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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신작특선/하두자/증발의 방식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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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하두자
증발의 방식 외 4편
아직도 독이 오르는가
날카로운 가시를 두르고 고양이 각도를 세우면서
비로소 길게 누운 몸뚱아리
켜켜이 펴지질 않는 너를 안고
숨을 한 번 삼킨다
이쪽저쪽을 꾹꾹 눌러대며
캄캄한 통점에 대하여
우린 논쟁하지 못한다.
그냥
수행자처럼 엎드려
온몸 바닥에 귀를 대고 눈을 감지
급격히 떨어진 체온을 통째로 삼키며
희뿌연 마음밭이 조금씩
땡볕에 데워지는 사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돌아서는 너,
허튼 소리에 하얗게 삭아 내리는 너를
슬픔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아이는 어른이 되고 거짓은 진실이 되는 방식 그대로.
주름치마
흘러내린다 당신의
배후에서 자꾸자꾸 줄을 풀어
그녀의 속을 들여다 본다 손금을 들여다 본다 수면 위로 떠올라 흔적을 남긴다 아가미처럼 커다란 입을 벌려 파도에 무늬를 그려낸다 만삭의 달이 층층 뼈를 삭힐 때 배꼽은 떨어져 나가고 빤짝이던 주름은 늘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을 응시하면 끌어당기는 힘, 먼 바다를 향해 밀려나간 뼈를 삭힌 바람 들락거리며 뿌리를 내려주기도 했지만 한밤 풍경 속에 바다가 싱싱했던 그녀의 깊은 속, 골수를 휘감고 몸속을 오래 떠돌다 화들짝 놀란 자리 고단한 얼룩만이 등을 맞대고
어둠의 커튼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 통과한다 누구에게도 다가서지 못한 딱딱하게 굳은 주둥이를 한 겹씩 풀어내린다 꿈틀거리며 흘러내리는 주름, 기척도 없이 라면처럼 불어터진 오후를 잡아당기면, 길게 혀를 내어 물고 미래에 완성 될 우리들의 얼굴은 거울과 함께 자라는 것일까
분칠을 해야 하듯 당신의 주름치마는 불안하고
남아 있는 이야기를 거울에 문지르며
자꾸만 줄을 풀어 사방 벽에 새긴다
벚꽃 또는 분분한 오해에 관하여
벚꽃들이 봄날을 걷고 있다
지천의 꽃잎들을 후후 불며
촘촘한 그늘 아래 슬쩍,
입술을 포개기 전 당신의 메일이 도착했다
나도 벚나무에 스며들듯
그림자는 그림자 속으로 기울어지는 오후
그 너머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속살들이 부풀어 오를 때
당신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방이 있었다고
말했던 게 당신이었나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는 채
안녕,
나는 벚꽃 그늘 밖으로 자꾸 미끌어지고
한때
레몬처럼 새콤했지만,
호의적이지 못했던 저녁,
벚꽃 지천으로 흩날리고
스르르 흘러가는 몸과 마음을
당신의 그늘 속으로 슬쩍 밀어 넣어 볼까요
가지 사이로 지느러미 환한 햇살 같이,
저물녘
마음 허물지는 것인지, 후후 벚꽃이 흩날리는 것인지
우리 모두 안녕,
스마트 폰에 관한 기록
문과 방 사이
옷걸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화분이 놓여 있다
당신의 와이셔츠 사이와 구름 사이로
바람이 일고
정오 한나절을 알리는 스마트폰 화면에
방금, 여름이 도착했다
우주의 저 쪽 끝으로 한 사람이 사라지고
들숨과 날숨의 분주해진 스마트폰
티브이 속 낯선 거리를 활보하는
순정한 하루가 궁금하다고 즐거이 봐 달라고
보채는 한 공간도 가득해진다
비옷을 입으려고 옷걸이 쪽으로 갔는데
옷걸이에서 벗어나려 한 음씩 높아지는
비파나무 음계들
커피물이 끓어오르다가
당신의 체온이 다시 식어가고
폭우 속에 잠기는 우리의 일상들
당신과 나뭇잎 사이로 구름이 몰려오고
방금, 여름이 도착했다고 딩동거리는
내 스마트폰엔
먼 곳 사연들의 안부가 자욱하다.
창 틈새로 걸쳐 있는 스마트폰
휘파람 부는 방향으로 몸을 떨고 있다
여름 수첩
―장마․1
어깨에 달려있는 빗방울의 방들을 본다
아침이면 더 무거워진 어깨가 조금씩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머리 위로 우기의 바람이 불곤 했다
팔 다리를 뻗고 허리를 좌우로 비트는 틈새
기상 캐스트는 허공을 짚는다 비가 내릴 거라고
삐걱이는 뼈들이 욱신거리며 신음소리를 낸다
포물선을 그리는 피뢰침에 걸려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은 푸른곰팡이 꽃을 피우고
천둥과 번개는 한때 엉켰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채
어둡고 축축한 창틀에서 흠뻑 젖은 무성한 토란잎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우산을 준비했지
관절들의 비명은 축축한 물방울무늬를 만들기도 하며
기울어지는 내 어깨에 눅눅한 한 덩어리 구름을 반죽을 한다
비워진 몸 안 속으로 무엇인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며
몸 밖 닳아빠진 문턱을 넘어가는 동안
비가 다시 오고
내 어깨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밤새 참았던 텅 빈 뼈들의 비명에
저기압 고지를 넘어 가는 구름의 이동속도
열린다, 서서히
장마가 시작된다
시작메모
순결했으면 한다
하늘은 높고 볕이 뜨겁다. 열 받은 땅과 더위 먹은 산과 들판 수상한 기온은 고개 숙일 줄 모른다. 힘겹게 살아남은 여름의 땡볕에 자애로운 힘을 풀어 모든 상처를 보듬어주고 떠났으면 한다. 장맛비에 할퀸 산과 들판들 어루만지고, 눅눅하게 스며있는 시름더미들 털어내고 등을 말린다. 차곡차곡 쌓여서 웃자란 말의 넋두리들을 대책 없이 휘둘린 어지럼증과 말의 목마름, 삶을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더는 숨길 수 없는 햇살에 꼭꼭 닫아 놓았던 서랍장도 정리한다. 길게 꼬부라진 나의 잠도 내려놓고 이리저리 가을의 수런거림도 찍는다. 버린 꿈의 숨결은 차오르는 잠으로도 고요하겠지. 걸어서 천천히 길을 걸어 깊숙한 숲의 끝자리에 서 본다. 무성한 잎새 사이로 보이는 하늘 눈이 부시다. 한세상 환히 불 밝히고 떠나갈 잎새들, 견뎌온 만큼 제 등불에 가만히 불을 당겨 타오르기도 하겠지. 가을이 깊어가면 가을이 깊어갈수록 가슴이 먹먹해질수록 이 가을, 내 피는 말갛게 닦인 렌즈처럼 순결했으면 한다.
하두자∙199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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