금 애기들이 여러 명 태어났다. 아이들은 째보선착장이 놀이터였으며 자연스레 뱃사람으로 자랐다. 같은 고깃배를 탔다가 배가 난파되어 제삿날이 같은 집들도 많다.

다순구미 사람들의 생사를 거머쥔 째보선창은 도로를 정비하며 파닥거리는 가물치 같은 활기와 째보의 모습을 동시에 잃었다. 많은 이가 떠나버린 황량한 다순구미 마을에도 뉴타운 바람이 불었다. 째보가 곰보가 되어버린 선창처럼, 벽에 바른 시뻘건 페인트가 겁나고, 일조권 침해의 덤터기가 두려운, 따사로운 햇살이 서툰 발걸음을 옮긴다.

다순구미: 지금의 목포시 온금동의 옛 지명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오랫동안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땡볕 이후


현기증이 하악하악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로 도마뱀이 혀를 빼문다. 손수건이 쉰 내 나는 목덜미를 닦는다. 헐떡이는 남편이 미욱한 아내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챈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가 아버지의 재떨이를 엎는다. 담뱃재가 날려 마른기침을 하는 아버지 화약고에 성냥을 긋는다. 번개를 매단 먹구름이 불붙은 꽁지를 자르며 폭포처럼 추락한다.




명자, 명자꽃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명자가 숨죽이고 서있네.
개불알풀 고개 들어 노을빛 명자와 눈을 맞추네.
더부살이 골방처녀 늘어진 어깨가 속울음 우네. 
명자 눈물방울이 개불알풀 초록심장을 뒤흔드네.
개불알풀 괴발개발 쓴 연서, 명자 붉게 꽃물 드네.




안심하고 절망하기


해꽃이 우주를 돈다. 달꽃이 지구를 돈다. 별꽃이 땅을 돈다. 칩이 구른다. 룰렛이 구른다. 꽃잎이 구른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끝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 퀴퀴한 지하실, 천 길 땅 속 차라리, 열려라 지옥문 몽환이 새끼집을 짓는 사이 쿵, 소리가 난다. 꽃잎이 으깨진다. 뿌연 초승달이 끌끌 혀를 차며 언뜻 가렸다가 보였다가.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전율이 인다. 찢어진 꽃잎 사이로 보이는 흐린 하늘, 사람들이 별 볼 일 없는 틈을 타 달이 손 내밀어 일으키네. 별이 흙을 툭툭 털어주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하네. 

이제야 꽃은 안심하고 절망한다.




손 위에서 길을 묻다


손바닥에는 여러 갈래의 금이 있다.

생명선은 건강과 장수를 나타내는 금인데, 선명하고 또렷한 것이 요절하지는 않겠다. 두뇌선은 손바닥을 가로질러 쫘악 째진 것이, 족제비 형상을 하고 있어 명석하기는 하겠다. 감정선은 또렷하여 제 할 말은 하고 살아서, 화병이나 정신병에 걸리지는 않을 상이로고. 운명선을 보아 하니 진로나 직업이 잘 풀려 지금쯤 한 자리 하고 있을 형상이렷다. 재물선이 수직으로 뻗은 것을 보면 금요를 깔고 다이아몬드 베개 베고 잘 상이로다. 결혼선은 새끼손가락 아래로 금이 하나뿐이어서, 애석하게도 시집은 한 번밖에 못 갈 팔자로고.

태어날 때 쥐고 태어난 미래의 이력서가, 손바닥 어느 언저리를 헤매고 있는지, 경로를 얼마나 이탈해 있는지 알 수 없다. 경로를 재탐색하여 원래의 손금대로 갈수나 있는지, 눈을 굴리며 손 위에서 길을 다시 묻는다.




비처럼 스미다


몸으로 스미지 못한 빗방울이 머리카락에 스민다.
머리카락의 유전자에는 과거로의 비밀지도가 있다.
비의 가락이 투영하는 수직 거울 속에 그가 있다.
슬리퍼와 샌들이 빗방울을 찰박이며 서로를 스친다.
훌쩍훌쩍 내리는 빗물은 황토벽에 염증으로 스민다.
벽에 스미지 못한 빗방울이 머물지 못하고 굴러간다.
덜렁이는 밑창으로 스며든 빗방울에 발가락이 부푼다.
발가락이 증발하며 빗방울 연어 떼가 구름에 스민다.




감나무의 기억


낯 뜨거운 일이다.

아이는 틈만 나면 감나무에 올랐다.
감꽃을 따서 기다란 감꽃목걸이를 하였다.
미스 양처럼 조롱박 엉덩이를 살랑거렸다.

땡감의 젖꼭지를 깨문 햇빛의 턱수염이 까끌까끌하다. 
젖꼭지를 비틀어 감을 한 입 베어 물면 혓바닥이 떫다.
땡감을 따서 물에 담가 우리거나 쌀독에 박아 놓는다.
설익은 것을 따는 아이 때문에 감이 몇 개 남지 않았다.

해의 불화살을 온몸으로 받은 감이 반달 씨를 잉태한다.
말랑한 몸이 백주 대낮에 막걸리를 마신 것처럼 불콰하다.
아이는 늘 바라보며 그 감을 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어느 날, 장대를 가지고 가지 끝에 달린 홍시를 후려친다.
까치밥이 되지못한 감이 퍽하고 땅바닥에 속살을 드러낸다.
뱃속에는 제 밥숟갈을 갖고 태어난 다섯 개의 감씨가 있다.

까발려지는 순간이다.

*이외현 :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계간 <아라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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