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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윤의섭의 포에티카/표현의 기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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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5,777회 작성일 14-08-0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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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섭의 포에티카/표현의 기술 6

-산문시

 

 

일반적으로 시는 형식에 따라 자유시, 산문시, 정형시로 구분한다. 정형시는 시조와 같이 어느 정도 정해진 틀이 있어 다른 장르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그런데 자유시와 산문시의 구분은 애매한 구석이 많다. 어쩌면 정형시를 제외한 모든 시를 자유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예로부터 규정되어 온 장르 명칭이므로 이러한 논의는 소모적일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시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요즘의 경향을 보면 굳이 자유시다, 산문시다 나눌 필요가 없거나 구분하기 애매한 시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대개 행갈이로 전개된 시가 자유시이고 줄글로 한 문단을 이루고 있는 시를 산문시라고 본다. 그런데 연 구분이 되어 있으면서 각 연이 줄글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시는 산문시일까 자유시일까. 행갈이가 되어 있는 가운데 몇 개의 연은 줄글로 이루어져 있는 시도 있으며, 줄글로 이루진 여러 편의 연에 각각 숫자나 기호를 붙여 연시 형태로 쓴 시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시, 산문시 명칭을 편의상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때의 ‘편의상’이라는 말은 그 시가 갖고 있는 형식적 특징을 논하고자 할 때 자유시와는 다른 산문시만의 특징을 함께 거론해야할 필요성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의해 적용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많은 자유시 중에서도 특히 줄글로만 이루어진 시, 그리고 연 구분이 되어 있으면서 각 연이 줄글로 이루어진 시를 따로 산문시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 시가 ‘산문시’만의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시는 자유시와 구분될 필요가 없고 더 나아가 ‘작은 이야기’, 또는 ‘산문’과도 구분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문시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이 자유시와, 그리고 ‘산문’과 구분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히 줄글로 된 시를 지칭하는 것일까.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한 답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이겠고, 내가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한 가지 답은 ‘반복’이다. 반복이 없다고 해서 산문시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의 장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산문시에서 반복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산문시가 단순한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게끔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반복은 시가 의미의 강화, 운율의 형성, 점층적 전개, 구조적 심화 등을 이루게 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때의 반복은 단순한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지 않은 반복이 없다면 반복이 형성해 주는 위와 같은 역할들은 시에서 찾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반복 없이도 위와 같은 역할이 형성되어 있는 시도 충분히 있겠지만 반복은 위와 같은 역할을 보다 더 잘 수행한다. 어떤 산문시를 보면 동어반복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밋밋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때의 반복은 거론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산문시에서의 반복이란 아무래도 시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역동성을 부여하고 시가 입체적이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말고는, 내가 너에게 이 시를 줄 것 같으냐, 나는 조금 미쳐 있고, 조금 미쳐서 겨울밤의 이 누추한 시를 쓰고 있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이준규, 「복도」 전문(강조 부분은 인용자의 표시임)

 

복도에 대한 한없는 반복적 규정으로 이루어지 이 시를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복도’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시에서 복도는 ‘시’라고 마무리되고 있지만, 내 생각에 복도는 ‘쓸쓸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너’, 혹은 ‘당신’에 대한 사랑이, 어떤 만남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그러나 여전히 ‘망설여지는’ 우울로 복도는 존재한다. 이러한 복도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동원된 시적 장치가 바로 ‘반복’이다. 비슷한 문장 구조와 같은 어휘를 두 번 이상씩 반복하며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반복 구조는 자칫 대상에 대한 규정만을 나열하는 차원에 머무를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위 시에서는 그러한 위험성이, 내가 따로 진하게 강조한 부분에 의해 차단되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강조 부분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단절을 통한 사유 흐름의 지체, 혹은 일시 정지의 기능이다. 반복적 구조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따라가다 밑줄 친 부분에 이르러 독자는 앞의 반복과는 다른 구조와 의미를 갖는 문장을 접하게 되고 그 지점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는 다시 반복 구조를 반복한다. 두 번째 기능은 화자가 중요시하는 의미의 삽입에 있다. 다른 부분들은 복도에 대한 이미지와 의미를 형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강조 부분은 화자의 생각,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거의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게 반복 구조 안에 비반복 구조를 삽입함으로써 위 시는 평면적인 전개로 흐르지 않고 입체적 층위를 형성하는 구조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나무 위에 새가 앉아 있다.>

위의 문장을 첫 행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하시오.

 

스무 살 문창과 희영이는 먼저 어떤 나무일까, 어떤 새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좋은 묘사를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유기적인 상관물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 따위를 썼다가 고등학교 시절 교목인 플라타너스를 생각했다. 문득,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점심시간의 깻잎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고교 3년 내내, 나무 위에 앉아 영어 회화를 하고 미적분을 풀고 도시락을 까먹었다고 생각하니, 새가 내가 되었고 그 새는 먹먹한 새가 되었다. <바람의 염장이 세상의 모든 이파리들을 절이고 있다.>라고 마지막 행을 완성했다.

마흔아홉 살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상환 씨는 나무 위에 누각을 세웠다. 사상 누각이 되지 않기 위해 튼튼한 주춧돌을 쌓아 올렸고 원관념인 나무 옆의 보조 나무에 매듭을 묶어 자연친화적인 한 채의 전망 좋은 집을 지었다. 그 안에서 종일 잠을 자고 책을 읽고 사색을 했다. 새들의 알 수 없는 합창이 어떤 날은 라캉 라캉했고 어떤 날은 들뢰즈 들뢰즈했다. 아무려나,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누각 위에 몸을 뉘이고 죽을 날을 기다렸다. <나무 위에 나는 누워있다.>라고 마지막 행을 완성했다.

 

마흔 일곱 살 주부 수화 씨는 고향인 경산의 사과나무를 생각했다. 비와 바람과 번개에 낙과한 멍든 사과들이 거름이 되는 과정들을 보며 한 세상을 사는 이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 알의 사과가 다시 영그는 동안 친구가 서울로 가출을 했고 아버지가 읍내 다방 미쓰리와 바람이 났고 엄마가 머리끈을 싸맸고 나는 사과나무 아래서 성장을 멈췄다고 썼다. 그것이 사 실이냐고 젊은 선생은 묻지 않았다. 문제는 사실 유무가 아니라 그것이 육화되고 촉발되는 지점의 생경한 감각이라고 했다. <나는 작은 이파리 손을 들어 떠가는 구름과 수화를 하곤 했다.>라고 마지막 행을 완성했다.

 

마흔 살 일본인 카오리 상은 종이 위에 나무와 새를 그려 넣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강대 어학당에 입학해 한국인 남편을 만난 카오리 상은 일본 국적을 가졌고 한국 시민권을 갖고 있다.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지만 어디에도 내가 없는 것 같아 나무의 뿌리 그리고 새가 움켜쥔 나무의 질감에 대해 고민이 많다. 우연히 놀러 왔다가 시가 힐링이 될 수 잇다는 말에 얼씨구나 등록을 했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갖고 있는 어휘로는 아름답게 쓸 수밖에 없어서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새가 되고 싶다.>라고 마지막 행을 완성했다.

 

키도 작고 못 생기고 고집이 센 젊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시를 잘 썼지만 시를 잘 쓰지는 못 했다고 했다. 이런 것도 시라고 볼 수 있지만 시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시는 정작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끝없는 자기 갱신이며 그것을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무언가라고 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 시의 궁극인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도 젊은 선생은 출출하다며 막걸리나 마시러 가자고 한다. 막걸리를 시원하게 입속에 털어내고 담배를 물고 배후가 어떻고 천착이 어떻고 발화가 어떻다는 등 몇 마디 말을 지껄이는 젊은 선생을 보자니 이 수업을 계속 들어야하는지 의문이 든다.

 

살아도 내가 더 살았고 밥을 먹어도 내가 더 먹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 나이에 시를 배운다고 했는지. 시는 당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다고 하자, 젊은 선생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웃으며 잔을 꽉꽉 채워마셨다. 긴 겨울이 가고 있었고 아직은 짧은 해가 굴전집 창틈으로 토닥토닥 어께를 두드리고 있었다. 목로 위로 불콰해진 다섯 마리 새가 이마를 맞대고 시를 쓰고 있었다.

―김산, 「우리들의 일그러진 시창작수업」 전문

 

위 시가 보여주는 반복 구조는 앞의 시와는 또 다른 형태이다. 문장이나 동어의 반복이 아니라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된 각 연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메타시의 면모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 위 시는 시를 쓰게 된 과정을 시로 쓰고 있다. 각 연의 내용은 각각의 완결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동시에 각 연은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드러난 시 전체의 의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각 연이 반복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지루하거나 평면적이지 않게 보이는 이유는 각 연이 보여주는 내용이 서로 다르면서 그것이 시 전체의 한 부분으로써 꼭 필요한 부속품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시에서 반복적이지 않은 부분은 1연과 마지막 연인데 이 부분들로 인해 위 시의 의미가 더 심화되고 완결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산문시의 반복이란 파격에 그 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6연은 앞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완성된 마지막 행’이 보이지 않는데 내용상 필연적이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반복 구조에서 약간의 예외적 양상을 배치함으로써 발생하는 ‘가능한 예상의 거부’라는 효과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지속적인 반복은 시의 마지막을 예상케 하는 역작용이 있다. 그러나 앞의 「복도」나 위의 시 모두 뒤에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예상을 뒤엎고 비약적인, 또는 새로운 양상으로 종결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반복 구조로 이루어진 산문시에서 피해야할 것은 ‘독자의 예상 적중’인 것이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자유시든 산문시든 정형시든 시인이 쓸 내용에 따라 그것에 걸맞은 형식이 쓰기 전부터 어느 정도 가늠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러한 장르, 혹은 형식이 갖는 특징을 모두 고려하여 시를 써나가야 할 것이다. 시는 그런 전략으로 이루어진다.

 

윤의섭∙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 1994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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