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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집중조명/정민나/시연試演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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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039회 작성일 14-08-0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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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정민나/시연試演 외 5편

 

 

흙이 창백한 손으로 길을 떠매고 들어선다면

 

원인은 배수불량, 뿌리 전체가 지하주차장으로 토심이 깊지 않아

 

장송은 바깥으로 이식하고

 

낮은 왕벚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매실나무 자두나무 까이츠까망나무 이팝나무는 울타리 안쪽으로

 

수액이 바작바작 말라가는 거미줄은 겨울 한철 다하도록 끊어지는 모기나방의 허공이어서

뿌리는 울컥 어둠을 토해놓고

 

모과나무가 갑자기 점프해서 말을 걸어온다면

 

새로 심으려고 파헤쳐놓은 햇볕은 푸를 청청 하늘에 눕히고

 

통신장애가 있는 이팝나무는 단지 후문 쪽 여물어가는 새소리와 함께

 

녹음을 낭독하는 저편…… 열기와 습기의 풍경 속이라면

 

 

 

 

 

공작 5호라는 이름으로

 

 

바퀴가 될 것 같지 않은 리어커와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은 빈 병들의 길가에서

 

그 건물이 그 동네에 서 있는 것은 줄기를 모두 자른 고목이 몸통만으로 꽃을 피우는 것과 흡사하다

 

봄비가 될 것 같지 않은 노래와 울타리가 될 것 같지 않은 날개로 계단의 창문마다 공작 5호가 둥지를 틀고

 

빛 속의 요정 장미의 외출 화려한 봄밤 휘황한 글자들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층계를 오르는

 

이 비연속적 꿈의 설계도는 누구의 꿈꾸는 다락방인가

 

깨진 보도블록과 인기척이 될 것 같지 않은 오래된 창문들과 마주 서서

 

낮은 하늘을 오르는

 

이 울퉁불퉁한 검은 구름은 누구의 神을 덧대고 있는 살갗인가

 

딱딱한 지상으로 사각형의 벽돌을 쌓아올리며 내가 모르는 바람 불어 휴장을 예고하는

 

화요일의 백일홍은 어디로 가는 걸까 원추리가 사뿐 착지하는

 

함지박 화분이 매끄럽게, 마음의 파란 싹을 내민다면 콘크리트 옥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기특한 일이냐

 

초록 해가 뜨는 집 공작 5호는 얼마나 신기한 날개의 시간인가

 

 

 

 

 

연기緣起

 

 

싸이렌 울긋불긋 폭발하는 밤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누군가 신고한 모양인데

 

저 리얼한 演技는 안개 낀 날 솟아오르는 煙氣라서

 

그 벽 아래 물에서 자라는 속새는 얇은 대궁이 가는 막대기처럼 흔들리네

 

불도 나지 않았는데 시내 소방차가 다 쏟아져 나온

 

이 시간엔 똑바로 등을 세운 속새는 말도 하지 말아요

 

노를 저어 앞으로앞으로 나아가는 카누처럼

 

자기가 가고 싶은 날 자기가 먹고 싶은 날 푸른 잎을 복사한 봄은 짙은 연무 속으로

 

누가 손바닥을 탁 쳐서 이 한밤 울긋불긋 사라지네

 

 

 

 

 

꿈꾸는 씨앗

 

 

더워지기 전 이곳의 온도는 청단풍의 골짜기이다

 

밤에 산책을 하여도 어둡지 않은 맑은 공기다

 

커다란 풍산개와 작은 요크셔테리아가 교차할 때 앞으로 나아가던 두 몸이 지긋이 정지하는 시선이다

 

비 오기 전 이곳의 습도는 별을 머금은 하늘이다

 

이스트로 부푸는 잔디의 호흡이다

 

고랑을 파고 꽃상추를 심어보는 뜬구름의 종착역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멩이를 가져와 새로 일군 밭고랑의 경계를 세워보는 저녁

 

깊게 심은 씨앗은 어찌 될까 처음으로 염려하는 평지의 마음이다

 

건조한 흙을 깨뜨려 거름을 섞어보는 저물녘의 화분

 

대지의 물과 나뭇잎의 향기로 반죽하는 이녁의 날씨를 쏟아버리고

 

그래도 못미더워 물을 밀고 올라오는 속새이다 얼크랑설크랑 뿌리들 해뜨기 전,

 

네가 바라보는 광물성은 이곳의 식물성과 손을 잡을까 햇빛을 가리는 자기 몸조차 싫어하는……

 

 

 

 

 

물챙이 여울

 

 

우리 애는 눈밭 위 고양이로 앉아 있고요

먹을 것 없는 덤불 속을 헤매다가 추위 속을 뛰쳐나왔구요

아무도 아랑곳 하지 않는 개울가를 노려보고 있고요

그러나 우리 애는 햇살의 계단 거꾸로 내려오며

계단의 햇살 뒤집는 까치들 공격하지 않아요

어느새 우리 애는 조용히 얼음 밑 소라로 걸어가고 있고요

하얀 물의 뼈로 자라고 있고요 얼마 전부터 물챙이 다리

우리 애는 자잘한 꼬챙이를 엮어 엄마인 나를 촘촘히 걸러내고 있습니다

더는 못 가겠어 소리를 질러도

우리 애는 빨간 통로에서 하얀 미끄럼틀을 주르르 내려가고 있고요

겨울 음수대는 단수되었습니다 눈의 꼭대기에서

엄마는 여기 갇혔어 소리를 지르면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입장권을 뽑아오는 물챙이 방죽

우리 애는 호루라기를 불고요 얼음 밑 물고기를 잠그고 있고요

그러면 꽁꽁 언 빙판 위에도 더 이상 헐벗은 고양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 애는 초고속 범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활처럼 휘어지는 만국기 휘날릴까요

 

 

 

 

 

하루살이에게 길을 묻다

 

 

하루살이 떼들이 빈 상자 주위에서 아우성이다 무슨 일일까 거기 꽃잎 같은 화창한 시간은 보이지 않는데 내밀한 꽃의 향기라도 스며 있다는 것일까 하루라는 전생을 덮치며 오르락내리락 너희들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니? 한가운데를 휘휘 저으며 들어갔는데

 

헬리곱터가 낮게 떠가는 시간을 훌쩍 건너 복사꽃이 과속으로 피어나는 도로를 향해 그녀는 급커브로 돌아가는 한 무더기 진달래꽃이었는데

 

 

매번 잘못 들었다고 등을 떠미는 까칠재 터널을 지나 캄캄한 봄의 기차를 타고 아라리촌 밤의 동굴로 가는 사십이 번 국도를 따라 낮에 왔으면 정말 예뻤을 거야 밤이라서 보이지가 않네 위로하는 구간들을 달려

 

 

전방에 미끄럼지역 전방에 사고 다발지역 전방에 낙석주의…… 이런 길은 저 번에도 지나온 길이라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지만 전방에 모래 속 반 쯤 보이는 풀포기

 

 

전방에……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손바닥에 써 보이는

 

 

꽃잎을 매달고 훅! 비린내로 불어가는 전방에 몇 개의 발자국……

 

 

 

 

시작메모

존재가치를 새롭게 복구하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해피트리를 가져와 아파트 빈 땅에 심었다. 몸통에 붙어있는 잎새는 겨우 몇 잎 살아 있고 가지는 꺾인 채 생명이 말라가는 중이었다. 이사를 오가는 주민들이 간혹 볼품없는 나무를 버리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이 나무는 그냥 버리기 민망해서였는지 잎이 달린 가지를 뚝 부러뜨려 놓았다.

잎사귀가 아직 팔랑이는 그 나무를 안아다 땅을 파고 통째로 심은 후 함께 버려진 화분 속 흙을 긁어모아 거름처럼 주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는데 몇 달간 목숨만 붙어 있던 나무가 드디어 무성하게 잎을 내미는 것이었다. 폭우와 열기 속에서 나무는 소생한 것이다. 생명의 감촉은 거칠고 연하지만 물이 오르는 나무는 푸르렀다. 음악이 흐르는 교실과도 같이…… ‘육체의 재발견’이라는 베르그송의 생성과 실감의 철학이 떠오른다.

생동하는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버려지고, 찢어지고, 꺾여나가는 생활의 파편들을 순간적으로 체화하고 지루한 현실에 낯선 느낌을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곧, 이 나무의 변화처럼 진정한 운동 그 자체를 자각하는 일 말이다. 나무의 불연속적인 체험처럼 어느 순간 충돌을 통해 그 카오스로부터 질서를 생성해 내는 것, 그것이 시가 아닐까? 시들시들 죽어가던 나무가 비속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기 존재감을 재구성 하는 것.

그것은 시인이 시를 통해 존재 가치를 새롭게 복구하는 일이고 새로운 세계를 촉구하는 일에 다름 아니듯 말이다.

 

정민나∙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3년 꿈꾸는 애벌레, 2011년 이야기가 있는 시창작 교실, 2011년 점자용 이야기 창작 교실, 2012년 시가 있는 마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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