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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3/장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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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890회 작성일 15-06-1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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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의 시인, 안치 크로그(Antjie Krog)의 흑인 되기

장시기

 

 

I. 아프리카너(Afrikaner) 여성의 흑인 되기

 

소설가의 시 쓰기처럼 시인의 소설 쓰기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시와 소설은 단지 글쓰기 형식의 분류일 뿐이지 소설과 같은 시나 시와 같은 소설은 국가와 대륙을 구별하지 않는 인류 문학사 전체에서 부지기수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너 여성 시인, 안치 크로그의 최근 소설, 『흑인 되기의 갈망(Begging to be Black)』은 소설의 형식으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의 성격과 남아프리카의 역사, 그리고 시적 이미지들의 혼재라는 측면에서 그녀만의 특별한 글쓰기가 되었다. 소설 속에서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영어교사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와 흑인해방운동에 참여했던 안치 크로그는 자신의 의식과 삶의 관계 속에 내재해 있는 백인의 지식과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양한 이미지들을 병치시키고 있다. 그녀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사건들과 현재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서구 유럽의 독일,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중앙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 레소토를 오갈 뿐만 아니라 과거 19세기에 살았던 프랑스 선교사 유진 카살리스나 레소토 공화국의 창시자였던 모쇼에쇼에 왕과 같은 백인과 흑인의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사유, 현재의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 등등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질 들뢰즈와 그를 전공하는 문학과 철학 교수들과의 대담 등등이 혼합되어 있다.

거대한 장편소설의 다양한 인물들과 삶의 방식들을 제시하면서 안치 크로그가 제안하는 『흑인 되기의 갈망』이 지니는 궁극적 의미는 아주 명료하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백인이라는 정체성과 남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너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어떻게 “흑인 되기”와 “아프리카인 되기”를 달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러한 “흑인 되기”의 총체적 인물로 제시하는 역사적 인물이 바로 기독교주의를 바탕으로 지식을 형성한 19세기 백인 제국주의 식민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대답한 레소토 공화국, 바수투 민족의 창시자였던 모쇼에쇼에 왕이다. 어떻게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로 존재하는 나가 또 다른 “나는 나”로 존재하는 수많은 “나”의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안치 크로그의 대답 또한 명료하다. 그것은 서구 유럽의 기독교주의, 그들의 찰학적 인식론,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의 세계관 속에서 “나는 나다”라는 모쇼에쇼에나 아프리카 흑인들의 일상적 삶에서 나타나는 삶의 인식론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과 세계관 속에서 나타나는 인식불가능성의 지대는 안치 크로그가 『흑인 되기의 갈망』 이전에 발표한 수많은 시들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한 시들의 가장 대표적인 시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colonialism of a special kind」이다.

 

II.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

 

1.

‘나는 용서를 받고 인정받았으니...

나는 내 삶을 지속시킬 수 있다‘

 

“나는 용서를 받고 인정받았으니...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지속한다‘

 

‘나는 내가 용서받은 것이 너무나도 놀랍다...

그들은 심지어 효과적으로 미워하는 방법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용서받은 것이 너무나도 놀랍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삶을 지속한다‘

 

부자를 위한 정의

가난한 자를 위한 용서

 

사람들은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부끄러워한다

 

가장 깊은 심연 속에서

우리는 분노를 존경하고

증오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경탄하기 때문에

 

2.

즐겁게 대지에 사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여기 내일로 지나가버린 오늘

 

그들이 남긴 유일한 발자국은

풀잎과 나무들의 언어

 

그들은 무엇이 되는가?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가?

부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항상 인간을 존중하는 그들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그들

 

그들은 무엇이 되는가?

 

대지와 생명의 풍요로움

그 세계와 그것 속에 사는 사람들

위대한 힘에 포함되어 있는 그들

 

그들은 무엇이 되는가?(시 전문, 필자 옮김)

 

“식민주의”에 대한 정서적 느낌과 역사적 의미는 근대 제국주의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역사적 인식에서 아주 다양하다. 근대 제국주의 피식민자의 경우, 식민주의라는 언어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의미로 인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근대 제국주의 식민자의 경우, 식민주의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의미보다도 문화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실제로 “콜로나이즈(colonize)”라는 동사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으로 “식민화하다”보다는 문화적인 삶이나 생명을 “이식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따라서 안치 크로그의 최근 소설, 『흑인 되기의 갈망』에서 보여주는 “흑인 되기”가 근대 서구 유럽의 백인들이 구성한 지식과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안치 크로그의 삶과 생명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과 세계관을 토대로 한 삶과 생명이 되고자 하는 “갈망”인 것처럼, 시인 안치 크로그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적 이미지들은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끄트머리, 오늘날의 케이프타운 지역을 항해한 이후로 만들어진 근대 유럽문화의 이식이 완전히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는 1994년 만델라 정부의 등장 이후에 만들어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주 특별한 종류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별한 종류”의 삶의 방식과 문화는 우리와는 달리 이미 서구 유럽의 삶의 방식과 문화가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지역에 최초로 이식된 1652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다. 1652년부터 1994년까지의 남아프리카의 역사는 서구 유럽의 문화적 기준 속에서 정치적인 우월성과 경제적인 풍요를 토대로 서구 유럽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남아프리카 지역에 이식한 서구유럽ㆍ백인ㆍ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적 식민주의의 시대이다. 아메리카나 다른 아프리카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300년 동안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난 정치적 제도와 경제적 수단들을 통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강요된 근대적 식민주의의 삶과 문화는 때로는 폭력을 통하여, 때로는 종교적이거나 국가적인 제도를 통하여, 때로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지식과 교양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항상 서구적 삶의 방식과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지역의 사회와 국가에서 배제되거나 죽음의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는 폭력이었다. 지난 300년 동안 서구유럽의 근대적 식민주의를 통하여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멸종된 인류의 종족만 하더라도 수십 종족에 이른다. 서구 유럽의 근대적인 삶의 방식과 문화, 그리고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지식체계 속에서 그것은 결코 “용서를 받고 인정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안치 크로그는 1994년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위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삶을 시의 제 1장 서두에서 “‘나는 용서를 받고 인정받았으니.../ 나는 내 삶을 지속시킬 수 있다‘// “나는 용서를 받고 인정받았으니.../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지속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안치 크로그와 같은 근대의 서구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비서구 지역들에서 행한 잔인한 폭력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있는 남아프리카와 같은 비서구 지역에 살고 있는 서구적 근대의 지식인들에게 1994년 이후에 “‘나는 내가 용서받은 것이 너무나도 놀랍다.../ 그들은 심지어 효과적으로 미워하는 방법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용서받은 것이 너무나도 놀랍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삶을 지속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러한 근대적 서구유럽의 지식과 삶의 방식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식불가능성의 지대에서 안치 크로그는 근대 서구유럽에 의해서 만들어진 지식과 삶의 가치체계를 재검토한다. 근대적 지식과 삶의 인식체계 속에서 “정의”는 항상 “부자를 위한 정의”이고, “용서”는 항상 “가난한 자를 위한 용서”이다. 그래서 남아프리카에서 근대적 서구유럽의 지식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근대의 “사람들은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정신적으로 “부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1994년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현실의 사건을 토대로 안치 크로그는 서구 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삶의 방식이라는 인식불가능성의 지대를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에 내재하고 있는 “가장 깊은 심연 속에서/ 우리는 분노를 존경하고/ 증오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경탄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을 진보이며 발전이고 문명일 뿐만 하니라 선진성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지식의 인식체계는 “분노”와 “증오”와 “복수”라는 야만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지식체계라는 것을 안치 크로그는 스스로 인정한다. 이러한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에 대한 해체는 그녀의 소설, 『흑인 되기의 갈망』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재적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인식불가능성의 지대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치 크로그는 서구유럽의 근대적 인식론의 체계를 버리고, 질 들뢰즈의 탈근대 철학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생성적 사유(thinking of becoming something)”의 세계로 들어간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의 1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이 제시하는 인식불가능성의 지대에 대한 시적 이미지의 제시라면, 시의 2장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에 대한 “생성적 사유”의 시적 이미지들이다.

 

III. 탈근대의 생성적 사유와 삶의 방식

 

서구유럽의 세계에서 안치 크로그가 제시하는 “흑인 되기”의 탈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은 아주 요원한 “내일”로 인식되지만, 흑인과 백인 그리고 유색인들이 공존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러한 탈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은 “내일로 지나가버린 오늘”의 현실이다. 지난 350년 동안 강요된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을 버리고 “즐겁게 대지에 사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탈근대적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일어난” “그들이 남긴 유일한 발자국”은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의 언어가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생명으로 존재해온 “풀잎과 나무들의 언어”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무엇이 되는가?”라는 안치 크로그의 생성적 사유의 질문은 “그들은 풀잎과 나무들이 된다”라는 대답을 내재하고 있다. 서구유럽의 백인들이나 서구유럽의 백인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인권이나 평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선택한” 아프리카 “사람들”과 “부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항상 인간을 존중하는” 아프리카의 흑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동물들과 같은 “그들”은 분명히 “대지와 생명의 풍요로움” 속에서 “그 세계와 그것 속에 사는 사람들”이고, 또한 “대지와 생명”의 “위대한 힘에 포함되어 있는” 대지와 생명 그 자체의 힘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대지와 생명”으로 생성되는 존재들이다.

풀잎과 나무들이 되고, 대지와 생명이 되는 아프리카인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안치 크로그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를 “흑인 되기”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치 크로그가 제시하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제시하는 근대 제국주의의 식민자나 피식민자의 지식체계가 아니라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인간과 사회 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생명 그 자체의 생성적 지식이다. 그 생성적 지식은 아프리카인들에게 풀잎 되기나 나무되기로 존재하고 있고, 서구 유럽의 근대적 지식과 삶의 방식에 오염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노동자 되기 등등의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 되기”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서구유럽의 근대적 지식을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나 논리적 철학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러한 생성적 사유는 예술적 사유 속에 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모든 존재들 간의 관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다. 안치 크로그는 1994년 만델라 정부가 등장한 이래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대적 방식과 전혀 다른 “어떤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와 “흑인 되기의 갈망”이라는 탈근대의 생성적 사유체계가 지니는 지식과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 위하여 때로는 시를 쓰고, 때로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닐까?

 

장시기(張時基)

현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 및 영화평론. 저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학과 언어(동인, 1996), 근대와 탈근대의 접경지역들(사람생각, 2002),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당대, 2005), 들뢰즈와 탈근대의 문화연구(당대, 2008), 자유로운 몸으로 영화를 철학하다(당대, 2010), 영화로 떠나는 노마드의 여행(당대, 2013). 역서: 거꾸로 가는 마차(들녁, 1992), 나는 아프리카인이다(당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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