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1호(가을)신작시/박제천, 백우선, 공광규, 최종천, 김윤환의 시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박제천, 백우선, 공광규, 최종천, 김윤환의 시
박제천
시절인연 외 1편
관상책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다 생긴 대로 살다 죽는다 사람만이 아니라 집도 절도 상相이 있고, 마음도 상이 있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낙산 사무실은 스무 살 처녀가 꽃단장을 하고 님을 기다리는 상이다 내가 사는 집은 요술램프 속 지니,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렁각시 상, 조강지처도 있고, 애인도 있으니 버킷리스트조차 필요 없는 인생, 오고가는 길에 서 있는 나무마다 인생들이 들어차 있다 오늘 아침엔 대학로 실개천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올챙이가 말을 거들었다 5천 년 전에 내가 상사병을 앓던 아가씨란다 그래서 내가 이 길로만 다녔구나 시절인연이 무섭구나 돌멩이 하나 걷어찼다가 5천 년만에 돌멩이가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차돌 하나, 손수건으로 잘 닦아서 실개천에 넣어주었다 물빛이 친구 구해줘서 고맙다고 반짝반짝 빛난다 얘는 또 어떤 인생인가 다음날 물어보기로 했다.
마음카드 놀이
타로카드로 오늘의 애정운을 점검,지금 사랑이 시작된 게 아니라면 사랑이 끝나는 거란다 인간관계를 본즉 사랑이 샘솟는, 이상형을 만나리라 한다 운명이 점지한 그 여자, 운명아 어서 그 여자를 찾아 내 앞에 데려와라 족쳤더니 운명이 대답하길, 숨겨진 마음 속 여자란다 그렇다면 마음은 또 어디 있나 심장 속에? 뇌 속에? 서로 제 속에 있다고 싸움질이다 혜능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라 마음질이라고 했다 맞는 말씀! 그런데 마음속 여자의 실체는? 보이는 것인가 느끼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 여자를 만나야만 답이 나올 것 같다 혜능아 그 여자를 내게 데려와라 이번엔 몸도 데려와라 타로카드를 다시 섞었더니 사탄도 운명의 수레바퀴도 예언가도 모두 틀렸단다 내가 직접 찾아내 애정을 고백하란다 할 수 없다 오늘밤엔 작심하고 마음속 여자의 실체를 꺼내서 인두겁 속으로 옮겨야겠다 실체를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하염없이 마음을 살살 달래는 중, 꼬셔대는 중, 실체 좀 보자, 꼭 좀 보자, 생전에.
박제천∙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박제천 시전집(전5권), 시집 장자시, 달마나무 등 12권. 시선집 밀짚모자 영화관 등. 저서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공저),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등. 영역시집 Sending the Ship Out to the Stars(고창수 역)(미국 코넬대 출판부 간행) 외. 한국시협상, 현대문학상, 펜문학상 등 수상. 현재 문학아카데미 대표.
백우선
입술 외 1편
귤이 한 상자 왔으나
귤도 아니고 감자도 아니고
입술들이었다.
나무만이 아니고 땅만이 아니고
사람들만도 아닌
이들 모두를 귤껍질로 감싼
제주도 말씀들의 입술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도 입술,
입술에서도 입술,
입 속에서도 못 다한 말의
입술이었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
입술 하나로도
그 깊은 어둠에 나는
그렁그렁 만수위였다.
서두른 천국행
시어머니는 여든이 넘었고
처녀 적부터 성당엘 다녔다.
재혼해 들어온 며느리는 교회에 열심이었고
비신자였던 아들도 처를 부지런히 따랐다.
시어머니가 다리가 아파 거동이 어렵자
며느리가 성당엘 차로 모셨으나
얼마 뒤부터는 교회로 태우고 다녔다.
시아버지 제사도 지내지 않자
형제들은 발걸음을 끊었고
친척들도 그 집에 갈 일이 없어졌다.
시어머니는 어느 날 유서도 없이
서둘러 천국으로 떠나버렸다.
백우선∙198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봄의 프로펠러 등.
공광규
푸른 잎들에게 외 1편
장마와 함께 작은 태풍이 지나간 아침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와 벚나무와 잣나무 푸른 잎들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찢어져 흙 묻은 꽃잎과 끊긴 풀잎도 젖어서 뒹굴고 있다
잎이 큰 버즘나무와 백화나무 잎들은
가지째 꺾여 나뒹굴고 있다
나는 이렇게 져서 뒹구는 푸른 잎들이 싫다
나무에서 나뭇가지에서
악착같이 견디지 못한 잎들이
쉽게 절망하고
자기를 함부로 포기하고
자기를 내던지는 젊은 잎들이 싫다
다른 잎들과 함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나누지 못하고
자기를 일찍 포기하는 잎들이 싫다
나는 싫다
자기를 함부로 던지는 푸른 잎들이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굴리는 푸른 잎들이
구두굽을 갈며
나는 오른쪽 구두굽이 더 가파르게 단다
발걸음을 의식하면서 걸어도
구둣방에 갈 때 쯤 되면
오른쪽이 굽이 더 가파르게 닳아있다
단골 구둣방에서 굽을 가는데
걸음을 똑바로 걷지 않아서
오른쪽과 왼쪽 뒷굽 기울기가 다르게 닳았다고
구두 수선공이 충고한다
구두 닦기부터 사십 년이 넘은 수선공은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사람들이 바르게 걷지 않아서
오른쪽과 왼쪽 구두굽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똑바로 걸어보라는 수선공의 충고를 들으며
발걸음을 고치려고 애써보지만 자연스럽지가 않다
같은 짝이어도
같은 방향을 보고 걷기가 어려운가보다
공광규∙1986년 ≪동서문학≫으로등단. 시집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담장을 허물다. 시창작론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최종천
가리봉 쪽방들 외 1편
속도와 정밀함을 위해 집적회로가 필요하다
구로디지탈 단지 근방의 쪽방들은
반도체만큼이나 정교하게 나누어져 있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방은 작게 쪼개져서
고밀도의 집적회로가 되어간다
방과 방을 치밀하게 잇는 골목은
신호가 돌아다니는 회로와 같다
소문들이 저항도 없이 순간에 퍼지고 나면
소문을 처리하느라 방들에서는 불이 켜졌다가 꺼진다
구로동이 디지털 단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작게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쪽방들 때문이다.
쪽방촌은 미래의 반도체 기술을 상상하게 한다
구로 디지털 단지의 쪽방동네
여기가 바로 세계 제 1의 실리콘 벨리이다.
분단유지비
대한민국의 지도를 보고 있으면
반집짜리 바둑 두기가 연상되는 거다.
주변의 강대국들이 두는 바둑을
남과 북이 훈수를 두는 격이다.
강대국들이 다, 남과 북의 지배계급들이 다,
분단 상태의 특혜를 누리고 있는데,
저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통일비보다 분단유지비가 더 많다.
개인과 개인의 생존경쟁이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노동계급이 아무도 이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 노동을 하게 된다.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이 아닌 계급으로 분단되어
분단유지비를 지불해 가며 자본주의는 유지 된다.
노동착취를 말하지만 기실, 착취의
수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쓰는 돈은 사실상
분단 유지비를 지불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최종천∙1986년 ≪세계의 문학≫, 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고양이의 마술. 2002년 제20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2012년 오장환 문학상 수상. 2012년 최우수도서상 수상.
김윤환
엄마의 기차 외 1편
종착역을 찾지 못한 채 늘 달리기만 했다 증기에서 디젤로 다시 전기엔진으로 바꾸어 가며 달렸지만 번번이 정차역을 놓치곤 했다 문득 끊어진 시간의 간이역 아무도 손 흔들지 않는 역사에 승객을 내리고 화물을 내리고 엄마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길을 남기고 상처 난 침목 무너진 철교 위를 지나 머나먼 종착역을 향해 기적도 없이 떠나시곤 했다 엄마의 기차는 왜 한 번도 정차하지 않았을까 간이역의 국수 한 그릇도 드시지 않으시고 기적을 울리는 끈 한 번 당기지 않으셨을까 엄마는 왜 당신의 종착역에서만 우리를 기다리시는 걸까
마음에 터널이 생길 무렵
엄마! 부르니
그 기차 돌이켜
철커덕 철커덕
내게로 오시네
국화의 삼일
떠난 자의 빛나는 삼일을 위하여
지상의 피 뚝뚝 흘리며
검은 리본 사이 꽂힌 생화를 본다
국화과 분향의 향내가
서로를 의지해 맴도는 동안
눈물 없는 조문은 계속되었다
발인發靷과 함께 실려 나가는 꽃들
삼 일간 함께 울어준 꽃잎들
길 위에 떨어지고 땅 위에 떨어지고
알 수도 없는 시간 위에 떨어지는 동안
꽃을 보낸 이도 꽃을 받은 이도
그 꽃말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 꽃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김윤환∙경북 안동 출생.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등. 논저 한국현대시의 종교적 상상력 연구, 박목월시에 나타난 모성하나님 등.
- 이전글51호(가을)신작시/맹문재, 박완호, 홍일표, 채재순, 강경호 14.08.08
- 다음글51호(가을)집중조명/진순애/천년의 전설을 좇는 초월적 그리움 14.08.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