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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집중조명 해설/백인덕/백인덕|시적 ‘한계限界’의 다른 이름―정민나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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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해설
백인덕
백인덕|시적 ‘한계限界’의 다른 이름―정민나의 작품세계
미래는 현재에 주어져 있는 조건들의 재배치가 아니라 불확실한 것으로 다가온다. -앙리 베르그송
1.
특정한 시대적 현상으로서 시작詩作을 괴롭히는 여러 환경적 요인들이 있다. 가령 작품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든지 서정적이라든지, 또는 소품적 구성이 문제거나 서사가 장황하다거나, 나아가 연, 행갈이가 있다/없다 등 세부적으로 열거하면 족히 수십 개는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 외적 평가마저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시인의 자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분히 인상印象적 평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언급들도 철저하게 범주화하고, 층위에 따라 분석, 의미부여가 된다면 분명히 가치 있는 시작의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오늘의 시인은 내적 욕망을 다스리며, 동시에 외적 영향을 여과 흡수해야 하는 이중의 악조건 아래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정민나 시인의 이번 작품들은 가장 근원적인(결코 철학 일반적으로 ‘본질적인’이란 의미가 아닌)인 한계에 맞닥뜨린, 아니 정확하게는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여러 시도를 보여준다. 사유의 내용은 ‘말과 죽음’이며, 시인의 시도는 ‘끊기와 비틀기’라는 방법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간과 언어’라는 존재론적 한계를 자각하면서 자신의 시 쓰기의 ‘단속斷續과 왜곡’이라는 방법을 통해 한계 너머를 탐색한다. 명확하게 밝혀둬야 할 것이 있다. 시간과 언어라는 차원 자체가 존재론의 근본 영역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두 차원에 대한 사유가 철학으로 반드시 환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굳이 철학으로 환원할 필요가 없는 시적 사유의 지평에서 멈출 것이다.
2.
두 개의 방법이 가능해 보인다. ‘시간과 언어’라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과 ‘단속과 왜곡’이라는 방법상 구성 특질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 물론 이 둘을 종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대상’ 위주로 구성하기로 한다. 일단 이 글이 정민나 시인의 시적 특질을 밝혀보는 것이 목적이지 그 미래상을 예단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필자의 능력 한계를 넘어선다)
이번에 접하게 된 작품들만으로 추론이 가능하다면, 정민나 시인은 언어에 대한 매우 세밀한 감각을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 언어는 시적으로는 어휘나 비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나아가 언어학 일반에서 구문법에 적절한 사용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체계나 기교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발화되고 형성하는 것으로서의 언어, 즉 ‘말’에 대한 감각, 아니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1)바퀴가 될 것 같지 않은 리어커와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은 빈 병들의 길가에서
(2)그 건물이 그 동네에 서 있는 것은 줄기를 모두 자른 고목이 몸통만으로 꽃을 피우는 것과 흡사하다
(3)봄비가 될 것 같지 않은 노래와 울타리가 될 것 같지 않은 날개로 계단의 창문마다 공작 5호가 둥지를 틀고
(4)빛 속의 요정 장미의 외출 화려한 봄밤 휘황한 글자들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층계를 오르는
(5)이 비연속적 꿈의 설계도는 누구의 꿈꾸는 다락방인가
(6)깨진 보도블록과 인기척이 될 것 같지 않은 오래된 창문들과 마주 서서
낮은 하늘을 오르는
(7)이 울퉁불퉁한 검은 구름은 누구의 神을 덧대고 있는 살갗인가
(8)딱딱한 지상으로 사각형의 벽돌을 쌓아올리며 내가 모르는 바람 불어 휴장을 예고하는
화요일의 백일홍은 어디로 가는 걸까 원추리가 사뿐 착지하는
(9)함지박 화분이 매끄럽게, 마음의 파란 싹을 내민다면 콘크리트 옥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기특한 일이냐
(10)초록 해가 뜨는 집 공작 5호는 얼마나 신기한 날개의 시간인가
―「공작 5호라는 이름으로」 전문
인용 작품의 표면적 서사는 비교적 직선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폐허의 어떤 곳에 ‘공작 5호’라는 이름의 집이 있다. 그런데 그 집의 정체가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모호하다’라는 것은 분명히 인지되지만 의미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를 지칭한다.(글의 편의상 앞에 붙인 번호를 사용함)
서사의 표면적 이해는 직선적으로 가능하다. 배경으로서 (1)-(2)는 ‘공작 5호’가 ‘그 건물’임을 드러낸다. 또한 그 건물이 폐허에 유일하게 남은 온전한 형상이라는 것도 줄기를 모두 자른 고목이 몸통만으로 꽃을 피운다는 비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모호함은 (3) 이후부터 드러나고 점차 시행이 거듭됨을 통해 증폭된다. (3)에서 ‘공작 5호’는 ‘둥지’를 트는 그 무엇이 된다. 건물이나 집의 부동성不動性, 비활성非活性이 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1)의 리어카, 거울과 (3)의 노래, 날개의 대비를 통해 준비된다. 어쩌면 리어카, 거울, 노래, 날개가 모두 ‘∼가 될 것 같지 않은’이라는 비유를 통해 수식된다는 점은 시인의 비극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로를 따라 ‘그 건물’ 또는 ‘공작 5호’는 ‘꿈의 설계도’(5)가 되고 ‘검은 구름’(7)이 된다. 시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4)에 나열된 이미지, “빗 속의 요정 장미의 외출 화려한 봄밤 휘황한 글자들”과 (6)의 ‘보도블럭’과 ‘낮은 창문’은 지나친 장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작품에서는 ‘설계도→다락방’으로 ‘검은 구름→신의 살갗’으로 그 지향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끝 연에서 “초록 해가 뜨는 집 공작 5호는 얼마나 신기한 날개의 시간인가”라는 자기인식의 재확인으로 끝을 맺는다. 왜 새로운 인식이 아니라 재확인일 수밖에 없는가? 가장 중요한 의문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보충하기로 한다.
언어가 한계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언어의 본래 속성으로 그것은 우리가 발생하기 이전에 확고한 체계로, 즉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으로서 더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명명되어진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좀 비약하면 전자는 언어를 랑그로 이해했을 때고, 후자는 파롤인 ‘말’을 적용할 때 설득력이 강해질 것이다. 결국, 시인이란 자신이 형성할 수 없었던 체계 안에서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 마저도 늘 의미란 이름의 기존 작품의 압력아래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민나 시인의 대응은 매우 적극적이고 도발적이며 극단적으로 보인다. 시인은 작품 「시연試演」에서 사물로서의 시어의 다양함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모과나무, 장송, 왕벚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매실나무, 자두나무, 까이츠까망나무, 이팝나무, 장미, 이팝나무” 등이 등장한다. ‘시연’이란 말 그대로 시험 삼아 연출해 본 것을 의미한다. 좀더 함축적으로 모색이나 탐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물로 환원된 시어들을 제외하고 작인作因만으로 작품을 재구하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남는다.
(1)말을 걸어온다면
(1))방향을 잘 잡아야 해요
(3)교체해야 해요
(6)도입부만 말하지 말고
(11)파헤쳐놓은 또 하나의 몸을 위하여
환원시켜 버린 사물, 즉 명사가 아니라 발화의 지점에서 언제나 새롭게 생성될 수밖에 없는 동사를 축軸으로 했을 때 이처럼 시적 의미는 명료해진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시적 명료함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산란하는 시행을 통해 ‘무엇’인가를 흩어 놓으려는 전략을 배면에 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의미 파악이 용이한 「연기緣起」에서마저도 ‘緣起, 演技, 煙氣’가 “누가 손바닥을 탁 쳐서 이 한 밤 울긋불긋 사라지네”라는 마지막 행으로 수렴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결국 정민나 시인은 언어유희가 아니라 기교 이상의 그 무엇을 겨냥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다.
3.
시간과 언어, 굳이 하이데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존재론의 출발점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질문을 바꿔, 시인에게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 한계일까, 물론 시간이다. 언어는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의 경험과 더불어 변용, 개선이 가능하다. 아마도 시를 쓰는 이유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시간은 선취된 것으로서 반드시 ‘죽음’을 예비한다. 그냥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은 생명으로서 시간을 부여받는 순간 미래의 사건으로서 죽음도 동시에 이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이미 성취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끔직한 사실을 망각한 채 살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또 다른 속성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애는 햇살의 계단 거꾸로 내려오며
계단의 햇살 뒤집는 까치들 공격하지 않아요
어느 새 우리 애는 조용히 얼음 밑 소라로 걸어가고 있고요
하얀 물의 뼈로 자라고 있고요 얼마 전부터 물챙이 다리
우리 애는 자잘한 꼬챙이를 엮어 엄마인 나를 촘촘히 걸러내고 있습니다
―「물챙이 여울」 부분
정민나 시인이 이해하고 있는 ‘시간상狀’은 이 작품에 잘 드러난다. ‘물챙이’는 “물 더하기 창窓”의 속어이다. 일반적 의미로는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의 개울에다 자잘한 꼬챙이를 발처럼 촘촘히 엮어서 박아 놓은, 일종의 필터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챙이는 위쪽에서부터 떠내려 오는 나뭇가지나 지저분한 것들을 걸러내기도 하고, 윗마을에서 내려오는 쓰레기나 내 마을에서 나가는 쓰레기를 도중에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싸리나무 줄기를 창살처럼 엮어서 개울에 가로질러 놓고 오물이 걸리도록 한 거름 장치를 일컫는다.
인용 작품은 ‘엄마/애’의 대립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시에 등장하는 ‘물챙이 여울’, ‘물챙이 다리’, ‘물챙이 방죽’은 거름장치, 필터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필터를 설치하고, 끝내는 ‘초고속 범선’이 항해할 수 있는 대양大洋까지 흘러가는 것은 ‘우리 애’다. ‘엄마’는 여러 겹의 필터에 갇혀 그 흐름에서 배제되는 존재가 된다. 좀 비약해서 이해하자면 물이 보여주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엄마/애’가 보여주는 것처럼 ‘먼저에서 나중으로’ 흐르는 것, 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정민나 시인의 시간상의 일차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길게 에둘러 왔지만, 결국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교란될 때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존재 현성顯成의 촉발로서 ‘현재’의 순간을 형상화할 때 발생한다.
(1)고랑을 파고 꽃상추를 심어보는 뜬구름의 종착역이다
(2)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멩이를 가져와 새로 일군 밭고랑의 경계를 세워보는 저녁
(3)깊게 심은 씨앗은 어찌될까 처음으로 염려하는 평지의 마음이다
(4)건조한 흙을 깨뜨려 거름을 섞어보는 저물녘의 화분
(5)대지의 물과 나뭇잎의 향기로 반죽하는 이녁의 날씨를 쏟아버리고
(6)그래도 못 미더워 물을 밀고 올라오는 속새이다 얼크랑설크랑 뿌리들 해뜨기 전,
―「꿈꾸는 씨앗」부분
이 작품에는 ‘씨앗’이 꿈꾸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다. ‘온도’, ‘공기(바람)’ ‘습도’, ‘잔디의 호흡(토양)’ 등 제반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단순하게 (4)를 통해 유추해보면 씨앗은 아마도 ‘꽃상추’의 씨앗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은 그것이 “뜬구름의 종착역”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면서 무화無化된다. 우리는 누구나 ‘뜬구름의 종착역’이 소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2)연의 해석 때문이다. ‘경계’는 공간적으로 이곳과 저곳이 구분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접하게 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저녁’은 낮과 밤이 교차되는 시간으로서 또한 그 접점이 된다. 이 작품 전체를 (2)를 경계로 해서 ‘뜬구름/이녁’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해석의 한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계에 대한 탐색이 정민나 시인의 시적 특질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유는 시인의 작품을 아직 충분히 접하지 못한 필자의 무능 때문일 수도 있고, 아직은 시인의 시적 한계가 너무 큰 힘으로 작용하기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루살이 떼들이 빈 상자 주위에서 아우성이다 무슨 일일까 거기 꽃잎 같은 화창한 시간은 보이지 않는데 내밀한 꽃의 향기라도 스며 있다는 것일까 하루라는 전생을 덮치며 오르락내리락 너희들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니? 한가운데를 휘휘 저으며 들어갔는데
헬리콥터가 낮게 떠가는 시간을 훌쩍 건너 복사꽃이 과속으로 피어나는 도로를 향해 그녀는 급커브로 돌아가는 한 무더기 진달래꽃이었는데
매 번 잘못 들었다고 등을 떠미는 까칠재 터널을 지나 캄캄한 봄의 기차를 타고 아라리촌 밤의 동굴로 가는 사십 이번 국도를 따라 낮에 왔으면 정말 예뻤을 거야 밤이라서 보이지가 않네 위로하는 구간들을 달려
전방에 미끄럼지역 전방에 사고 다발지역 전방에 낙석주의…… 이런 길은 저 번에도 지나온 길이라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지만 전방에 모래 속 반 쯤 보이는 풀포기
전방에……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손바닥에 써 보이는
꽃잎을 매달고 훅! 비린내로 불어가는 전방에 몇 개의 발자국……
―「하루살이에게 길을 묻다」전문
이 글에서 유보했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앞의 인용 작품을 통해 생각해 본다. 어설픈 결론을 앞머리에 붙인다면, 시인이란 결국 언어든, 시간이든, 존재이든 그 모든 한계에 봉착하고, 또 한계의 지평을 넓혀가는 행위 전부가 ‘말’, 즉 ‘시작’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하루살이’로 비유된 일상적 삶이란 어쩌면 ‘아우성’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까칠재 터널’을 지나 ‘아라리촌’으로 가는 일탈적 귀향도 질적으로는 그 ‘아우성’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시인의 표현처럼 “전방에 미끄럼지역 전방에 사고 다발지역 전방에 낙석주의……”와 같은 미래(전방)에의 위협(주의)은 시인들에게는 근원적인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전방에 모래 속 반 쯤 보이는 풀포기”가 진정한 위협이 된다. 전방은 시공간상 미래지만 ‘보이는 풀포기’는 현재 나의 시선에 포획된 것이므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정민나 시인은 “전방에……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라고 어쩌면 한계의 끝자락에 묻고 있지만, 이미 그 질문이 자신의 한계를 시적으로 확장할 것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백인덕∙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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