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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신작시/민구, 이화영, 이성혜, 김춘리, 박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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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 이화영, 이성혜, 김춘리, 박정옥
민구
房 외 1편
―촛불
여자는 붉은 깃털로 짠 드레스를 입었어
알코올 중독된 그녀를 안고서 춤을 추네
몸 가누지 못하는 촛불
오늘밤 나의 품에 안겨 자지러지는 촛불
그녀의 어깨 너머 원형거울에서 눈 덮인 강이 쩍쩍 갈라져 가랑이를 벌린다
검은 양털, 푹신거리는 침대 위에 질퍽하게 쏟아내는 촛농과 바닥에 굳은 체액을 닦고서
흘러내리는 그녀의 가슴을 만진다 여자가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웬 사내 하나가 붉은 치맛자락을 나부끼며 나를 부둥켜안고 있다 귓속말로
불을 꺼도 될까?
거울에 비친 나를 더듬는 넌
房
―싱크홀
방은 붓 끝에 있다
붓 끝에는
검은 물감 한 방울
털이 빠진 까마귀가
팔레트 위로 날아간다
안에서 본 밖은 환하고
밖에서 보면 안은 깊은 구멍
붓꼬리에서 밤이 깊어진다
나는 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있으니
너는 그린다
붓 끝에 뭉개진 방을
자꾸만 쓰러지는 그 방의 탁자를
머리카락을 움켜쥔 나의 팔과 투명한 털이 솟은 너의 팔을
말꼬리 붓을 탐내며 한 사람이 서 있다
너는 붓을 놓고 방이 함몰된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내가 딸려 들어간다
민구∙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화영
사라진 왕 외 1편
―사과 이야기
소낙비 그치면 고양이 울음 길게 다녀갔다
검은 입술을 한 장씩 벗겨내면
이름 모를 눈썹이 한 잠 두 잠 뒤척였다
잠들지 못하는 저들의 푸른 기억회로 속
화살의 과녁은 책이 되어버린 사과였다
흰 물결을 타고 붉은 사과가 온다
사과를 부르며 사과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
먼 나라의 빛깔은
상처에 향기를 심은 어리석음을 이해했다
협곡에서 벌어지는 영혼과 육체의 접전
그 카타르시를 훔쳐보는 벌어진 상처
사과의 은밀함은 떨어지지 않은 꼭지에 있다
꼭지로부터 흘러내리는 어여쁜 둔부
둔부가 없었다면 꼭지는 오래 전에 잊혀 졌을 것이다
몸통을 가르는 불안의 경계에 흔들린 기미가 없다
마주보는 두 시선이 씨앗으로 남아있다
향은 버려지고 색은 사라진
꼭지를 잃은
책이 되어버린 사과 이야기
회전목마
떠나버린 공간이 비어있다
계절의 허파에 숨겨진 열두 가락이
해무를 빌려 입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미끄러진 낭만이 부풀어 오르고
몰아닥친 초록의 혁명은 대지 밖으로 흘렀다
몸통 어디랄 것 없이
대지에 고하는 저들의 밀서가 막막한 통증으로 온다
사방이 트였다 생각했으나
이것 또한 誤讀이였다
한 모금 남아 있는 보이찻물을 찍어 허공에 바친다
뿌리도 줄기도 없이 여백이 피어오른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저들의 律이 가볍다
이화영∙2009년 ≪정신과표현≫으로 등단. 시집 침향.
이성혜
사과를 위한 변명 외 1편
저무는 9월 사과밭에 등불이 내걸렸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빛-멜로디
흐르는 향기와 멜로디 따라 인사동을 헤맨다 사각틀에 담겨 낮은 조명아래 진열된 사과, 사과는 탐색하는 시선 앞에 어쩔 줄 몰라 붉게 두근거리거나 새파랗게 질려있다 크게 베어 문 사과 심만 남은 사과 반으로 쪼개진 사과 앞을 지나가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사과씨와 화해했다며? 축하해. 언제 다툰 적 있었나? 자기식의 화해지. 느닷없이 달려들어 해치우는 섹스처럼 제 요구만 요란하다 끊었을 뿐. 사과는 속살을 보이지 않았다 심방 소리도 들려주지 않았고 검은 씨도 뱉지 않았다 멜로디가 사라진다 두 개 세 개…… 주워 담을 수 없는 사과들이 무더기로 떠다닌다 목젖이 꽉 차오른다 따끔따끔 물집 잡히는 발가락이 통증을 감싸 안는다
저무는 4월 사과밭에 등불이 내걸렸다, 허옇게 번지는 멜로디를 제 몸으로 받아들이는 나무.
장미여관
제 몸이 나누어준 열기에 곁불 쬐려 태양이 내려오네
푸른 장화 깊숙이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허옇게 메마른 뼈에 삐거덕 삐걱 붉은 물 차오른다
틱톡-틱톡, 제자리를 도는 시계가 주인인 한갓진 주택가 장미여관
나른한 만족을 빨며 낮 손님 나가신다
아이보리 원피스가 보이고 도트무늬 코트가 뒤 따르네
레이스 재킷에 붉은 바지 연인, 보라는 듯 팔짱을 끼었군
귀를 맞대고 엉덩이 비비대며 겹겹 밀어 끌어안고 돌아가는 방,
한 달에 한두 번 바람난 비행기 머리 위로 날아가면
불온한 꽃잎처럼 화르르 휘날리는 소문 분분.
‘아름다운 여왕이 딸을 낳자 여왕의 남편들이 서로를 죽였다네.’
‘여왕이 살해되자 폭군이 공주를 차지했다는군’
겅중겅중 그루브 타고 무대를 휘어잡는 붉은 정장 사내들,
에브리바디 일어서서~ 소리 질러~
만개한 꽃숭어리, 가슴에서 bounce-bounce, 장미여관
이성혜∙2006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김춘리
여지礪砥* 외 1편
목도리도마뱀은 목도리에도
목숨 하나쯤 갖고 다닌다
우기 지난 주름진 목도리는 바깥귀로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껏 부풀리는 허세가 있다
나무 목도리가 낮잠을 즐기는 하루
엘리자베스 칼라 같은 목주름을 우산처럼 펼쳐든다
뒤돌아 갈 수 없는 두려움
잽싸게 나무 위로 도망간 주름
목숨을 한껏 부풀린 우기의 나무들
제 몸을 풍선처럼 부풀리는
화려한 위장술은 타인의 것이다.
불안한 허세는 막다른 허세가 된다
추운 날도 아닌데 겹겹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
주위를 둘러보며 목도리 자랑이 아슬아슬하다
남의 것으로 부풀릴 때 불안한 것은 꼬리다
자존심을 들여다보면 모두 벌거벗고 있다
계절 없는 화려한 목도리가 벗겨지면
그 자리에 남겨진 토막 난 꼬리
목도리는 얼마나 허술한 방패인가
부피를 의존하는 삶은 상처받을 곳이 많다
토막 난 꼬리는 여지礪砥다.
*여지(礪砥) : 숫돌에 갈고 닦음.
이퀄라이저
말 없이 절차를 따라야 하는 기록들이 있지
어지럽게 얽힌 튜브에 둘러싸인 모니터
불안정한 음音이 공포와 고통의 구릉을 지나고
찡그린 표정들 편안해지는 저녁도 있지
모니터에 나타난 피라미드 캡슐은
우주 어느 별에 벗어놓은 슬리퍼일까
고정된 초점에 말言이 멈추고 누워있는 기억들은
흰 페인트 벽에 묻은 얼룩을 자꾸 지우려한다
때때로 불편한 표정을 수리할 때가 있지
서서히 펀치로 구멍을 뚫어 줄거나 늘어나는 아픔
철사줄로 묶어놓고
우리끼리만 아는 이름을 불렀지
울음만큼 합창하기 좋은 것도 없어
후회와 연민이 동그랗게 모여들고
눈초리 사나워진 슬픔은 뾰족해
후렴 곡을 대신 부르는 팽팽한 코러스랄까
합창이 한 슬픔의 노랫말을 지나가지
구릉을 빠져 나가는 혼돈의 줄무늬
무선의 한 생이 유선의 몸으로 누워있는 시간
울음의 너울에 벗어놓고 간 음파가
어디까지 가려는지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
동전을 넣어도 연장되지 않는 일일극 같은
화면을 일제히 바라보았지.
김춘리∙강원 춘천 출생. 2011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2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선정. 천강문학상 우수상 수상. 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박정옥
노근리 철교 아래 우리 외 1편
경부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횡간에 가고 싶었다
황간을 잘못 읽은 첫 마음이
전생의 방랑으로 불쑥 솟아
마음의 간이역에
묵직하고 격하게
선로를 깔았다
영동을 지나 황간과 횡간 그 어디쯤
차를 타고 굴다리를 지날 때
늘 쑤시던 옆구리 근처, 노근리
노근노근 자근자근
시원스레 혈이 돌 수 없는
수 백 마리 짐승의 불면을 건넜다
생각해 보면 두 개의 굴다리는
우리를 짐승으로 바라보며
견딘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횡간을 따라
지구 반대편까지 깊숙이
죽은 듯 뿌리 내리고
우리가 거두기를 기다리는지도 몰라
뭉크를 따라
새벽안개 길 정지선이 없어
모네를 껴입은 몽롱한 색채가 달려든다
말할 것이 많은 저 인상주의 저음들
저음으로 오는 옆구리의 서늘함
서늘함으로 발랄한 새벽을 돌진하는
대형 트럭 위에
사건의 중심인 듯
납작 포개진 폐차들
전방만 주시하던 핏발 선 라이터가
밤새 취조를 끝낸 것처럼
부르르 진저리친다 내 옆구리를 치듯,
개처럼 캔처럼 구겨진 체념
자못 탄력적이어서
왕왕 충견처럼 짖어댄다
새벽을 엎어버릴 기세로
한때 주인 따라 맹주猛走하던 반듯한 입성들
그 끝이 낡음이라는 걸 알기까지
입체적으로 굴러온 야수파들
내가 천사를 그리길 원한다면 내게 그 천사를 보여주시오*
현장을 꽉 앙다문 오늘의 사실주의들이
다정한 존재처럼 부둥켜서
거침없이 찔러대고 있다 서로
부러진 감각을 세우듯
절규하는 사랑이듯
커브길에서 무시로
방심한 전복을 꿈꾸는
전륜 후륜의 동력에 맞물린
이 사태가 저들의 이데올로기다
*사실주의 거장 쿠르베가 했던 말.
박정옥∙경남 거제 출생. 2011년 ≪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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