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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집중조명/이명/막사발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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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356회 작성일 14-08-08 12:15

본문

집중조명

이 명

 

막사발 외 5편

 

 

천년의 비밀전이다

막사발 하나 붉은 카펫 위에 올라있다

 

어둠 속 조명을 받고 있는 막사발

누르스름한 색채

 

단번에 휘 돌렸을 것 같은

도공의 거친 손자국이 깊숙이 남아있다

 

태토 반죽 같은

질퍽한 한 끼의 밥이 그림자로 남아있는

 

입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물자국이 보인다

 

내 안으로 막사발이 들어오기까지

내가 어둠을 빠져나오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지

 

 

 

 

서까래 등뼈

 

 

가송리 고택은 향유고래다

지붕에 조개껍데기 같은 희끗희끗한 반점들이 보인다

대청마루에 누운 나를 서까래가 감싸고 있다

 

서까래 사이로

옛사람들이 물결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립다는 생각에

서까래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살점은 곰삭아 뼈들만 골격을 갖춘 고택

 

여러 갈래의 등뼈들이 대청마루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실 말씀이 따로 더 없는 중심에는

적선積善,

그림자만 살고 있다

 

미처, 한 끼의 영양도 되어드리지 못하는 내가

그 속에서 발효되고 있다

 

몸을 뒤척여보지만

드릴 말씀은 따로 더 없이

그러나

등뼈의 굴레는 한없이 포근하다

 

 

 

 

유마거울

 

 

장독대 간장독 뚜껑을 열어보니 간장은 보이지 않고

한 단지 가득 하늘이 들어 있습니다

 

엷은 구름 한 장, 헤진 모시적삼처럼 수막에 떠있습니다

 

간장 속, 그 속

메주가 푹 삭아 거울이 된 것이겠지요

 

포대기 냄새가 나는 것이겠지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당신의 그림자, 눈을 닮았습니다

 

잎맥만 간신히 남은 이파리 하나 바람에 흘러갑니다

 

 

 

 

자물통 나무

 

 

우리가 채워야 하는 것이 장지문뿐이랴

정처 없이 떠도는 우리의 맹서도

채워야 하는 것이다

 

남산 맨 꼭대기

가지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자물통으로만 무성하게

세월 따라 물들고 있는

쌍떡잎식물강 연리지나무목 단풍나무과

짝을 이룬 자물통들이 서로를 채워주고 있다

 

문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채워서 공중에 매달아야 비로소 열리는 문

 

서로를 껴안고 나무는

더 없이 포근하게 단풍들고 있다

 

 

 

 

검정알나무 울타리를 생각한다

 

 

밤 9시,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촘촘한 검정알나무 울타리 밖까지 들린다 쥐들도 소리 따라 나무 밑을 빠져나간다

 

검정알나무 연한 잎들에도 연둣빛 이슬이 맺혀 있다

 

나무도 싹을 틔우며 근본을 생각했을 것이다 단단히 땅에 뿌리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의 소리가 울타리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두 팔을 벌려 단단히 잡아두었을 것이다

 

수대에 걸쳐 경계를 지켜온 나무의 열매가 쥐똥 같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쥐들이 드나들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새카만 열매 속에 사내의 바람기와 여자의 소리를 꽁꽁 묶어 두었을 것이다

 

 

 

 

중년의 사랑

 

 

오동도집 연포탕 2인분에는

세발낙지 두 마리와 모시조개가 들어간다

 

조개와 무가 익었을 때

수조에서 갓 건져 온 낙지의 머리를 잡고

발끝부터 집어넣는다

열탕에서 낙지가 몸부림치며 발을 비비꼰다

몸을 뒤틀며 올라온 놈의 허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여자가

사정없이 가위를 갖다 댄다

육수도 벌겋게 달아올라 소용돌이친다

 

여자는

단번에 모든 것을 끝내고 돌아서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엉덩이를 흔들며 간다

 

매번, 그런 사랑이 하고 싶어

가위를 딸깍거리며 간다

 

 

 

시작메모

낡은 것들의 향연

 

때로 낡은 것에서 향기가 날 때가 있다. 그 향기에 취해 나는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낡은 것은 언제나 텅 빈 공간을 지니고 있다. 그 속에는 몹시도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이 있고 시간이 있고 추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낡은 것들을 사랑하고 종종 낡은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 속 텅 빈 공간을 기웃거리며 나는 낡은 것들에 더욱 익숙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내게서 또한 낡은 냄새가 나는지도 모른다. 낡은 서까래가 그렇고 푹푹 발효되고 있는 장독대가 그렇고 그 속의 간장이 그렇다. 나는 홀로 대청마루에 누워 서까래를 바라보고 장독 뚜껑을 열어 그 속에 떠 있는 하늘을 본다. 그리고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솜털구름을 깔고 편안하게 주무실 당신을 생각한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무작정 길을 나선다. 샐비어 길을 따라 걸으며 당신의 향기를 맡는다. 끝없는 그리움, 적선積善. 낡은 것에서는 언제나 당신의 향기가 난다. 그 향기는 붉다.

 

이명∙경북 안동 출생.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2013년 숲속의 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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