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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책크리틱/김광옥|맑음과 비움 속에서 힘을 얻는-조동례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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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6,729회 작성일 14-08-08 15:35

본문

책크리틱

김광옥|맑음과 비움 속에서 힘을 얻는-조동례의 시집

 

 

시를 쓰는 사람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시가 사유의 산물이지만 경험과 생활의 산물일 때 힘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인생에서 절창할 시 몇 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조동례의 첫 시집 어처구니 사랑은 4년 전에 나왔는데 불교를 육화시켜 참 사랑을 추구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삶창, 2013.6)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천적 삶 속에서 불교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몸이 자연과 합일하여 자연이 몸으로 오고 몸이 자연이 되는 과정을 통해 맑음과 투명함이 삶의 힘으로 전환되고 있다.

 

제 몸에서 꺼낸 길 따라 아침공양 나서는 거미를 만났습니다

노오란 꽃잔에 이슬 한 잔 권하는 양지꽃과 마주 앉습니다

상수리나무를 포행하던 다람쥐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바닥에서 오체투지 참회하는 자벌레에게 합장합니다

서둘러 들일 나가는지 산꿩 부부가 잠시 소란스런 아침

나도 가야 할 길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산책 도반」전문

 

살아있는 주위의 풀, 꽃, 그리고 동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길을 가다 인연 닿는 이들에게 합장하고 다시 길을 간다. 시인이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풀과 벌레 그리고 동물들은 도반인 것이다. 풀은 들이고 꽃은 산이고 시간은 법가적 사유이고 절하기는 혹독한 수행이다.

시간 따라 변하는 자연의 순환에는 보편적 진리가 담겨 있음을 본다. 많은 시인들이 풀과 꽃을 살피지만 조동례 시인의 경우는 자연과 동거하는 상태다. 직접 풀과 꽃을 다루고, 산에 오르며 절과 명상을 생활화하고 있다.

시인에게서 자연의 순수함은 인간의 길과 진리를 통해 시로 승화된다. 같은 자연을 노래해도 김소월, 김영랑의 시에서 보이는 섬세한 심정 토로, 혹은 과거에 대한 향수나 그리움이 아니고 조동례에게는 자각, 현재 바로 지금의 현상, 그리고 지속해 가야할 여정들이다.

시인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이 시가 되고 생활이 시가 되는 것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체험한 보편적인 도가 일상생활을 통하여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말과 글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 자체’가 시가 되어야 한다. 시는 찰나를 살아가는 숨소리다. 자연은 들과 산에서 길로 바다로 절로 이어진다. 모든 길은 자기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거기에는 달, 파도, 꽃 등이 길을 인도하고 시인은 길을 가다가 눈, 비, 바다, 절, 스님을 만나고 마애불을 만난다.

 

몸부터 섞고 보자

서천을 지키던 광목천왕 깜빡 조는 틈 타

두 사람 한 몸 되었네

 

후회로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 말씀 말짱 거짓말

 

몸을 섞어도 마음이 안 따라 줄 때가 있고

마음을 섞어도 몸이 안 따라 줄 때가 있어

부처에게 속았다고 길길이 날뛰더니

눈코입귀 밀어버리고 돌 속에 들었네

 

일부터 저지른 후회가 어디 너뿐이랴

보이는 곳에나 보이지 않는 곳에나

나 아닌 나 왜 자꾸 생겨나지?

 

정령치 바래봉 가는 길목

돌 속에 들어앉은 마애불이여

몸이 먼저던가 마음이 먼저던가

―「마애불에 묻다」전문

 

자연과 몸이 하나가 된 시인은 몸이 자기의 정신과 일치하고 있는지 늘 살핀다. 몸과 정신은 하나인가 아니면 따로인가. 현대적 심리학에서는 몸은 몸대로의 자기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신으로 익힌 습관보다 몸으로 익힌 훈련은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고 몸 세포 속에 굳건히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익힌 맛은 죽을 때까지 기억되고 어려서 배운 수영이나 스케이트, 춤은 몇 번만 연습하면 상당한 수준으로 복원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행위의 주체인 몸과 생각의 주체인 정신이 하나이고 또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설법한다. 따라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기의 의지와 감성의 불일치는 여전히 삶의 화두다. 시인은 무에서 출발하고 무로 돌아오려 한다. 이때 무란 없음이 아니라 꽉 찬 공의 세계와 같다. 시간은 찰나의 연속이며 인간이 갖는 생각은 망상이다. 찰나는 영원으로 이어지며 망상은 덧없음을 낳기 일쑤다.

어떤 상황이건 의식에 걸림 없이 늘 자유로우며 한결같은 게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색의 본질이 공, 공이 곧 색의 본질)’의 도리다.

 

‘어깨 힘 빼세요 (중략)

힘주고 살아온 삶이 들통난 것만 같아

지금은 틈만 나면

있는 힘 다해 힘을 뺀다’

―「요가 하는 이유」중

 

조동례가 일상과 시에서 추구하는 바는 힘을 빼서 얻는 ‘공’의 세계로 자칫 덧없음과 혼돈될 수 있지만 실제는 속된 것의 비움 즉 맑고 투명함을 얻기 위한 수련이다. 자신이 맑고 투명해지기 위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길을 가다 자기 엿보기나 서구적인 지적, 연계적, 추상적, 폐쇄적인 것은 피한다. 오히려 사유적이며 독립적이고 형상적이고 개방적으로 고행에까지 이른다. 없는 문도 두드려 보려 한다.

 

‘한 번 들어가면

생사를 타파해야 나온다는

백담사 무금선원 (중략)

안으로 밀어도 바깥으로 당겨도

열리지 않는 문 (중략)

문 없는 문이라니 두드려나 볼 걸’

―「백담사 무금선원」중

 

시인은 그렇다고 불교적 사유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세상과 만나며 힐링healing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허팅hurting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상의 구체성을 담담히 읊는다. 소리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체험의 극화요 경험의 직관이지만 이는 내재된 조화의 세계관에 바탕하고 있다.

「어머니 형편」에서는 ‘잔딘지 풀인지 묵도 못 헐 것 심어 놨길래/ 싹 갈아엎어 부렀다 (중략) 마당 옥수수밭도 잔디밭으로 바뀌었다 (중략) 수십 평에서 손바닥만 하게 바뀐/어머니의 밭은/형편이 풀린 걸까 쪼그라든 걸까.’ 먹을거리가 사치와 편의(?)로 바뀌는 시골 풍경을 본다. 또한 「가난한 풍경」에서는 외로운 세상 사람과 만난다.

 

외롭다는 이유로

세상 등지고 싶은 사람 하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건

그도 배고프고 나도 배고팠던 것

세상을 등진 그가

나에게 한 발짝 다가오면

벼랑을 등지고 사는 나

물러 설 곳이 벼랑이어서

벼랑이 한 발짝 가까워지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 하나로

물러설 곳도 나아갈 곳도 잊고

주머니에서 풀씨 몇 개

비상금처럼 털어내고 있다

하마터면 나도 외롭다는 말을

탈탈 털어놓을 뻔했다

―「가난한 풍경」전문

 

조동례는 불교적 깨달음을 실생활에서 구현하려고 수행 중이다. 그러나 환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이 응어리져 있다가 시로 분출된다. 시의 집을 짓지 못한다면 벼랑 끝에 선 오두막이다. 시의 집에 때로 피신할 수 있음이 하나의 위안이다. 시인은 실제 절집 생활도 해 보았다. 그러나 머리 깎고 절에 있어도 절은 절일 뿐 몸이 절 안에 있다고 스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불경을 읽는다고 불경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절로 삼아 자기 안에 부처를 모셔야 한다는 것을 현실에서 알고 있다.

 

점심 먹는데

목을 타고 기어오른 개미 한 마리

나도 모르게 후려쳐 뭉개버린다

목을 노린 것도 아닌데

때는 늦었다 업아

죄와 용서가 대신 목에 걸렸다

―「업」전문

 

현실은 현실대로 팍팍하다. 그러나 허무를 극복한다거나 의지를 표출하지 않고 우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시의 구성은 1부 18편에서 내가 홀로 선 대상을 만난다. 2부 19편에서 혼자인 내가 길을 간다. 3부 21편에서 일상에서 여러 업을 수행한다. 함께, 때로 혼자, 그러나 늘 나에게로 돌아온다. 자연과 내가 길 위에서 님을 찾아 상호 교류하는 것은 청정한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여기에 죽음과 생, 미완의 사랑을 탐구하며 부처의 길을 찾아 수행 중이다.

표현에서는 굳이 시어를 고르지 않고 생활 속의 언어가 그대로 가공 안 된 원석처럼 여기저기 비죽거리고 나온다. 야생초처럼 건강하고 신선하다. 쉬운 언어들로 일상의 호흡 그대로다. 기교를 위해 줄을 띄우거나 부호를 덧붙이지 않는다. 한 숨으로 두런두런 리듬을 타고 이야기하듯 전달한다.

 

혼자 길을 가다

어깨 기울어진 빈집 보면

세상일 눈먼 사람 불러 살고 싶은데

―「기울어진 집」중

 

모든 새로 온 생각은

독 없는 새순 같아서

풀숲 중나리도 꽃 피는 중이다

―「중나리」중

 

하여 세상의 모든 사랑은

네가 아프면 내가 아파서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이다

―「연리목」중

 

위의 시 「기울어진 집」, 「중나리」, 「연리목」은 구어체, 운율, 생활어의 특징이 보인다. 시의 구성과 형식에서 웬만하면 행갈이 없이 시를 전개한다. 시 「안부」, 「불 끄라고 불!」, 「광천 장」에서 보듯 숨이 찬 듯하다. 한 현상은 지속적인 것이지 단속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이어진다. 대개의 시는 시의 리듬을 살리려고 띄어쓰기, 행갈이 등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물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겉과 속, 정신과 몸이 통합되어진 세계여서 시인은 통으로 관찰한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방하착!放下着’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젖은 꽃 안아 지주대를 묶는데

꽃이 무겁다 (중략)

 

쓰러져야 할 때 쓰러지지 않는 것

모두가 절망이다

그리하여 절망은 절망하라.

절망의 힘으로 자유로워라

―「절망의 힘」중

 

가난을 사랑했으나 가난하게 살지 못한

나는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그때서야 알았다 막차를 타면

어떤 버스든 종점으로 간다는 것을

종점이 시발점이라는 것을

―「시발」중

 

시인은 절망의 끝까지 내려가 보고자 하고, 종점까지 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비상을 시도한다.

몸과 정신이 하나인가 둘인가. 세상은 선과 악, 감정과 이성, 의식과 무의식, 선승과 낙승, 열리지 않는 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동례에게서는 불교적 사유가 보이지만 보편적 관습이라 할 유교적 정신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조선 문인화의 경우 난을 그린 그림 중 ‘청즉구정즉수淸卽久 靜卽壽’란 글귀가 있다. 맑고 고요함은 오래 간다는 것으로 번뇌 망상인 찰나를 이겨내면 맑고 고요함에 이르고 오래 견디는 힘이 생긴다. 때로 일필휘지로 그린 벼랑의 진경산수를 보는 듯하다.

중요한 건 현재의 삶, 살아있음이지 과거, 사유, 추억이나 흔적이 아니다. 시인은 독자를 시인의 생활과 세계로 끌어들여 사건과 사물과 환경에 대해 함께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을 보는 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초기 황지우 시에서 일부 보였던 길과 경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변하는 것이 진리’라는 시각에 의거할 때 경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깨달음을 들 수 있어 경이 진리라면 경은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변화하는 것이 경이다. 그 때 경은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을 ‘실현’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진리를 발견해 나가지 어떤 지리를 반영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진리의 그때그때의 실현 과정 속에 놓여 있다.

― 임우기, 황지우 시평, 명작의 감상과 이해, 이진 출판사, 1998, 139쪽

 

시 전체적 바탕에 깔린 이원적 현상, 즉 죄와 용서 「업」, 안과 밖 「백담사 무금선원」, 말과 글 「가장 쉬운 공부」, 몸과 마음 「마애불에 묻다」 등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승속을 초월한 이심전심(염화미소)의 길로 이끌어 가려한다. 문자도 말도 버리고 오직 스스로의 깨달음이 있을 뿐이라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문자와 말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깨달음으로 아는)을 내세운다. 따라서 소아적 아상我相에서 벗어나 대승적 차원인 무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반면 마음에 상이 맺히지 않고 물 흐르듯 무심의 경지에 이르려 한다. ‘힘을 빼서 힘을 얻는 근원적인 자연의 이치’를 터득한 것일까?

조동례가 꿈꾸는 세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렸습니다’(「가을 산」)’이거나, ‘바람 분다 산작약꽃 한 송이 천리향 만리향 칼 없는 칼 품고 무찔러 간다 혼자 견디는 참회의 눈물 맑아 이별을 벼린 향기로 세상을 화통하게 무찔러 간다 꽃 한 송이에 우주가 흔들린다’(「향기, 게릴라」)’에서 보이듯 조화롭고 향기로운 세계다. 시인은 경에 대해 집착하는가, 자유로운가. 자기 욕망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경과 늘 화해하지 못하는 속에서 번민하고 있다. 그때마다 새로운 길을 가는데 그 길은 외로운 고행이지만 새롭다. 앞으로도 계속 무소뿔처럼 홀로 갈 것인지 진흙탕 생활과 더 어울리며 연꽃을 피울 것인지 지켜 볼 일이다.

순수한 자연에서 맑음과 비움을 통해 얻은 힘으로 시를 산출하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조동례의 다음 세계가 기다려진다.

 

김광옥∙1999년 ≪심상≫으로 등단.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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