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1호(가을)신작시/김종태, 안효희, 우대식, 이정란, 김영찬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김종태, 안효희, 우대식, 이정란, 김영찬
김종태
자가수혈 외 1편
스테인리스 메스들은 발끝에서 두리번거리고 링거액을 조몰락거리는 가운은 머리카락 끝에서 흐릿하고 흰빛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나 둘 셋 그리고 이별 잠시 후 만남 어른거리는 천개의 손이 피 주머니 속에 담긴 기다림을 정맥 속으로 다시 밀어넣네 무통의 스위치를 누를수록 애련愛憐의 응고는 길어지리 누구도 자신의 눈에 고인 눈물은 보지 못하리 잊으려 하면 반드시 되살아오는 것들이 있네 망각과 기억의 회전문을 지나 무명無明은 먼 바다로 흘려보낸 물살을 엮어 내 몸 깊은 곳을 은은히 쓸어주네
저 피가 사라지면 네 마음의 소리들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허공을 서성이는 관음觀音의 지문들아
복화술사에게
봄 햇살을 빌려 가을 석양을 더 아롱지게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저녁과 아침을 넘나드는 사람, 그가 나르시스의 목소리로 슬퍼할지라도 그는 나르시스가 아닙니다 그가 예레미야의 목소리로 예언할지라도 그는 예레미야가 아닙니다 시력을 줄여 청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미각을 감춰 촉각을 벼릴 수 있을까요 바람이 불면 마음을 닫아도 세상의 숨은 감각들이 되살아옵니다 그리하여 별빛을 향한 모든 짐승의 목소리는 근원적으로 슬픔의 테두리에 갇혀 있습니다 그 경계를 벗어나고자 몸부림할 때가 낯익은 비극의 발단입니다 우리는 오늘 소리 없이 노래해야 합니다 그 음역의 높낮이가 어딘지 몰라도, 우리는 내일 길 없는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그 깨달음의 시간이 언제인지 몰라도
김종태∙경북 김천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현재 호서대학교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안효희
굴참나무 외 1편
영하 57도의 고도를 날아갔다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
천 년을 지켜 온 굴참나무가
하얗게 껍질 벗은 채 둥근 활처럼 서있다
꽃이 피고도 한참
그 다음해에 열매가 익는 나무는
그 어떤 미래도 바꿀 수 없는 기다림이 전부다
천 년이 된 그늘이 전부다
바람이 거친 파도소리를 낼 때
다가온 발자국 소리가 나를 채찍질한다
거대한 그늘은 섬처럼 둥실 떠 있고
나무는 그 섬의 주인이 되어 말한다
여긴 오래 있을 곳이 못돼
나는 수많은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봉하고 있지
공기를 막아 넘치는 말을 줄이는 것이지
그곳엔 처음부터 말을 멈추지 않는 고요가 웅크리고 있다
가볍게 떠다니며 서성이는 게 전부인 나는
코르크 마개도 없이 입이 꽉 다물어졌다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침묵의 신음
그것은 새들처럼 나무 위를 날아서 흘러갔다
다시 모든 공기는 깃발처럼 흔들리며 배가 고팠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들어갔다
악취
다시는 되돌아 나갈 수 없는 골목, 페즈의 염색장, 털이 벗겨진 가죽이 생전에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다 여기저기 땡볕에 뒹구는 것은 너덜너덜 찢어진 비명, 살점이 붙은 비명은 모두 비둘기 똥물에 담근다 가끔은 죽은 비둘기를 따라 훠이훠이 날아가기도 한다 사내는 죽은 비명을 휘저으며 꾹꾹 밟아 댄다 코를 박고 엎드려 문지르다 보면 영혼은 이미 달아나고 없다 육체는 붉었다가 희어지고 다시 검어질 뿐, 숨은 쉬지 않을수록 좋다 수십 수백 번 검어지는 손으로 붉은 구슬을 달아 슬리퍼를 완성한다 웃어본 적 없는 그가 슬리퍼를 신고 걸어간다 악취에 절여진 발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비틀비틀 악취가 걸어온다 한쪽 모퉁이에 심어진 박하나무가 쎄~한 숨을 들이 마신다
* 시인의 주문에 의해 들여쓰기가 안 되어 있음.
안효희∙부산 출생. 1999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서른여섯 가지 생각.
우대식
아나키스트의 고백 외 1편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떤 아나키한 개의 기억
―후지와라 신야
세상에 믿을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조금씩 무언가에 위안을 주며
더러 위안을 받으며 살아갈 뿐,
그러므로 어떤 교훈도 그리 유용치 못하다
가장 똑똑하게 목도하는 진실은 지금
살아있다는 것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
모든 생명 안에는 야차가 있다
‘나’라는 곳으로 지독하게 ‘나’를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지상에 뚝 내팽겨친다
‘아나키’란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뚝 떨어진 존재,
‘아나키’란 묻혀간다는 점에서
죽음에 가깝다
뚝 떨어져 묻혀가는
하나의 슬로우 모션
끝까지 슬로우 모션
종점을 향해
山役․4
초여름 내리는 비는
여전히 슬프고
초여름 내리는 빗속에 마시는 술은
여전히 맑고
개울물은 조금씩 불어
장화 발목을 넘고
목수건에 물은 듣고
밥그릇에 내리는 빗물
황토흙이 엉킨 장화를 벗고
공손히 술과 밥을 받고
스윽 허공에 젖은 수건을 문지르면
환한 얼굴이 몇,
보이다 다시 사라진다
우대식∙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이정란
발자국 속의 나비 외 1편
하늘을 구기고 있던 발자국 a가
발자국 b에 먹구름을 쏟아낸다
발자국 c의 몸속에서 발자국 d가 튀어나온다
발자국 d는 양쪽 날개의 모양이 다른 나비를 키우고 있다
나비가 공중을 기울여 보는 사이
발자국 e가 구겨진 하늘 뒤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감춘다
갈매기 떼가 구름 위에 아무도 몰라보는 섬을 올려놓는다
섬엔 버려진 신발들이 나뒹굴고 있다
신발끈에서 녹슨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들은
어디로 이어져야 하나 두리번거린다
긴 여행에 앞서 발자국 f는 발자국 g에게
그늘을 빌려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보폭 사이에 지렛대를 심어 주세요
발자국 h, 눈을 감고 발자국 i 곁을 지나간다
발자국 h와 발자국 i 사이에 숨어 사는
발자국 아무개, 그의 표정은
잘못 해석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예민해 보이는 발자국 k에겐 물갈퀴가 있다
발자국 j는 발자국 k에게 물을 쏟아붓곤 수도꼭지를 얼른 잠근다
달리는 트럭의 엉뚱한 자세
우리를 벗어난 황소가 엉거주춤 서 있다
다리는 수직
속도는 수평
꼬리는 속도에 평행
다리는 황소의 것
속도는 바퀴의 것
꼬리는 바람의 것
엉뚱하게 갇힌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황소 자세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속도는 운전자의 것
황소는 황소의 것
울음은 태초의 것
누군가에게 발견된 황소가 녹아내리고
전혀 엉뚱하지 않게
황소의 눈알이 내 심장으로 흘러든 순간
들판에게 발견된 내
속에서 황소를 꺼낸다
황소와 몸을 나눠 갖는다
황소가 들판을 몰기 시작한다
황소 꼬리에 달려 있는 내 얼굴로
들판이 빨려 들어온다
막 떠오른 태양이 황소 등에 가파른 언덕을 올려놓는다
이정란∙199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나무의 기억력, 눈사람 라라 등. 현재 ≪시로여는세상≫ 편집장.
김영찬
물고기 모드스 비벤디Modus Vivendi 외 1편
물고기가 부레 약해져 비실거리면 물이 물고기 등을 받쳐준다
물고기는 기력 딸려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친다
필사적으로 물살 가르고 다니는 물고기
잠영 중에 혹시라도 탈진해 엎어질까 봐 물은
물고기 배때기를 줄창 밑 받혀준다
물살 센 데서는 물도 물고기도 서로가 상대방이 못 미더워
집요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지느러미 없는 물이 물고기 밥이라도 될까 봐서?
물고기가 죽으면 물귀신 되는 게 순리 그 가당찮은 조건이 한사코
못마땅하고 비위짱 상해서 하루 빨리 물속을 벗어나
날아올라야겠는데
물의 부력을 벗어나 온전한 자력으로 살아본 뒤에 답을 얻어도
그다지 늦지 않겠지
귀납적 해법을 찾아볼 생각에 물고기 입장에서
물과 물고기를 살펴보고 싶은 나는 물고기로 변신, 물속으로 퐁당
뛰어들어 물과 물고기의 사유에 접한다
미식가美食家 구르메gourmet
냅킨 펼치고 식탁에 앉아서
보나빼띠Bon appetit~! 라고만 건성으로 말했을 뿐인데
테이블 위 샐러드 접시가 잠깐 들썩
올리브오일 드레싱dressing 친 양상추가 얼결에
기립하려다가 엉거주춤
미소만 흘리네
보나빼띠Bon appetit~!
라고만 가볍게 혀 꼬부렸을 뿐인데
발갛게 홍조 띤 파프리카가 선뜻
쌈박한 예절차려 웃네
‘보나빼띠’가 대체 뭐요?
소반에서 팔팔 끓고 있던 중 된장찌개가 넌지시 묻네
그냥 맛있게 드시라는 뜻인데, 왜요?
아하……, 그럼 맛있게 드세요!
장 뚝배기 안에서 우물쭈물 무표정 일관하던 생두부가 움찔
말 참예 좀 하겠다고
우리 같은 토종들은 맛있게 먹으라는 말 안 해도
식탐으로 게걸스럽게 먹지요
실컷 끓고 나서 적당히 식은 뚝배기 장맛은 혀끝에서 요동치다가
막바지에 절묘한 뒷맛을 남기지
오늘은 느타리버섯 애호박 된장찌개가 전체요리appetizer를 대신
손색없이 깔끔한 맛
후식dessert으로는 아마 숭늉 한 사발?
으~, 크윽!
영 김 빼기 코스로 끝나게 될 공산
그러나
그건 생각하기 나름
탐식에 광분 흥분한 혀를 다소곳이 제자리에 맨송맨송
되돌려 놓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도 싶은데
그건 그렇다 치고 암튼,
보나빼띠~! 봄을 일찍 오게 일하기 싫어서 몸부림친다. 찬바람 분다. 봄은 게으르다.
김영찬∙충남 연기 출생. 2002년 ≪문학마당≫으로 시단활동 시작.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 투투섬에 안 간 이유 등.
- 이전글51호(가을)신작시/장석원, 김종옥, 김후영, 현택훈, 박시하 14.08.08
- 다음글51호(가을)신작시/맹문재, 박완호, 홍일표, 채재순, 강경호 14.08.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