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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신작시/박하리, 이외현, 박주성, 이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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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855회 작성일 14-08-08 13:46

본문

신작시/박하리, 이외현, 박주성, 이세진

 

박하리

변형 거미 외 1편

 

 

바람 부는 날 태양은 넘어가고 집을 짓는다. 그를 감싸고 있는 보송한 허물을 벗고 매일 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걸으며 집을 짓는다. 네온사인 빛이 흔들리면 흐느적거리고, 무리 지어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 집을 짓는다. 달려드는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에 눈을 감는다. 감으며 걷는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걸으며 짓는다. 등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문득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콩콩거리며 되돌아간 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꿈틀거리던 근육에 통증이 온다. 멈춰선 다리 버리고 가로수에 몸을 날린다. 이 쪽 저 쪽 거미줄을 날리며 집을 짓는다. 집에 빠진다. 거미줄에 걸려 퍼덕인다. 퍼덕이면서 친친 얽는다. 모두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대박의 꿈

―자영업자

 

재래식 변소가 뒤집혔습니다. 부글부글 끓더니 마당을 덮었습니다. 엎어지고 뒤집어져 온 마당이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복권구매시간 놓칠까봐 뛰어갑니다. 꼬깃꼬깃 적어간 번호 꺼내어 쓱쓱 줄을 그을 시간도 없습니다. 집을 사고, 공장을 사고, 땅을 사고, 화장실도 삽니다.

 

복권발매기의 잉크는 마르지 않습니다. 마당에 퍼질러진 향기도 그대로입니다. 복권발매기 앞에 기다란 줄이 꽃뱀 흉내를 냅니다.

 

혀가 바짝바짝 말라갑니다. 자동이요, 자동이요, 자동이요, 복권발매기도 자동이고, 재래식 변소도 자동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도 자동입니다.

 

박하리∙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막비시동인. 계간 ≪리토피아≫ 편집장.

 

 

 

 

이외현

어디가신다요 외 1편

 

 

비 저리 내리는데 이른 새벽부터 어디 가신다요.

파도가 뒤집은 놀음판 화투장같은 비 들이치는데,

조반도 안자시고 어딜 급히 가신다요.

술 마시면 개 되는 아랫방 주씨 밤새 고래 고래잡고,

지 마누라 패는 매 타작 소리, 정적을 찢는 신 새벽,

빗금으로 치는 회초리, 꽃잎 덩달아 하릴없이 지고,

퉁퉁 불은 개울물, 두리둥실 꽃배타고 떠내려가는데,

근데, 아부지는 어딜 그리 말도 없이 간다요.

아부지 가신 길에 밥알 같은 꽃잎들 떨어져,

지게 지고 다시 오실 길을 환히 밝혀주는데.

 

집 나가신 울 아부지,

장맛비에 꽃잎 씻겨나가 길을 잃었나.

같이 갔던 꽃비만 되돌아와

팔랑팔랑 저리도 환하게 내리누나.

 

 

 

 

누가 왔다

 

 

세렝게티 아침 햇살 아래 소의 뿔, 염소의 수염,

말의 꼬리를 가진 동물이 풀을 뜯고 있다. 누다.

누 안에는 누가 살까.

 

건기가 되면 누 떼는 지축을 흔들고

먼지바람 일으키며 세렝케티 초원을

떠나서 마사이마라를 향해간다.

수백만 마리의 누 떼가 마라강을 건너 갈 때,

세렝게티 먹이사슬 강자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억센 이빨을 가진 악어

돌기 갑옷으로 무장하고,

잡풀에 숨어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대열에서 이탈한 누를 응시한다.

낌새를 차린 누, 꼬리 철썩이며 무리로 뛰어간다.

누, 뛰는 말이다.

 

마라강의 거센 물살이 발목을 잡아챈다.

미끄러져 일어나려고 애쓸수록 물살이,

발목을 휘감아 수 십 마리의 누를 자빠뜨린다.

대머리 독수리들, 숨이 끊어진 누 몸통에 내려앉는다.

물살을 이불 삼아 흰 수염 출렁이며 누 길게 누워있다.

누, 늙은 염소다.

 

어렵사리 강을 건넌 누 앞에 막아선 바위 절벽,

가파른 절벽을 후들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사자는 인내심을 갖고 올라오는 누를 기다린다.

겁에 질린 누, 이판사판 뿔로 사자를 공격한다.

누, 성난 소다.

 

먼 길, 소의 뿔, 염소의 수염, 말의 꼬리 다 내어주고,

꿈결에도 어른대는 너를 찾아 목숨 걸고 누가 왔다.

 

이외현∙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막비시동인. ≪아라문학≫ 편집장.

 

 

 

 

박주성

측백側柏 외 1편

 

 

잎맥에 USB를 꽂는다 데이터 케이블을 따라 물이 뻗어나간다 허공에 파랗게 돋아나는 그늘 아가미를 빨아당긴다 그곳에서 건져낸 편지 한 통

덜 아문 바람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이파리를 들춰보면 물에 빠진 여자

간밤에 머리채가 한 움큼 뜯긴 여자

이끼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아랫도리를 씻는다

반지하 창틈을 두드리는 저녁놀

삼지창에 찍힌 듯

멍자국이 허벅지에 번진다

여자는 방바닥에 가난한 가을 저녁이라고 쓰다가

걸레로 훔쳐 지운다

 

햇빛 몇 가닥 잘라내 플레이어 속 그녀에게 붙여 넣는다 여자의 명암이 좀 더 밝아진다 여자의 위젯을 꺼내 창가에 붙인다 좀 더 따뜻하길 바라면서

일시 정지와 플레이 버튼의 토글링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 그러나

 

그는 늘 그늘

뿌리를 움켜쥐고 있다

길어 올릴 물은 몇몇 개

물의 옆구리를 데우기 위해서는 허공에 자신을 복사해야 한다

 

여자, 그늘의 아이디를 손바닥에 받아 적고 거울 앞에 앉아 귓불에 USB를 꽂는다 하얀 귀밑머리 무릎이 시큰거린다 아이들마저 없었다면 복사뼈를 부러뜨렸을 것이다

태어나던 날을 기리며 여자는 다시 화장을 한다 그늘이 없으면 말을 잊으므로

 

하루쯤 햇볕을 켜 놓으면 꽃을 밀어 올릴 수 있다

 

 

 

 

눈꺼풀을 자르다

 

 

바게뜨처럼 딱딱한 밤의 표면

이빨 가는 소리를 따라 어둠의 거죽이 떨어진다

네가 창문을 두드린다

잘게 부서진 까만 부스러기들을 줍는다

네가 따라올 수 있도록 하나씩 떨어뜨린다

 

이곳은 우리의 바깥

 

만지면 어둠은 눈깔사탕처럼 오돌토돌

입안에 넣고 굴리면 입안이 헌다

먹구름에 굳은살이 맺힌다

잇자국 새겨진 살과 살을 열어보면

배어 있는 소금기

맛보면 이 별의 결정은 무미건조하다

입술 둘레엔 침샘이 넘치는데

거울을 닦아보아도 당신은 누구신지

어디쯤에서 어깨에 걸쳐 계신 건지

왼쪽 쇄골을 지그시 누르는

바깥에 서 있는 이 별

 

밤비 온다 실리콘 가슴처럼

어색하게 네가 벽을 허물고, 방바닥을 쥐어짠다

바닥엔 구멍이 뚫린다

잠도 도망칠 바깥은 없다

네가 목덜미를 쓰다듬고

나는 실과 바늘을 찾아 잠을 깁는다

어디로도 기울지 못하도록

네 손목과 발목을 내 귀 옆에 걸어 둔다

 

박주성∙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이세진

삿갓배미 외 1편

 

 

신접살림 날 때

형제가 많은 아버지는

달랑 구멍 난 솥 하나 가지고 왔다는데,

갈퀴 같은 손으로 일군 땅

씨 뿌려 거두어

먼 외가 다랑논을 샀다는데,

너무도 기쁜 나머지

안개비 내리는 이른 아침

삿갓 쓰고 큰 골 다랑논 구경 삼아 가셨는데,

오던 비 그쳐 삿갓 벗어 논두렁에 두고 세어 본 다랑논

분명히 여덟 떼기로 알고 샀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일곱 떼기 뿐이라 

속은 것 아닌가 하고 삿갓 들고 다시 세어본 아홉 떼기

그때부터 삿갓 아래 있던 작은 논 삿갓 배미라 불렀고

대토할 때 그 떼기 논 빼고 팔았다 나는

떼기 논 산 이웃 사람 혹여

삿갓 벗어 잠시나마 우리 아버지처럼

마음 서운하실까 봐서였다

 

 

 

 

팔 그리고 손과 손톱

 

 

나는 고장 직전의 굴착기이다

먼 날의 아버지도 굴착기로

곧은 백양나무 일곱 그루 곱게곱게 키우셨고 

아버지 DNA 몸속에 흐르는 나는

앙증맞은 강아지 다섯 마리 곱게곱게 키워

살길 찾아 곳곳에 보냈는데

이제 낡아도 너무 낡은 굴착기

원활하게 윤활유가 돌지 않아서일까 

힘쓸 때마다 약해지는 유압

본체에서 파생된 붐대 펴고 접는 앞 붐대

연결 부위 파상破傷의 경고음警告音

그러나

반가운 사람 만나면

몸보다 먼저 뛰쳐나가는 삽날 

그리운 사람 떠나보낼 때

이별의 눈물 받아내는 손수건이었고

이빨은 나일론 장갑보다 더 질겨

평생 써도 닳지 않는

어쩌랴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허우적거리며 파고 들어야 할 굴착기

그 먼 날에 멈춰버린

아버지의 굴착기와 그 연한이 같다

 

이세진∙2013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저녁 무렵의 구두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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