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2호/고창수의 영역시단
페이지 정보

본문
고창수의 영역시단
박제천
시절인연
관상책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다 생긴 대로 살다 죽는다 사람만이 아니라 집도 절도 상相이 있고, 마음도 상이 있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낙산 사무실은 스무 살 처녀가 꽃단장을 하고 님을 기다리는 상이다 내가 사는 집은 요술램프 속 지니,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렁각시 상, 조강지처도 있고, 애인도 있으니 버킷리스트조차 필요 없는 인생, 오고가는 길에 서 있는 나무마다 인생들이 들어차 있다 오늘 아침엔 대학로 실개천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올챙이가 말을 거들었다 5천 년 전에 내가 상사병을 앓던 아가씨란다 그래서 내가 이 길로만 다녔구나 시절인연이 무섭구나 돌멩이 하나 걷어찼다가 5천 년만에 돌멩이가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차돌 하나, 손수건으로 잘 닦아서 실개천에 넣어주었다 물빛이 친구 구해줘서 고맙다고 반짝반짝 빛난다 얘는 또 어떤 인생인가 다음날 물어보기로 했다.
하두자
주름치마
흘러내린다 당신의
배후에서 자꾸자꾸 줄을 풀어
그녀의 속을 들여다 본다 손금을 들여다 본다 수면 위로 떠올라 흔적을 남긴다 아가미처럼 커다란 입을 벌려 파도에 무늬를 그려낸다 만삭의 달이 층층 뼈를 삭힐 때 배꼽은 떨어져 나가고 빤짝이던 주름은 늘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을 응시하면 끌어당기는 힘, 먼 바다를 향해 밀려나간 뼈를 삭힌 바람 들락거리며 뿌리를 내려주기도 했지만 한밤 풍경 속에 바다가 싱싱했던 그녀의 깊은 속, 골수를 휘감고 몸속을 오래 떠돌다 화들짝 놀란 자리 고단한 얼룩만이 등을 맞대고
어둠의 커튼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 통과한다 누구에게도 다가서지 못한 딱딱하게 굳은 주둥이를 한 겹씩 풀어내린다 꿈틀거리며 흘러내리는 주름, 기척도 없이 라면처럼 불어터진 오후를 잡아당기면, 길게 혀를 내어 물고 미래에 완성 될 우리들의 얼굴은 거울과 함께 자라는 것일까
분칠을 해야 하듯 당신의 주름치마는 불안하고
남아 있는 이야기를 거울에 문지르며
자꾸만 줄을 풀어 사방 벽에 새긴다
박하리
변형 거미
바람 부는 날 태양은 넘어가고 집을 짓는다. 그를 감싸고 있는 보송한 허물을 벗고 매일 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걸으며 집을 짓는다. 네온사인 빛이 흔들리면 흐느적거리고, 무리 지어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 집을 짓는다. 달려드는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에 눈을 감는다. 감으며 걷는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걸으며 짓는다. 등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문득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콩콩거리며 되돌아간 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꿈틀거리던 근육에 통증이 온다. 멈춰선 다리 버리고 가로수에 몸을 날린다. 이 쪽 저 쪽 거미줄을 날리며 집을 짓는다. 집에 빠진다. 거미줄에 걸려 퍼덕인다. 퍼덕이면서 친친 얽는다. 모두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추천0
- 이전글52호/신작시/강인섭/가을편지 1 외 1편 15.07.03
- 다음글52호/집중조명 해설/박서영/기억에게 부치는 연서 15.07.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