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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3/황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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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
-보르헤스의 「축복의 시」
황수현
축복의 시
-마리아 에스떼르 바스께스에게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깍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에서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가는 것을 바라본다.
(우석균 역)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 20세기 후반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진원지 보르헤스. 이렇듯 20세기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 보르헤스는 누구일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변호사인 아버지와 번역가 어머니 사이에 첫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영국계 할머니의 영향으로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우며 자랐으며. 청소년기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보내며 불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고 스무살이 되던 해에 스페인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아방가르드 문학 운동의 한 갈래인 ‘극단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청년 시절 시와 에세이위주의 작품 활동을 하다가 35세에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발간한다. 이후 단편 모음집 『픽션들』 (1944) 『알렙』 (1949) 시와 단상을 모은 『창조자』 (1960) 단편집 『모래의 책 』 (1975)을 발간하였으며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정리한 『불교란 무엇인가』를 알리시아 후라도와 공동 집필하기도 하였다. 1986년 그의 비서 마리아 고다마와 결혼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한 뒤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 있는 외딴 무인도에 한 사람만 데려갈 수 있다면 혹은 아끼는 물건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챙겨갈 것인가. 조금은 당황스러울 이 질문에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소중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사랑스런 연인 혹은 반려동물이라고 대답할까. 하지만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무인도에 백과사전을 가지고 가겠다." 고 말한다. 그가 사랑한 백과사전처럼 그의 작품은 백과사전적 지식의 보고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것은 세상에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지식에 접근하는 여행이자 즐거운 미로찾기이다.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길속에서 길을 잃고 확대경을 준비하지 않으면 행간에 아로새겨진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탐험.
길 떠날 준비가 되었다면 보르헤스의 단편과 시를 읽어 보자. 보르헤스의 글은 대부분 단편이고 하나하나가 허구의 조각이다. 결국 책을 읽는 것은 퍼즐을 맞추는 행위이고 컴퓨터 게임처럼 암호와 정해진 기호를 해독하지 못하면 들어설 수 없는 문이다. 이쯤 되면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을 떠올릴지 모른다. 피라미드와 고대 왕들의 무덤을 찾아 떠나는 모험가가 만날 무시무시한 사건을. 하지만 보르헤스는 탐험을 하는 모험가이지만 그의 최종 행선지는 먼지가 쌓인 책으로 가득찬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이 그의 미로이자 낙원이었고 그의 성소이자 휴식처였다. 그래서 그는 「축복의 시」에서도 "도서관에서 으레 / 낙원에서 연상했던" 것과 같은 상상의 박물관을 짓고 있다. 보르헤스는 시인이기도 하였고 단편 작가 (소설)이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체험을 작품의 소재로 쓰기보다 책에서 질료를 찾았던 만큼 책은 백과사전적 지식을 찾는 그에게 금궤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며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에 무릎을 치고 그 현묘함에 경외감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평생 신과 거리를 두고 지낸 보르헤스였지만...
보르헤스는 젊은 시절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꿈에서 호랑이를 만나기도 했고 기이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시력을 잃자 지팡이를 두드리며 꿈속의 도서관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거대한 지식의 숲에서 오솔길을 만나고 그 오솔길을 따라 가다 책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에 의해 해독되도록 운명지어진 그런 책의 미로로 독자를 초대한다. 그래서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길을 찾고 마침내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을 빠져나오듯이 독자의 개입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스스로 실을 풀어가며 책을 읽고 추리하는 법. 그래서 현명한 독자는 디오게네스처럼 등불을 들고 '현자' 대신에 '책'을 찾아 떠나야 한다.
한국 문단에 소개된 보르헤스는 '환상주의 문학에 등불을 밝힌 작가'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를 모색한 천재적인 소설가' 로 알려졌으나, 그는 정작 평생 '시인 보르헤스'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칠레의 작가 네루다가 민중시인으로 알려졌으나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 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읊은 사랑의 시인이었음을 떠올리면 보르헤스의 다른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시에 네루다식 사랑의 표현을 찾기는 어렵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시에 섬세하고 주관적인 서정성을 덧입히기보다 관조적 거리를 둔다. 그래서 시는 약간은 형이상학적이다. 여인과 에로티즘을 노래하지 않았으니 그의 시에 고혹적인 여성 보다는 남성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팜파스를 가로지르는 목동 가우초의 이야기나 서사시의 영웅이거나, 위대한 작가를 시적 소재로 부르니, 시는 절멸의 한을 노래하거나 사랑의 강을 건너지 않는다. 그러나 「축복의 시」처럼 사색의 미로에서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끼는" 대목에서 시인의 알터 에고 (alter ego)는 즉자적 자아를 버리고 대자적 자아로 거듭난다. 그의 시는 실존을 노래하고 있던 것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도서관장으로 혹은 도서관 관련 일을 하며 평생을 보냈던 보르헤스. 하지만 시력을 잃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도서관의 서고 사이를 걷는 보르헤스의 시적 화자는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헤매이고" 있다. 이제 '문자 도시'가 아닌 '눈먼자의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 그에게 도서관은 다음의 시구처럼 아련하다.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그는 비서이자 후에 아내가 된 마리아 고다마가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혼혼히 잠들었다. 아니 꿈꾸고 있다.
황수현/경희대 스페인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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