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1호(가을)집중조명/진순애/천년의 전설을 좇는 초월적 그리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447회 작성일 14-08-08 12:18

본문

집중조명 해설

진순애

 

천년의 전설을 좇는 초월적 그리움

 

 

현대시가 아름다운 것은 현대시의 한 자락을 그리움이 받치고 있어서이다. 시의 원형이 찬가라면, 현대는 찬가의 시대가 아닌 까닭에 찬가의 자리를 그리움이 대신하면서 현대시의 아름다움을 그리움의 미학이 견지하고 있다.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현대시가 그리는 그것이 원형의 세계와 유야무야 무관할 수 없어서 현대 시인들은 의식보다는 무의식 속에서 천년 전 원형의 세계를 초월적으로 그리워하리라. 그리움의 깊이는 시인의 개인적 세계에 따르면서도 인류가 지나온 천년의 무게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현대 시인의 개인적 그리움이 천년 전 근원적 인류의 보편적 세계 안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현대의 끈이 가 닿는 곳이 천년 전 인류의 근원이며 현대 시인의 끈이 가 닿는 곳 또한 천년 전 근원적 인류의 세계일 수 있는 가교는 시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초월성에 있다. 달리 말하여 시인의 초월적 그리움이 천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좇아가 천년 전 전설의 세계에 닿게 되는 초월성의 근원인 것이다. 시의 목소리가 희미해져가는 현대에서도 시가 예찬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천년이라는 시간만을 거스르는 초월이 아닌 까닭에 그러하며, 반복되며 계승되는 보편적 목소리가 내재된 천년의 전설인 까닭에 그러하다.

이와 같이 천년의 전설을 좇는 그리움으로 노래하는 이 명의 신작시는 천년 전 인류의 자취를 만나게 하면서도 지금 여기 우리들의 초상 또한 반추하게 한다. 반추 속에 환기되는 이 명의 반성은 끝없이 반복하며 지속해야 하는 그의 시쓰기의 이유이기도 하겠고, 현대에도 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년의 전설을 좇는 이 명의 초월적 그리움은 개인적인 반성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반성을 끌어내면서 시대를 질타하는 역사적 미학으로 확장된다. 이를 위해 ‘막사발, 서까래, 장독대, 장지문’처럼 사라져버린 혹은 사라져가는 것들이 소생하면서 그 속에 잠들었던 천년의 영혼들도 소생한다.

 

천년의 비밀전이다

막사발 하나 붉은 카펫 위에 올라있다

 

어둠 속 조명을 받고 있는 막사발

누르스름한 색채

 

단번에 휘 돌렸을 것 같은

도공의 거친 손자국이 깊숙이 남아있다

 

태토 반죽 같은

질퍽한 한 끼의 밥이 그림자로 남아있는

 

입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물자국이 보인다

 

내 안으로 막사발이 들어오기까지

내가 어둠을 빠져나오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지

―「막사발」 전문

 

국어사전은 ‘막사발’을 ‘품질이 나쁜 사발’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막’이라는 말이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라는 뜻이므로, ‘막사발’은 품질보다는 ‘함부로 사용하는 사발’이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함부로 사용하는 사발’은 품질이 나쁘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하기도 하겠지만, 반드시 그러하지만은 않다. 품질이 좋은 사발일지라도 사용한 지 오래됐거나 한 경우에 막사발로 그 신세가 전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함부로 사용하는 사발에 내재된 또 다른 의미에는 매우 ‘편안하다’거나, ‘친밀하다’는 등이 있다. 이는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발’, 곧 ‘꼭 필요한 사발’이 막사발이라는 의미를 탄생시킨다. 그러니까 국어사전이 지칭하는 ‘품질이 나쁘다’는 의미는 제거된 채 ‘일상에서 꼭 필요하다’는 새로운 의미의 막사발이 탄생되는 근저에는 막사발과 일상을 함께하는 주체들의 삶의 여정이 살아있다.

따라서 막사발에는 ‘거칠면서도 깊은 천년의 그리움이 배어있는 도공의 손자국’이 살아있고,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질퍽한 한 끼의 밥과 눈물과 거친 세월’이 살아있다. “내 안으로 막사발이 들어오기까지/내가 어둠을 빠져나오기까지//나는 또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지’”라고 탄식을 동반한 그리운 반성 속에 막사발에 내재된 전설의 깊이도 이 명의 그리움의 깊이도 더해간다. 천년의 그리움을 간직한 막사발이란 이 명이 풀어내야 할 천년의 비밀과 다르지 않으므로, 천년의 전설의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 명 또한 그리운 막사발의 초월 만큼 초월해야 가능한 일인 까닭에 이 명의 탄식적 반성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가송리 고택은 향유고래다

지붕에 조개껍데기 같은 희끗희끗한 반점들이 보인다

대청마루에 누운 나를 서까래가 감싸고 있다

 

서까래 사이로

옛사람들이 물결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립다는 생각에

서까래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살점은 곰삭아 뼈들만 골격을 갖춘 고택

 

여러 갈래의 등뼈들이 대청마루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실 말씀이 따로 더 없는 중심에는

적선善,

그림자만 살고 있다

 

미처, 한 끼의 영양도 되어드리지 못하는 내가

그 속에서 발효되고 있다

 

몸을 뒤척여보지만

드릴 말씀은 따로 더 없이

 

그러나

등뼈의 굴레는 한없이 포근하다

―「서까래 등뼈」 전문

 

‘서까래’도 ‘막사발’ 만큼의 전설과 그리움을 깊이 내재한 천년의 대상이다. ‘가송리 고택의 서까래 사이로 옛사람들이 물결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풍경을 상상하는 초월의 시간은 과거로의 초월이면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잊혀져버린 서까래의 세계에 이르는 이 명의 초월적 그리움은 잊혀져버린 전설의 세계를 복원하며 그곳에 안착하기를 꿈꾸는 열망이 함께한다. ‘고택의 그림자가 주는 적선으로써 현대의 우리는 비로소 천년 전 근원의 세계에 따뜻하게 안착해 볼 수도 있다’는 이 명의 반추적 반성 속에 천년의 전설이 아로새겨진다.

집은 그 집에 거주했던/하는 자들을 반사한다. 집은 그 집에 거주했던/하는 자들, 바로 그들을 은유하는 공간이다. 그림자만 살고 있는 고택일지라도 그 고택의 역사는 전설이 된 그림자로 살아있으므로, 비어버린 고택은 소멸될 수 없는 전설의 힘을 천년의 시간조차 초월하여 무궁히 보존하고 있다. 때문에 고택은 천년의 전설을 간직한 고택이면서도 천년의 전설의 힘으로 현재를 떠받치는 무궁한 진행형의 세계이다. 그 집에 거주했던 영혼이 고택의 곳곳에 살아 있어서 고택은 영원히 살아있는 고택으로 남는다. 고택은 흉흉한 그림자가 난무하는 흉가가 아니라 천년 전의 따뜻한 영혼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포근한 생명의 공간으로 유구하다.

 

장독대 간장독 뚜껑을 열어보니 간장은 보이지 않고

한 단지 가득 하늘이 들어 있습니다

 

엷은 구름 한 장, 헤진 모시적삼처럼 수막에 떠있습니다

 

간장 속, 그 속

메주가 푹 삭아 거울이 된 것이겠지요

 

포대기 냄새가 나는 것이겠지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당신의 그림자, 눈을 닮았습니다

 

잎맥만 간신히 남은 이파리 하나 바람에 흘러갑니다

―「유마거울」 전문

 

막사발도 비어있고, 서까래의 고택도 비어있고, 장독대의 간장독도 간장이 없다. 천년 전 공간도 비어있고 그곳을 채우던 인걸 또한 간 데 없어도, 그 그림자는 남아서 그리운 전설을 퍼 올리게 한다. ‘간장독 단지 안에는 가득 하늘이 들어있고, 엷은 구름 한 장 헤진 모시적삼처럼 수막에 떠있어서’ 깊어가는 그리운 간장독이다. ‘비어있는 간장독과 간장 속, 그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그리운 눈을 닮아있어서’ 간 데 없는 인걸의 영혼도 살아 숨쉬게 한다.

천년을 거스른 간장독의 전설은 고택의 전설처럼 그림자로 남아서 깊이를 잴 수 없는 영혼의 빛을 길어 올리고 있다. 거울은 간장독 속을 가득 채운 하늘을 반사하기도 하고, 흘러가는 엷은 구름 한 장을 반사하기도 하고, 기억 속의 간장을 반사하기도 하고, 한때는 그 집을 가득 채웠던 인걸의 그림자를 반사하기도 한다. 천년의 시간을 초월하는 이 명의 시간 속에서 비어있는 간장독이 천년의 전설로 되살아난다. 비어있는 간장독의 울림이 유마거울과 다르지 않다는 전언이다.

 

우리가 채워야 하는 것이 장지문뿐이랴

정처 없이 떠도는 우리의 맹서도

채워야 하는 것이다

 

남산 맨 꼭대기

가지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자물통으로만 무성하게

세월 따라 물들고 있는

쌍떡잎식물강 연리지나무목 단풍나무과

짝을 이룬 자물통들이 서로를 채워주고 있다

 

문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채워서 공중에 매달아야 비로소 열리는 문

 

서로를 껴안고 나무는

더 없이 포근하게 단풍들고 있다

―「자물통 나무」 전문

 

문은 열어야 하고 또 닫아야 하는 기능으로 집을 받치고 있다. 열어야 할 때 열리고, 닫아야 할 때 닫히는 것이 제대로 살아있는 문이다. 때문에 자물통으로 언제나 채워진 문은 제대로 살아있는 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자물통 나무」는 “우리가 채워야 하는 것이 장지문뿐이랴/정처 없이 떠도는 우리의 맹서도/채워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채워야 하는’, 곧 ‘닫아야 하는’ 문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처럼 닫아야 하는 기능이 중심에 있는 문이 장지문이다. ‘방과 방 사이의 칸을 막아 끼우는 문’인 장지문은 닫혀있을 때에야 제 기능을 하는 문인 것이다.

열려있기보다는 늘 닫혀있어서 이 방과 저 방, 곧 각각의 방이 저대로 하나의 독립된 공간으로 살아있게 하는 기능을 장지문이 하므로, 장지문이 열려있을 때는 이 방과 저 방은 각각 저대로의 방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방이다. 이때 장지문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장지문이 제 기능을 다 해야만이 ‘정처 없이 떠도는 맹서와 같은 것’들을 정처 있게 하도록 한다.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채워서 공중에 매달아야 비로소 열리는 문”과 같은 문이 장지문이다. 자물통처럼 채워 있어서 비로소 문의 기능을 하는 문이 장지문인 것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랑을 혹은 맹서를 붙잡아 채우려는 염원을 담은 자물통나무들도 닫혀 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장지문처럼 채워진 자물통이어야 제 기능을 다 하는 나무들이다. 그 염원의 세월이 천년의 전설을 좇는 그리움의 세계처럼 깊은 염원으로 채워진 세월일지라도, 천년의 세월쯤이야 그리움 한 자락으로 초월해버릴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하는 까닭에 자물통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장지문과 같은 그리움을 담보한다. 천년의 전설을 좇는 그리움이 초월의 미학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렇듯 그리움은 천년을 하루처럼 혹은 자물통이 채워진 채 공중에 매달려야 비로소 열리는 염원의 자물통처럼 그와 같은 초월의 깊이를 간직한 미학으로 이 시대를 은은히 반추한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