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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신작시/함명춘/유기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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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함명춘
유기견
어느 날 몹시 취해 귀가 하던 날
길모퉁이에서 빈 병처럼 서 있는 유기견을 데려왔다
눈에 낀 눈곱을 떼어주고
온수에 샴푸를 풀어 퉁퉁 부은 발을 닦아주었다
고추도 똥꼬도 깨끗이 닦아주었다
드라이기로 젖은 털을 말려주었다
뽀송뽀송해진 털 사이로 두 눈망울과 제법 오뚝한 코가 드러났다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내주었다서서히 눈이 맑아지더니
바로 방안을 뛰어다녔다
한 점 의심도 없어보였다
격의도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정이 많은 듯했다 눈물이 많은 듯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해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버렸던, 나다
구둣방
두근두근 낮달이 떠 있다
수선이 끝난 구두를 찾아가는 사람들
하나 둘씩 서둘러 귀성길에 오른다
구둣방 천장으로 세어 들어오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툭하면 쪽창문을 두들겨대던 바람 소리마저도.
그들이 남기고 간 몇 켤레의 헌 구두 같은 적막들과
구두 수선공이 둘러앉아 한낮의 뒷굽이 다 닳을 때까지
너무 오래되어 좀이 슨 공기를 먹는다
이 세상에 연고 하나 없는 어둠을 만지작거린다
기댈 데도 갈 데도 없는 못과 구두통을 들었다 놓는다
서로 말문을 꼭꼭 닫아걸고
마치 누군가 입이라도 열라치면
선반 위에 꼬깃꼬깃 접어 올려놓았던 한숨이 펼쳐질 듯이
목젖과 가슴으로 꾹꾹 눌러놓았던 눈물이 울컥 쏟아질 듯이
처마 끝에 가오리연처럼 걸린 노을이
저녁 내내 풀려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함명춘 : 강원도 춘천 출생. 1991년 <서울신물> 신춘문예 당선.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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