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2호/집중조명 해설/박서영/기억에게 부치는 연서
페이지 정보

본문
집중조명해설
박서영
기억에게 부치는 연서戀書
돌아보면 유년의 시간에는 끝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로 시작하는 어떤 문장을 읽을 때 우리는 상상하게 된다. 그 문장이 다 말하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다. 시간은 움직인다. 어쩌면 한 존재가 시간을 건너거나, 시간이 그를 건너가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시간이 있고도 없다는 것이다. 그 실체를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건 다른 매개물을 통해서다. 꽃이 피었다가 진다거나, 나무가 자란다거나,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이 바람처럼 존재를 스쳐갈 때 사유는 파동 친다. 이때 어떤 사람은 과거의 시간으로 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몽환의 세계에 자신을 밀어 넣고, 또 어떤 사람은 미래의 구멍을 엿보기도 한다. 이외현 시인은 과거로 자신을 밀어 넣는 시인이다. 그 과거 속에는 다순구미 마을, 명자꽃, 어느 뜨거웠던 여름날, 비가 내리던 어떤 날과 감나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유년의 아스라한 기억들이 건져 올린 시편들은 따뜻하면서도 고통스럽다. 시인은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감추고 풀면서 휘몰아치는 문장을 붙든다. 언어가 너무 빨리 달아나거나, 혹은 너무 늦게 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시는 그래서 어렵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어느 지점에 머물게 하여 독자를 편히 다독거릴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이외현 시인은 그 지점을 잘 알고 있다. 시인은 기억의 시간을 더듬으면서 연서戀書를 쓴다. 이외현 시인이 쓴 ‘연서’는 가버린 시절에 대한 안부이며, 그리움이다.
물이 석유보다 귀하던 시절이다. 새벽부터 길게 늘어선 공동우물에서 길어온 한 양동이의 물은 다순구미 사람들을 해갈시키는 단비였다. 동네 아낙들은 째보선창에서 김칫거리를 절이기도 하고, 팔고 남은 생선이 나 갓 잡은 멸치를 켜켜이 간질을 해 곰삭여 젓갈로 팔았다. 늙은 할매도 생선을 손질하거나 그물 손질을 하여 밥벌이에 보탰다.
째보를 닮은 째보선착장은 많은 고깃배들이 들락거렸으며 조금에 가장들이 돌아오면 생일이 같은 조금 애기들이 여러 명 태어났다. 아이들은 째보선착장이 놀이터였으며 자연스레 뱃사람으로 자랐다. 같은 고깃배를 탔다가 배가 난파되어 제삿날이 같은 집들도 많다.
다순구미 사람들의 생사를 거머쥔 째보선창은 도로를 정비하며 파닥거리는 가물치 같은 활기와 째보의 모습을 동시에 잃었다. 많은 이가 떠나버린 황량한 다순구미 마을에도 뉴타운 바람이 불었다. 째보가 곰보가 되어버린 선창처럼, 벽에 바른 시뻘건 페인트가 겁나고, 일조권 침해의 덤터기가 두려운, 따사로운 햇살이 서툰 발걸음을 옮긴다.
-「다순구미* 마을」전문
긴 시의 전문을 인용해보았다. 그 이유는 이 시가 한 마을의 옛이야기와 현재를 오롯이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지명인 다순구미 마을은 따사로운 햇살이 오랫동안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곳에는 ‘째보선창’이라는 곳이 있었다. 사람들은 째보선창에서 생선이나 멸치를 손질했다. 째보선창은 밥벌이의 중요한 장소 중의 하나다. 그런데 왜 하필 ‘째보선창’일까. 옛 뱃사람들과 아비를 기다리는 아낙과 아이들의 신산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상처가 도리어 살아가는 힘이 된 가난한 마을이 뉴타운으로 변했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뉴타운으로 변한 마을은 도리어 새로운 갈등이 생기는 곳으로 표현돼 있다. 자연친화적인 삶이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공동체가 허물어지고 햇살조차도 서툰 발걸음을 옮기는 곳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째보를 닮은 째보선착장은 많은 고깃배들이 들락거렸으며 조금에 가장들이 돌아오면 생일이 같은 조금 애기들이 여러 명 태어났다. 아이들은 째보선착장이 놀이터였으며 자연스레 뱃사람으로 자랐다. 같은 고깃배를 탔다가 배가 난파되어 제삿날이 같은 집들도 많다.”는 표현이다. 생일과 기일이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1연에 나오는 “새벽부터 길게 늘어선 공동우물에서 길어온 한 양동이의 물은 다순구미 사람들을 해갈시키는 단비였다.”는 표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공동체’라는 단어와 함께 묶어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옛 풍경에는 공동체가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 우물이 하나, 농사도 돌아가면서 서로 도왔고 각종 경조사나 잔치도 마을 단위로 해냈다. 그래서 농악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두레라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 바로 탄생과 죽음의 공동체다. 어촌이라는 특이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생일이 같거나 제삿날이 같은 이가 많다는 전언은 참으로 중요해 보인다. 상상해 보라. 어느 작은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한꺼번에 아이들이 태어나는 장면과, 어느 날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은 그 자체로도 기묘한 풍경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공동체에 대한 의식은「다순구미 마을」에 잘 드러나 있다.
현기증이 하악하악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로 도마뱀이 혀를 빼문다. 손수건이 쉰 내 나는 목덜미를 닦는다. 헐떡이는 남편이 미욱한 아내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챈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가 아버지의 재떨이를 엎는다. 담뱃재가 날려 마른기침을 하는 아버지 화약고에 성냥을 긋는다. 번개를 매단 먹구름이 불붙은 꽁지를 자르며 폭포처럼 추락한다.
-「땡볕 이후」전문
상처에 대해서는 언제나 할 말이 많은 법이다. 상처 없는 몸과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이외현 시인에게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엔 쑥스러운 상처가 있을 터이다. 예술적 기질이 강하거나 이미지의 파격을 즐기는 시인들은 더 아프고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외현 시인 역시 은유나 상징으로 감추는 것보다는 드러내는 쪽을 선택했다. 언어들도 강렬하다. 시「땡볕 이후」의 첫 문장인 “현기증이 하악하악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로 도마뱀이 혀를 빼문다.”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계절이거나 날씨, 혹은 싸움이 있던 날의 온도 같은 것이다. 그날은 ‘땡볕’이 지나간 이후의 날이지만, 여전히 뜨거운 날이었나 보다. 상처나 싸움이 있던 날은 붉고 뜨거울 수밖에 없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무더운 날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는 혀를 빼 문 도마뱀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은 환각이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열기가 짐승처럼 두려운 이유는 그 다음 문장이 말해주고 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채고, 순수해야할 아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떨이를 엎는다. 그러나 폭력의 주동자인 아버지도 아픈 사람이다. 마른기침을 하는 아버지의 화약고에 성냥을 긋는다는 표현은 아버지의 폭력적 언술에 대한 강한 거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해꽃이 우주를 돈다. 달꽃이 지구를 돈다. 별꽃이 땅을 돈다. 칩이 구른다. 룰렛이 구른다. 꽃잎이 구른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끝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 퀴퀴한 지하실, 천 길 땅 속 차라리, 열려라 지옥문 몽환이 새끼집을 짓는 사이 쿵, 소리가 난다. 꽃잎이 으깨진다. 뿌연 초승달이 끌끌 혀를 차며 언뜻 가렸다가 보였다가. 땅에서 올라 오는 한기에 전율이 인다. 찢어진 꽃잎 사이로 보이는 흐린 하늘, 사람들이 별 볼 일 없는 틈을 타 달이 손 내밀어 일으키네. 별이 흙을 툭툭 털어주네.
-「안심하고 절망하기」부분
상처 받고 고통스러운 존재는 몽상에 젖어든다. 몽상은 잠시 슬픔을 잊고 쉴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품어보는 것은 ‘해꽃’, ‘달꽃’, ‘별꽃’, ‘칩’, ‘룰렛’, ‘꽃잎’ 등이다. 우주와 자연의 이미지를 연쇄적으로 이어붙이면서 시인은 영혼을 위로한다. 그러나 곧 ‘한기’를 느낀 몸은 현실을 깨닫고 만다. 시인에게 있어 우주나 하늘은 자신을 일으켜 세워 주는 대상이며, 땅은 현실이나 상처를 의미한다.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전율이 인다.”라는 표현이나 “달이 손 내밀어 일으키네. 별이 흙을 툭툭 털어주네.”라는 표현에서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시인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사실은 누가 볼까봐, 알게 될까봐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누가 알면 간섭을 해올 것이고, 값싼 위로를 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퀴퀴한 지하실”같은 내부에 앉아 마음껏 안심하고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인용한 시 역시 “폭포처럼 추락한다.”(「땡볕 이후」)처럼 마지막 문장이 하강이미지(“절망 한다”.)로 끝났다. 솟구치거나 튀어 오르는 생동감 있는 쪽을 선택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시인의 선택은 자조적이면서도 쓸쓸하다. “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명자가 숨죽이고 서있네.”(「명자, 명자꽃」) “더부살이 골방처녀 늘어진 어깨가 속울음 우네.”(「명자, 명자꽃」) 역시 슬픈 정조가 그대로 나타나 있어, 이외현 시인의 가슴에는 슬픈 ‘연서’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억에게 부치는 ‘연서’에 슬픔이 짙게 배여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자신을 어디에 놓아두느냐에 따라 사유는 흘러간다. 구름 위에 놓을 수도, 지하실에 놓을 수도, 바람 속에 앉아있을 수도 있을 터인데 이외현 시인의 화자들은 모두 상처 위에 발을 딛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꿈의 언어일 지라도, 때때로 그래야만 견딜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외현 시인은 운명론자일까.
생명선은 건강과 장수를 나타내는 금인데, 선명하고 또렷한 것이 요절하지는 않겠다. 두뇌선은 손바닥을 가로질러 쫘악 째진 것이, 족제비 형상을 하고 있어 명석하기는 하겠다. 감정선은 또렷하여 제 할 말은 하고 살아서, 화병이나 정신병에 걸리지는 않을 상이로고. 운명선을 보아 하니 진로나 직업이 잘 풀려 지금쯤 한 자리 하고 있을 형상이렷다. 재물선이 수직으로 뻗은 것을 보면 금요를 깔고 다이아몬드 베개 베고 잘 상이로다. 결혼선은 새끼손가락 아래로 금이 하나뿐이어서, 애석하게도 시집은 한 번밖에 못 갈 팔자로고.
-「손 위에서 길을 묻다」부분
이 시는 ‘손금’에 대한 다소 사실적인 내용들이 들어있다. 손금에는 ‘생명선’, ‘ 두뇌선’, ‘감정선’, ‘운명선’, ‘재물선’, ‘결혼선’ 등이 있나보다. 나 역시 누군가 내 손금을 보고는 평생 재물복은 없겠다고 하여 낙담한 적이 있다. 그런데 또 한편 평생 밥은 굶지 않겠다고 해서 얼마나 안도의 숨을 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이렇게 손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잠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자신의 타고난 운명이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 같은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인용한 시의 손금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무튼 손금은 좋게 나타나있다. 결혼을 한 번 할 팔자라는 것 외는 모두 긍정적으로 표현돼 있다. 결혼선에 관한한 시인도 잠시 농을 던져보는 심정으로 “애석하게도”라는 부사를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손금의 운명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고 인생은 경로를 이탈했다. 시인은 그 경로를 재탐색하여 손금의 운명대로 살기를 원한다. “태어날 때 쥐고 태어난 미래의 이력서가, 손바닥 어느 언저리를 헤매고 있는지, 경로를 얼마나 이탈해 있는지 알 수 없다. 경로를 재탐색하여 원래의 손금대로 갈수나 있는지, 눈을 굴리며 손 위에서 길을 다시 묻는다.”는 손 위에서 다시 ‘희망’을 묻는다, 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끝없이 길을 찾고, 희망을 꿈꾸며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이외현 시인이 ‘운명’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머리카락의 유전자에는 과거로의 비밀지도가 있다.”(「비처럼 스미다」)라든가, “뱃속에는 제 밥숟갈을 갖고 태어난 다섯 개의 감씨가 있다.”(「감나무의 기억」)라는 표현에서도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다순구미 마을」이라는 시에서도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표현돼 있다. 째보 선창이 있는 어촌마을 사람들은 생일이 같거나 제삿날이 같은 집들이 많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환경을 가진 마을에서 살아가므로 비슷한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해의 불화살을 온몸으로 받은 감이 반달 씨를 잉태한다.
말랑한 몸이 백주 대낮에 막걸리를 마신 것처럼 불콰하다.
아이는 늘 바라보며 그 감을 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어느 날, 장대를 가지고 가지 끝에 달린 홍시를 후려친다.
까치밥이 되지못한 감이 퍽하고 땅바닥에 속살을 드러낸다.
뱃속에는 제 밥숟갈을 갖고 태어난 다섯 개의 감씨가 있다.
까발려지는 순간이다.
-「감나무의 기억」부분
천진성은 시에 있어서도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성인이 된 사람도 마음에 아이의 천진성을 간직하고 있다. 인용한 시는 감나무에 올라간 아이의 행동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아이는 설익은 감을 일찍 따버리곤 한다. 감을 먹기 위해 따는 것이 아니라 감 따는 행위 자체가 아이에겐 즐거운 놀이다. 시인은 어른이 돼버린 자신의 현실을 벗어나 아이의 시선으로 감나무를 바라본다. 아이의 언어는 어른의 언어보다 훨씬 살아있고 생동감으로 넘친다. 누가 볼까 봐, 누가 알아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활달하고도 명랑하다. 그런데, 홍시가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시인은 운명이 까발려지는 순간을 목격하고야 만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제 밥숟갈을 갖고 태어난 다섯 개의 감씨”이다. 시인은 감의 씨앗이 자라 운명의 손금을 따라 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감나무 앞에서 다가올 운명에 대해 좋은 ‘감感’이 드는 시인. 비록 까치밥도 되지 못하고 터져버린 감이지만, 다섯 개의 씨를 품고 자신을 내보이는 그 당당함이 미래의 운명일 테다. 그래서 어쩌면 시인은 마지막 문장을 더 단호하게 끝맺었는지도 모른다.
몸으로 스미지 못한 빗방울이 머리카락에 스민다.
머리카락의 유전자에는 과거로의 비밀지도가 있다.
비의 가락이 투영하는 수직 거울 속에 그가 있다.
슬리퍼와 샌들이 빗방울을 찰박이며 서로를 스친다.
훌쩍훌쩍 내리는 빗물은 황토벽에 염증으로 스민다.
벽에 스미지 못한 빗방울이 머물지 못하고 굴러간다.
덜렁이는 밑창으로 스며든 빗방울에 발가락이 부푼다.
발가락이 증발하며 빗방울 연어 떼가 구름에 스민다.
-「비처럼 스미다」전문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명자가 숨죽이고 서있네.
개불알풀 고개 들어 노을빛 명자와 눈을 맞추네.
더부살이 골방처녀 늘어진 어깨가 속울음 우네.
명자 눈물방울이 개불알풀 초록심장을 뒤흔드네.
개불알풀 괴발개발 쓴 연서, 명자 붉게 꽃물 드네.
-「명자, 명자꽃」(전문, 아라문학 창간호)
인용한 두 편의 시는 비교적 짧은데, 다른 시들과 달리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빗방울’이나 ‘눈물방울’같은 액체가 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눈물’은 상처의 질료이지만 왠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빗방울’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인용한 시의 종결어미들을 살펴보면, “스친다.”, “스민다.”, “굴러간다.”, “부푼다.”, “서있네.”, “맞추네.”, “우네.”, “뒤흔드네.”, “꽃물 드네.” 등이다. 부드러운 어감으로 가득 찬 마지막 문장들은 작품 속에 간혹 어두운 이미지들이 뒤섞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고통이나 상처를 자양분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선善한 시인이기에 고통이 번지고 스미어 꽃물 드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뜨거운 시간 위에서 현기증을 앓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 평화가 오면 기억은 마음에 스미고 번진다. 그것이 슬픔이다. 슬픔의 아름다운 정조가「비처럼 스미다」,「명자, 명자꽃」에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현 시인은 기억으로 난 작은 창을 통해 세상을 엿본다. 그래서 시인이 쓰는 연서는 읽는 이의 마음에 아릿한 통증을 유발 시킨다.
*박서영: 경남 고성 출생. 부산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수료. 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추천0
- 이전글52호/고창수의 영역시단 15.07.03
- 다음글52호/집중조명/이외현/다순구미 마을 외 6편 15.07.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