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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연재/강우식 연작 장시 ④/마추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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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식 연작 장시 ④
마추픽추
15.
마추와 픽추는 토속 속의 토속
원시 속의 원시
뭣 때문에 농사나 짓지 맨손지기로
사랑에 매달렸을까.
때로는 무식하고 무모했다.
사랑의 꿀도 끝이 없는 줄 알았다.
성난 들소의 등줄기를 닮은
안데스 산맥을 적시며 비가 왔다.
안데스가 젖으니 전신만신 비에 젖으니
밭일을 하던 마추와 픽추도 비에 흠뻑 물들었다.
옷이 필요 없는 알몸의 비였다.
알이 되는 비였다. 방울이 되는 비였다.
알이 되어 방울 소리를 내며 구르는 비였다.
빗방울은 구르고 흐르는 노래였다.
비도 알몸이고 마추와 픽추도 알몸이 되었다.
서로의 살갗에 미끄러운 비, 서로의 뺨에 희희덕대는 비
서로의 젖꼭지에 달콤한 비, 비, 비, 비……
비를 닦아주며, 미끄덩거리는 비로 비비고 닦아주며
자꾸 미끄덩미끄덩 미끄러지고
속도를 내면서 물 범벅이 된 사랑은
좀 더 조금 더 즐거움을 위해
수수한 잎사귀 옥수수 살결을 벗어나
옥수수 알갱이 같은 젖꼭지를 혀로 굴리고
옥수수 이빨로 살짝 깨물던 사랑이
깨물다 좀 세게 깨물면 가는 비명을 느낌으로 토하고
그 비명이 좋아서 좀 더 세게 깨물면
비명은 아프게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비도 울고 사랑도 달콤하게 울고 노래처럼 울고
그 비명이 좋아서 허브에서
코카인으로 환각의 비가 되고
출렁출렁 일렁이는 춤을 추고
허브를 미끼로 입에 물고하는 키스보다
코카 잎 씹듯이 하는 입맞춤
뒤엉켜 하는 키스는
혀와 혀로 간질거리다 마침내는
몸속의 공기를 다 흡착기로 빨아들이듯이
서로가 질식할 때까지 빨아들이고
그러다 옥수수 알갱이 이빨도 성가셔
고대적古代的 차이나 부호마냥 호사스럽게
일렬로 두루룩 다 빼버리고
잇몸뿐인 오물뜨기 육질이 되어
서로가 비가 되어서 마추는 픽추에게
픽추는 마추에게 지린내 나는 비를 내리고
화장실이 없는 마추픽추여.
비는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 사랑의 물
사랑의 항아리에 담아야 할 물도
어떤 때는 젖꼭지에 얼굴에 입속에 달라 하고
픽추가 그러하면 마추는
마추는 이 화인 같은 사랑에 자극되어
몸 곳곳에 불도장을 찍어 달라 하고
안데스의 콘도르가 되어 성난 발 갈퀴로
온몸을 발기발기 찢어 달라 애원하며 울고
이러다 안 되면 난교의 파티를
신의 이름으로 벌이고 네 것 내 것 없이
경계가 무너진 불과 물이 되고
태양이 캄캄 눈이 먼 비오는 날에는
돌에 내리 꽂히는 벼락이 되고
돌에 내리 꽂히는 전율이 되고
꽃이 피어서 어디 세상이 웃느냐
내 사랑의 비명이 꽃 피어서
마침내 세상이 꽃피는 것이 되고
악의 꽃이어서 더 빛 좋은 살구가 되고
불은 흐르고 물은 빛났다.
물은 흐르다 어느 순간 불길로 타오르고
불도 흐르다 삽시에 물로 젖어드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한계가 없는 사랑은 때로는 몰락하듯
너무 쉽게 무너지기도 하지만 아름다웠다.
마추는 작은 쐐기돌 파질라
돌과 돌 사이를 파고들듯이
대 음순 잎과 잎 사이를 파고들고
그 힘으로 돌과 돌을 지탱하고
파질라 같은 꼬추로 마추픽추 육봉肉峰을 만들어
비오는 안데스를 들어올리고
지구를 들어올리고
그러지 않아도 지구는 밤과 낮으로
음과 양으로 밝음과 어둠으로
매일매일 변하는 주기 따라 흐르듯
픽추의 땅을 뒤집어 거꾸로 들어올리고
땅이 하늘이 되도록 들어 올려
공중제비 하듯 팔랑개비로 돌리고
그러하면 픽추는 프로펠라 소리를 내며
빙빙 돌며 몸이 뜨거워
우루밤바 우루밤바 물줄기를 찾으며
물줄기로 몸을 꽁꽁 묶는다.
쾌락을 위하여 사랑은 있었다.
페루드란스처럼 묶인 몸을 꿈틀거리며
마추는 픽추에게 온몸을 칼로 그어 달라 하고
바늘 끝의 아픔이 햇살로 빛나는 선인장 가시로
독사의 이빨보다 더 독한 가시로 온몸을 찌르라 하고
선인장 꽃보다 더 아름답게 핀 상처의 독이여.
독이다, 독, 독이다, 이 독이 퍼져
픽추는 마추를 묶고 클라이맥스를 위해
파질라가 우람한 기둥이 될 때까지
숨이 넘어 갈 될 때까지
독하게 목을 조른다. 마추의 목을 조른다.
칼로 선인장 가시로 독사이빨로 마추의 즙을 짠다.
종말이 없는 사랑을 위해
종말이 없는 종말로 치닫는다.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을 위해
마추는 픽추에게 제물이 된다.
안데스 산줄기 같은 견고한 제물이 된다.
먹히는 즐거운 헌신이 된다. 먹히고 먹는 하나가 된다.
식인 물고기 피라냐의 칼날이빨이 된다.
마추는 혓바닥으로 곡예사의 공처럼 희롱하던
픽추의 젖꼭지를 잘라 삼키며
둥글고 둥근 대지를 먹었다 생각하고
사랑의 가장 극렬한 끝을 위해
픽추에게 자신이 육봉이 가장 커지도록
목을 졸라 달라 애원한다. 아니 독하게 죽는다.
이 모든 것은 자연에서
자연과 이웃하며 배운 사랑의 질서였다.
사랑 뒤에 즐겨 제물이 되는
숫버마제비의 마추.
암버마제비인 피추가 마추의 몸에 돋아난
사랑의 사마귀를 먹듯이
먹힘으로써 쾌락의 극점까지 가는 끝이다.
순리대로 흐르는 것 같지만
결코 순하지 않은 자연의 격랑에서
피 터지는 생존의 엄연함에서
옥수수, 감자, 코카나무, 숫버마제비의
저 깊은 내면의 울부짖음에서
돌에서 황금을 보고 사랑을 배운 것이다.
사랑을 하며 죽는 쾌락을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이 희열을 어이 알리.
픽추는 죽으면 마추에게 케냐가 되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마추를 위해 뼈로 만든 케냐가 되겠다고 했다.
안데스의 산을 휘도는 바람의 노래가 되겠다고 했다.
마추가 부는 엘 콘도파사가 되겠다고 했다.
아 아 목청껏 내지르는 극렬한 사랑의 절규다.
그 사랑에도 애틋함이 깃들어 있구나.
안데스를 울리는 슬픈 사연이 깃들었구나.
잉카콜라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는 슬픔이 있었구나.
그러나 심장박동속도가 느린
잉카의 마추가 먼저 숨을 거뒀다.
폐활량이 보통 사람보다 3배나 높은 잉카 마추는
다른 사람보다 3배나 더 픽추를 올려놓고
천천히 사랑 놀음을 하다 숨졌다.
사랑 때문에 심장이 빨라지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코카인이, 넋 놓고 흡입한 코카인이
쾌락과 마비를 핏줄기로 실어 나르고
마지막 순간에는 신에 바쳐지는 목숨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서 눈감았다.
사랑의 인이 배긴 것은 먼저 픽추였다.
하면 할수록 자꾸 하고 싶은 코카인 같은
중독된 사랑이었다.
사랑하다 죽어서 마추의 케냐가 되겠다는
픽추의 울음은 아니
세상 모든 여자의 울음은 슬프게도 거짓이다.
마추는 픽추가 저 세상으로 가는
무지개다리를 놓지 않을 줄 알았지만
거짓인줄 알면서 그것이 다 사랑이기 때문에
믿음이 되고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졌다.
픽추는 마추가 죽은 자리에서
죽지 않는 땅의 진리를 일깨우듯 일어났다.
마추의 죽음을 토양삼아 사랑을 배양하려 했다.
젖이 없으면 사랑도 가질 수 없는
픽추는 한쪽 젖꼭지를 마추에게 주고도
또 하나의 젖꼭지를 다른 마추에게 주어
아기를 가지려고 과거가 된 죽은 사랑의 껍질을
안데스의 바람 속에 훌훌 털어버렸다.
배신의 사랑에 몸을 던진 무서운 여자가 됐다.
아니 픽추는 아이를 낳고 신에 귀의하고 싶었다.
아이 없는 여자라는 손가락질과
죄인 같은 사랑에서 면죄부를 받고 싶은 여자였다.
마추와 픽추의 사랑은 믿음이자 배신이고 여기서
안데스 산맥처럼 굴곡 많은 잉카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우루밤바 물줄기 같은 구곡양장의 노래가 되었다.
세상 어디서나 하늘은 푸르고 사랑은 달콤하고
마추의 몸술을 먹고 취하여 우는 픽추는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술을 먹고 취하는
밤과 낮이 있다.
사랑을 두고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는 인간들은 있다.
꽃이 핀 것만이 아름다우랴.
바람 속에 시들어가며 꽃이 지듯이
섭섭하게 아쉽게 슬프게 끝나는 사랑도
섭섭하게 아쉽게 슬프게 아름다울 수도 있나니
완성이 없는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사랑의 상처가 피로 만든 빵인 태양이 될 때까지
무슨 짓인들 안 해 보았으랴.
완성이 없는 사랑이 마무리되는 완성은
죽음뿐이었다.
마추와 픽추는 배신이고 비극일지언정
외롭고 황홀한 기쁨으로 죽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라고 믿었었다.
죽으면 더 이상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데까지
사랑하면서 가는 것이니까
몇 천 마디 새의 지저귐 같은 사랑노래도 들을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절식이 되니까
마치 하늘을 다스리듯 자유롭던 콘도르의 날개가
갑자기 꺾이어 티끌도 아니게 전락하는
지상에서 몸 달았던 사랑이 더 필요 없으니까
살은 자의 영혼도 죽으면
우주 공간을 쉴 틈 없이 떠도니까
슬프게 사랑을 나눌 공간도 시간도 없이
그저 강물처럼 흐르기만 하니까
아 사랑이 머무는 마르지 않는 바다는
죽으면 영원히 없으니까
바다가 바닥을 드러내고 마른들 무슨 걱정이랴.
사랑의 완성인 죽음조차도 가짜로 연출했던 픽추였다.
모든 사랑은 가짜다.
그래서 사랑은 진짜를 만들려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가짜가 된다.
끝나지 않는 수레바퀴를 돌고 돌린다.
사랑은 언제나 미완이다.
그리하여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픽추가 마추에게 등 돌린 것도
그 조차도 하나의 사랑의 공식이었다.
아이를 가져야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것은
여자의 운명이고 신이 준 면죄부다.
사랑이 완성을 추구하는 미완이 아니었으면
한동안 뜨거운 활화산이었다가
한순간 배신의 냉정한 얼음이 아니었으면
어이 다시 피어날 수 있는 장미꽃이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항시 인간은 저지르면서도 사랑으로 뛰어넘는다.
사랑의 길을 가면서 눈앞의 꽃보다
늘 고개 너머 보이지 않는 꽃이
더 아름답다고 꿈꾸는 것이 인간이 아니냐.
제 아무리 큰 나무도 자기 그늘 밑에 핀
수많은 꽃들을 다 헤아리지 못하듯이
허구한 날을 여자와 남자가 살을 맞대고도
서로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의 절정으로 치달으며 운 것이 우리가 아니냐.
마추와 픽추의 종말이
마추픽추의 신비도 운명도 아니다.
아기가 없어 일생 사랑을 찾아 헤매던
슬픈 피에로 같은 몸짓의 픽추의 일생에도
영원한 가짜가 없듯이 진짜로 죽는 순간이 왔다.
하다하다 모든 사랑에서 지치고 포기한
픽추는 나머지 한 쪽 젖꼭지마저 떼이고
두 젖 망울이 사라진 구멍에서 몸속의
피란 피 다 태양의 요강에 쏟으며
죽는 마지막이 와 바람의 마차를 타고
마추를 따라 안데스의 산을 넘었다.
산이자 성역인 마추픽추에는 피신 루트도 있어
어떤 사람들은 그 길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마추픽추에는 신성한 광장, 태양신전,
무당의 집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살아가다 사랑에서 헤어나고 싶으면
아무도 몰래 사라지는 피신 루트도 있었다.
황금을 좇는 침탈 자들도 건너지 못하는
천길 벼랑의 아찔한 외나무다리 길,
이 피신루트를 걸어간 사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길이 있으니 반드시 걸어간 사람도 있었으리라.
산사람은 배신으로 살고
죽은 사람은 사랑의 완성이 죽음뿐이란 확신으로
죽어 안데스 하늘의 별이 됐지만
잉카여 그대들은 모두 사랑의 전사고 순교자였으리라.
진실한 배덕背德의 꽃나무였으리라.
인간으로서 더할 수 없는 육욕의 극치까지 가며
아니 금기를 초월하는 사랑 탑을 쌓으며
태양의 길을 간다고 목숨을 바쳤지만
쾌락이란 얼마나 찰나이고 순간의 허무냐.
죽음은 사랑의 끝은 될 수 있지만
절대 사랑의 완성은 아니었다.
마추는 죽음으로 끝난 사랑보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살아 있음의
행복을 알면서도 스스로 눈을 감았다.
그 죽음에 굳이 신이 있었다고 팻말을 세우지 않겠다.
산자들은 어떤가. 살아있음으로서
오늘도 최상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노예가 된다.
마추픽추는 침묵 속에 잠들어도
마추와 픽추의 코카인 같은 사랑이
어떤 사람들에겐 환상처럼 보이는
죽음과 삶의 끝나지 않은 윤회의 수레바퀴다.
16.
콘도르의 큰 날개가 캄캄 어둠을 몰고 와
드디어 안데스의 하늘을 덮었다.
마추픽추는 칠흑의 신비 속에 잠들었다.
밤안개가 밀랍처럼 마추픽추를 감싸 돌았다.
안개는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안개는 상처를 은밀하게 감쌀 뿐 고치지 않는다.
사물을 잠시 그대로 꿈꾸게 만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 시인은 안개 같은 존재다.
아니 시인은 안개 속 시간여행자다.
선인장과 온갖 잡초로 무성한 멈춘 시간 속을
얼룩진 돌의 역사를 만지며
시간을 말없이 쌓아간 폐허의 향기를 맡는다.
마추와 픽추의 사랑을 가슴 깊이 각인한다.
골동이 된 재봉틀의 바늘 품같이 반복하며
촘촘히 새겨간 아픈 사랑의 누빈 자국을 더듬는다.
느낌이 오면 온대로 느낌이 가면 가는대로
느끼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마추픽추의
거대한 태양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시작된 운명적인 사랑이며 아픈 독이었다.
페루드란스의 독이었다.
클레오파트라처럼 죽었으면 행복했을
사랑이었지만 마추와 픽추는
코카인의 환각과 선인장의 날카로운 가시와
콘도르의 발 갈퀴도 두렵지 않은 마비된 사랑의
극점에서 표표히 우주여행을 떠났다.
저 칠흑의 안데스 하늘에 뜬 별들은
마추와 픽추가 뿌린 사랑의 씨앗이다.
옥수수 씨앗을 종자 씨로 가져가
사랑의 완성을 위해 오늘도 하늘 밭을 일구고 있다.
옥수수 알갱이 같이 뿌려진 별들……
지상에서 미완이었던 사랑이
죽어서 하늘나라에서도 이어지리.
이 땅에 태어난 업으로 안고 갔던
근친의 사랑을 씻고 또 씻어 지우리.
완성이 없는 사랑이어서
마추와 픽추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의
안데스의 잉카를 그리워하고
사랑의 이름 자리를 따서 붙인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에 밤마다 뜨는 별이 되었으리.
신의 부름으로 콘도르의 발에 채여
어디론가 사라진 인적이 없는 마추픽추.
별만이 밤새 내려와 놀다 새벽이면 사라지는 자리.
마추와 픽추의 사랑이 흔적 없이 지워지자
마추픽추는 텅 빈 도시가 되었다.
사랑이 꽃이 아니라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누가 그리 슬퍼하랴.
사랑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꽃이다.
꽃잎 한 잎 하르르 떨어지면
그 꽃잎 하나에 천지가 무너지듯
마추와 픽추도 죽음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은 노을처럼 장엄하고 신비하다.
그 신비를 터득하고자 사람들은
오늘도 가슴에 마추픽추 산山 하나를 가진다.
콘도르 날개 짓 같은 안데스 바람이여
마추와 픽추의 혼령이여 울어라.
태양의 땅 밤의 마추픽추는 잠들어도 잠 깨어도
신비한 돌의 침묵 속에 우뚝하리라.
여적餘滴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저 시인이기 때문에 이 시는 가능했음을 우선 밝힌다. 역사의 시각으로 이 시를 보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역사의 시각으로 봐도 어차피 마추픽추는 미스터리이니까. 극단으로 페루의 마추픽추가 아니라 한국의 마추픽추면 어떠냐. 마추픽추라는 이 백지 같은 공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나로서는 문제였다. 내 목숨의 나날에서 다시 마추픽추 태양 문을 들어서는 상상의 날개를 단 콘도르는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한다. 내 시의 호흡이 이 시로써 끊긴 기분이다. 기력이 다 소진 탕진했다. 당분간은 그 공백의 시간이 꽤 길 것이라 본다.
이 시의 시작은 꿈속에서 첫 싹을 틔웠다. 더러 믿지 않을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일상처럼 잡다한 꿈속에서 헤맬 때가 자주 있다. 비몽사몽간의 꿈결에서 나는 간혹 가다가 시를 건질 때가 더러 있다. 그 꿈의 한 자락에 ‘마추픽추’가 걸렸다. 살면서 시로 쓸 생각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마추픽추가 왜 꿈에 나타났는지? 또 꿈속에 마추픽추라는 이름이 동화 속 주인공 마추와 픽추라는 현시를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맑은 정신이 되어서 정말이지 이것 하나로 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꿈꾼 것을 시로 만드는 것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시작했다. 이런 연작 장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자칭 프로라고 내세우는 내가 완전히 코가 꿰인 것이다. 처음에는 짧게 시 한 편 만들어 볼까 했었다. 그런데 한 편을 쓰고 보니 장시를 쓰지 않고는 안될 만큼 너무 범위를 크게 잡은 시가 되어 있었다. ‘마추픽추’ 1에 해당하는 시가 그것이다.
내친 김에 서방질한다고 늙어 별로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도 한데 그럼 어디 한 번 내 생애에 마지막이 될 긴 시를 써볼까 하는 마음이 일게 되고 어기적어기적 쓰는 것도 아니고 안 쓰는 것도 아닌 시 쓰기를 시작한 것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열을 받게 되어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쓰는 것도 아니고 안 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마추픽추’ 2의 도입부가 너무 길게 만들어진 것에 해당된다. 시의 리듬이 완만한 데서부터 점차 마추픽추의 돌, 돌의 비상, 콘도르, 잉카의 심장으로의 동일성을 타는 상상력과 리듬의 급박함이 작품 ‘마추픽추’에 몰입하게 되는 내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쓰면서 스스로 내 감각이 아직도 노인 축에는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 솔직히 이렇게 긴 시를 쓸 수 있다는 내 시적 상상력과 내 입담과 끈기에 내 스스로 놀랐었다. 이 놀람이 시를
이끌어가는 추진력이 됐다. 마추픽추는 나그네 걸음으로 물론 내가 들러본 곳이다. 내가 아는 마추픽추에 대한 지식은 가보긴 했었지만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주마간산이었다. 연작 장시 ‘마추픽추’가 끝났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결과적으로 마추픽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이니까 마추픽추라는 신비하고 거대한 공간에 겁도 없이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시인이란 그런 존재자다.
마추픽추는 사라진 인간의 역사다. 돌의 문화고 돌의 역사다. 나는 그 속에 들어가 돌 한 조각을 주웠을 뿐이다. 그 돌 조각을 만지는 동안 나는 몇 해 전에 가 본 전란 후의 발칸 반도 속의 한 지명을 떠올렸다. 모스타르Mostar라는 곳이다. 모스타르는 세르비아 6년 전쟁의 원인이 된 곳으로 아름다운 아취형 모스타르 다리를 사이하고 이슬람교와 세르비아정교와의 전쟁이 불붙은 곳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 간의 전쟁은 모스타르 다리를 파괴하며 시작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사라진 다리를 복원하면서 강물 속으로 사라진 돌들을 평화와 화해의 의미로 일일이 한 조각씩 다시 건져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 시를 쓰는 동안 사라진 역사에의 복원이라는 의미에서 이 모스타르다리의 돌들을 늘 염두에 두었음을 여기에 밝히고 싶다.
세월이 참 좋아졌다. 시가 될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하여 컴퓨터 검색창을 두들겼다. 거기서 콘도르킨카니 페루드란스니 코카나무니 케냐니 라마니 하는 시가 될 만한 시어들을 몇 개 가져왔다. 참 이 말만은 믿던 믿지 않던 꼭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누가 도와주는 것처럼 ‘마추픽추’를 쓸 때 이와 연관된 상식들을 주변에서 얻었었다. 가령 시속에 나오는 마카나 와나바나 잼들은 텔레비전 종편 프로그램을 보다 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어들조차 분명치 않다. 가령 종편에서 얻은 아말씨 같은 것도 꼭 시어로 쓰고 싶었는데(아말씨는 잉카가 죽을 때 사용한 마취제라 하는데 이것을 복용하면 투명한 정신으로 아무런 고통 없이 죽는다고 함) 이 아말씨가 아마씨인지 뭐인지 분명치 않아서 못 썼다. 또 잉카인들은 태양신에 바치는 제물로는 사람의 심장을 바쳤었다. 인두人頭경기는 아즈텍 문명에서 행해진 일이지만 표현의 다양성을 위해 잉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데서 가져왔다. 콘도르킨카는 인테넷 어디에서 본 것이다. 나중에 좀 확실히 알기 위하여 다시 검색하여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잉카제국의 전체 왕들을 대표하는 독수리황제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다. 또 다른 시어들도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어서 이 조차도 그저 그럴 것이라는 어림짐작으로 쓴 것이다. 그래도 이 몇 개의 시어가 있어 겨우 마추픽추 잉카문명의 냄새를 시에서 좀 내게 되었다. 나머지는 완전히 시적 상상력과 감으로 쓴 것임을 밝힌다.
연작 장시 ‘마추픽추’는 내 여행시의 종결편이다. 나는 그 동안 여행시라는 이름을 걸고 시집 한 2권을 묶어도 될 만큼 써왔다. 여행시를 쓰게 된 동기는 대다수의 여행시라는 것이 가본 곳의 경치가 좋다는 투의 풍물시 위주여서 그런 투가 너무 굳어지면 안 되겠다는 나름의 생각으로 써왔었다. 나의 연작 장시 중국과 갓 수교를 맺은 직후의 죽竹의 장막을 들어 가면서의 느낌을 노래한 ‘대륙에서’, 아내를 바이칼에 수장시키는 ‘바이칼’, 그리고 이번 순전히 내 시적 상상력의 산물인 ‘마추픽추’로 여행시를 끝내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여행시를 시작한지 작품 ‘대륙에서’ 발표를 기점으로 해도 20여년의 세월은 족히 흘렀다. 특히 내 여행시가 사랑의 대서사시(?)로 끝나게 되어서 기쁘다. 기쁜 이유는 풍물시에서 벗어난 여행시를 쓰고 싶다는 내 바람이 이 작품으로 어느 정도 충족되어서다.
이 시에서 좀 더 큰 욕심이 있다면 잉카문명 전반에 대한 보다 폭넓게 다루었으면 하는 것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내 한계다. 이 시는 보다시피 마추와 픽추의 슬픈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써간 사랑 시다. 마추와 픽추는 믿고 싶지 않은 당신과 나이기도 하지만 한편 누구나 내재된 욕망 속에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당신이고 나다. 시에서도 밝혔듯이 “모든 꿈같은 만남이란/광활한 우주공간을 유영하다/도킹하는 우주선처럼 맺어지는 순간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에는 그런 불가사의한 신비함과 시계보다 더 정확한 필연의 순간이 있기 때문에 문학의 영원한 테마이리라. 마추와 픽추는 그런 사랑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나는 그러므로 이 시에서 사랑을 살다가 사랑을 못살아서 헤어진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황홀한 사랑의 극점을 살아가려한 자유인을 노래했다. 살았던 시대와 절대 신격神格을 거부한 반항의 몸짓이자 황홀한 사랑의 극점이 꼭 이런 거냐고 하면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부분으로는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기 위해 읽어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추픽추라는 공간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나는 나름대로 우리시에서 찾기 힘든 온갖 부도덕하고 배덕적인 근친, 난교, 사드, 마조 등을 두루 섞었다. 이 방면의 지식이 일천하여 많이는 내가 섭렵했던 독서의 기억을 되살렸지만 이것조차도 좀 쓰기에 민망하고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늙은이이니깐 노인이 무슨 말을 못할까 싶어 과감히 삽입한 것이기도 하다. 늙는다는 것도 때로는 좋을 때가 있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아쉬운 것도 있다. 쓰면서 사랑을 좀 쇼킹하게 묘사하고 싶었었다. 소설가가 아니어선지 흡족할 만큼 그 리얼성을 얻지 못했다. 내 능력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또 굳이 필요 없는 말이지만 시가 너무 길어 시의 이해를 위해 몇몇 행들은 다른 글자체로 하였다. 시의 소제목 대신에 달은 것도 되고 또 시의 주요부분도 되기 때문이다. 별다른 큰 의미는 없다.
이 시를 읽은 누군가가 “글로벌한 시대를 사는 시”라고 말했다. 이 시 한편으로는 가당찮은 얘기지만 우리시도 우물 안의 개구리를 벗어나 좀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 또 시란 막연히 비움의 미학쯤으로 여겨왔는데 채움의 것들도 있어야 한다는 믿음도 이 시를 쓰면서 가졌었다. 나는 어쨌든 나태가 싫다. 시란 너무 한곳에 살이 물러 터지도록 오래 정체해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시를 쓰는 한 그렇게 살 것이다.
강우식∙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호 水兄, 老平, 果山. 시집 사행시초(1974), 고려의 눈보라(1977),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 물의 혼(1986), 설연집(1988), 어머니의 물감상자(1995), 바보산수(1999), 바보산수 가을 봄(2004) 발간. 시극집 벌거숭이 방문(1983), 시에세이집 세계의 명시를 찾아서(1994), 시론집 육감과 혼, 절망과 구원의 시학(1991), 한국분단시연구, 시연구서 한국 상진주의 시 연구 발간. 현대문학상(1975), 한국시인협회상(1985), 한국펜클럽문학상 시부문(1987),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2000) 수상.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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