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1호(가을)신작시/맹문재, 박완호, 홍일표, 채재순, 강경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5,098회 작성일 14-08-08 12:48

본문

신작시/맹문재, 박완호, 홍일표, 채재순, 강경호

 

맹문재

그릇론 외 1편

 

 

1.

나는 그릇에 관심이 많아 어느 날 선생님을 뵐 때 말씀드렸는데 한 음식점에 가보라고 하셨다

그 집의 그릇이 전통 도자기처럼 질감이 좋거나 색감이 고급스럽거나 문양이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손님이 별로 없는 허름한 음식점이었다

나는 음식보다는 손님들 식탁 위에 놓인 그릇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지만 일반 음식점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그릇은 실금이 가 있어 의아하게 여겼다

 

몇 번 더 들렀지만 특별한 면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선생님께 그릇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3.

얼마 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그릇의 어떤 면을 보아야 하는가?

 

 

 

 

슬픈 인사

―어느 지인의 이메일

 

지난 12월 30일 저의 아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갔습니다

 

비록 저보다 먼저 영광스런 나라로 갔지만, 이 세상에서 함께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기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슬픕니다

 

여러 해 동안 고통을 안고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부르심을 받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슬퍼하는 저를 찾아와 위로해주시고 또 먼 나라에 있는 아내를 위해 기도해주심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부족한 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천국에 있는 아내도 내려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아내에게 못 다한 사랑을 가슴에 안고 봉사하는 삶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을 또 다른 사랑으로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하시길 기도하옵니다

 

맹문재∙1991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

 

 

 

박완호

변성기變聲期 외 1편

 

 

문득, 물소리가 지워졌다 얼음장 아래를 지나는 물방울들, 한꺼번에 뒤꿈치 들고 가는 걸까 바닥의 돌멩이들까지 한순간 조용하다 속기사速記士의 손놀림마냥 물속을 가로지르는 송사리들, 오후의 햇살 삼킨 지느러미들이 순식간에 손가락 틈새를 빠져나가는 이월의,

 

책장을 넘기는 여자의 손에 걸려 있던 시간이 주춤하는 사이, 돋보기에 매달린 글자들 곁을 지나던 바늘소리가 맥없이 바닥으로 굴러 내린다 주머니에서 나는 전화벨소리, 선로가 지워진 물길을 건너온 물고기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자의

 

목소리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동안 달력이 몇 번 바뀌었다 전화기 너머 제자리를 맴도는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도돌이표를 단 여보세요, 가 주문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공중전화부스의

 

외줄그네 타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암호暗號가 불협화음으로 나부끼는 한쪽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던 바람이 갈 데도 없이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나서는, 이월의

 

 

 

 

옥수수수염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할아버지가 되게 흔들렸다

 

기침소리보다 먼저

구부정한 허리가 살짝 돌았다

 

지게작대기 그림자 드러눕는 저녁이면

수염가닥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급한 마음에 그만

수염을 끌어당기자

 

긴 얼굴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박완호∙충북 진천 출생.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안의 흔들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아내의 문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등.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서쪽’ 동인.

 

 

 

 

홍일표

산란하는 공중의 시선 외 1편

 

 

바둑돌이 도르르 구르다가 콩새로 날아간다

 

생선의 눈 안에서 마지막 본 바다가 어죽처럼 끓을 때

여자는 일곱 살 아니 아흔 살의 노파

 

혀를 뱉어내듯

비가 내려요

휘파람은 지하에서 잘 들리는 밤의 목소리

 

이슬방울 같은 빙어가 공중에서 반짝 무게를 털어낸다

 

희고 부신 눈은 고요한 불

세계는 타오르고

그러나 멸망하지 않는 밤은 불붙지 않아

 

쥐를 삼킨 독수리가 먼 하늘 어디쯤에서 돌멩이로 떨어진다

돌멩이를 이해하는 순간 마른 풀잎 끝을 만지는 저녁의 손가락이 맑아진다

 

이제 모래알의 입술로

몇 시냐고 묻지 마요

 

불현듯 손바닥이 낯설어지고 맥박은 우연히 태어나는 중이다

 

 

 

 

야상곡

 

 

풍선은 풍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틈은 사라지고 딸꾹질처럼 틈이 생깁니다 몸과 몸 사이에서 별이 태어나고 바위의 심장이 부풀어오릅니다 어둠을 길게 구부려서 동굴을 만듭니다 풍선과 풍선 사이로 박쥐 떼가 날아오르며 어둠을 잘게 쪼개어 부숩니다

 

동굴이 날아갑니다 검은 새 떼가 하늘에 구멍을 뚫습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허공의 눈썹이 꿈틀거립니다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빗줄기는 목이 긴 여자입니다 눈동자 없는 눈에서 저문 골목이 안개처럼 흘러나옵니다

 

입술을 떠난 목소리는 수백 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습니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는 산 아래 낡은 집 불 꺼진 아궁이에 몸을 웅크리고 눕습니다 풍선은 풍선을 끌어안지만 영영 만날 수 없는 당신입니다 검은 새들이 달을 물고 동굴로 들어가는 푸른 밤입니다

 

홍일표∙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김삼환

기린의 뒷발차기 외 1편

 

 

그저 묵묵히 일만 하는 그는

주위가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좀처럼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다

심산유곡에서 수 십 년

수도를 한 것도 아닌데

이러저러한 세상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마치 기린이 목을 길게 빼고

개미들이 움직이는 땅을 내려다 보며

그저 풀잎이나 뜯어 먹겠다는 듯,

별로 말이 없던 그가 어느 날

호랑이나 사자도

속수무책 당하고 마는

기린의 뒷발차기처럼

옆 사람 뒷덜미를

순식간에 가격한 것을

나는 분명히 보고 만 것이다

 

 

 

 

안다니 똥파리

 

 

고로쇠나무에 구멍을 뚫어서

수액을 받아 마시며

骨利樹라 하여

뼈에 좋다느니 어떻다느니

입 달린 놈들이 무리를 지어

안다니 똥파리처럼

왁자지껄 떠들어 쌓는디

그렇게 구멍을 내어

물을 빼버리면

젠장,

말 못하는

고로쇠나무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김삼환∙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따뜻한 손 등 5권. ‘역류’ 동인.

 

 

 

 

채재순

교목 외 1편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한 때는 우렁찬 한 그루 느릅나무였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힘을 준 적이 있었다 거뭇거뭇해진 동문들이 동문회가 열릴 때마다 우러러보곤 했다

봄이면 어린잎들이 제법 기운을 북돋아보긴 하지만 가지 끝까지 살리기엔 역부족 동문회와 학교 측에선 교목 살리기 대책위원회를 열었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에 곰팡이 일가를 이루고 두 팔 치켜들기조차 힘들게 되었지만 교목으로 모셔지고 있다

어느 봄 꾸벅 졸다가 잎 틔우는 일을 놓쳐버리고 싶다 연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전할 수 없는 날들이 가고 있다 살랑 바람에도 움찔 할 때가 있다 왼쪽으로 기운 채 걸어가는 노인에게 눈이 간다 기우뚱한 몸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서쪽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흘림골

 

 

태풍에 쓰러진 나무

누워서도 잎을 피웠다

 

누우니 물소리 한결 가깝다고

온몸 환해진 와불!

 

성가신 햇살 잎으로 가리고

낮잠이라도 주무시고 싶은지

가늘게 눈 뜬 채

저기 절벽에 앵초도 있으니

흘려보지 말고,

조심해 내려가라며 펄럭이는 손짓

 

철쭉꽃 지고

울울창창 잎을 키우니

왁자지껄해지는 흘림골

느리게 말을 거는 너럭바위 읽는 사이에

산새들 집 찾아들고

층층나무의 저녁이 오고 있다

 

채재순∙199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 끝에서 시작하는 길, 나비, 봄 들녘을 날아가다, 바람의 독서. 강원문학 작가상 수상.

 

 

 

 

강경호

나를 바라보다 외 1편

 

 

또다시 새가 서재에 들어왔다

다시 만나니 반가웠지만

새는 안절부절 못하며

서재를 헤집고 날아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곳에서 헤매는 새처럼

만약 내 인생의 길이 꼬여

오지로 빠져버린다면

어찌할까를 생각한다

찌찌찌찌 찌찌찌찌

새의 알 수 없는 언어처럼

당황한 내 인생의 질문은

이방인과 소통하지 못해

다만 새처럼

찌찌찌찌 하며

웃음을 또는 울음을 울며

날개를 파닥이며 헤매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신

손바닥에 손오공을 올려놓고 바라보는 부처님처럼

나를 바라볼 것이다.

 

 

 

 

은행나무의 품

 

 

이사간 집 은행나무 기운이 넘쳐

인부들 시켜 베어냈는데

쓰러져 누운 은행나무의 일생이

사십 미터가 넘는다

사람으로 치면 큰 인물 쯤 되는지라

향교나 서원에 호적을 두었더라면

귀한 선비 대접을 받았을 텐데

민가에 적을 두다보니 수모를 겪은 것이지만

수백 년 동안 햇빛을 가리고 찬바람을 막은

종부처럼 넉넉한 은행나무의 품이

뿌리 파낸 구덩이의 빗물이 되었는데

천석 논 먹여 살리던 저수지 같다.

 

강경호∙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 휘파람을 부는 개 외 다수. 문학평론집 휴머니즘 구현의 미학.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2010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겸 주간. (사)에코미래센터 이사장.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